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80화 (80/131)

# 80

악녀 메이커 80화

역광에 어두워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강렬한 생명력으로 반짝였다.

그러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네 시간밖에 못 잤어요.”

“…….”

“좀 더 쉬세요.”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그녀의 권유는 낯설다 못해 거부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레녹스는 더 쉬라는 말에 청개구리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 상태가 완전히 호전됐는데 괜히 누워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마…….”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가 왠지 목이 메어 작게 몇 번 헛기침했다.

“마물은?”

“마물은 다 죽었고, 곧 지원군이 올 테니 레녹스 경이 할 일은 다 끝났어요. 혼자 버티느라 힘드셨겠네요.”

역시 정확히 ‘레녹스 경’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이다.

그런데 쉬라는 말이 나오다니. 심지어 혼자 버티느라 힘들었겠다고? 생소하다 못해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말들이다.

“……당연한 일을 한 거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할 테죠. 그래도 힘들 테니까 기회가 있을 때 좀 푹 쉬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먹고 살자고……?”

아니, 이건 사명이었다.

그의 명예와 자부심을 그렇게 폄하하다니. 하지만 레녹스는 입술을 뻥긋거렸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먹고 살자고…….’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레녹스는 몸을 굳혔다.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알아요? 음, 알 리가 없나.”

그녀는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제가 경험자로서 조언해 드리는 건데, 쉴 때는 쉬는 게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 과로사 할 걸요?”

그 말에 순간 레녹스는 절벽에서 깨어났을 때 봤던 샬럿의 절박한 눈빛을 떠올렸다.

말로는 간절히 그의 안위를 묻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끝없이 도와주세요, 지켜 주세요, 구해 주세요, 저 대신 희생해 주세요, 하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한평생을 마주해 온 눈빛인데 모를 리가. 오히려 레녹스는 타인이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익숙했다.

그들은 레녹스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계에 몰리면 그도 다치고 지치기도 한다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력자의 짙은 녹색 눈동자는 그보다 ‘제발 말 좀 듣지?’ 하고 슬슬 짜증을 내는 듯했다.

“하나 둘 셋, 할 때까지 눈 안 감으시면 억지로 감겨 드릴 거예요.”

아일라는 레녹스가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를 완전무결한 초인이 아닌 일반인 다루듯이 취급하는 것이 굉장히 낯선 기분이었다.

마치, 스승님을 모시고 살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의아할 정도였다. 그녀는 다른 의미로 레녹스 못지않은 유명 인사인 데다가, 황태자를 호위하는 동안 아주 지겹게도 봤던 영애였다. 한마디로 레녹스는 소문으로 무성한 아일라의 만행을 전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산 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레녹스에게 있어서 그 지원군과 아일라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생태계가 파괴되어 쥐가 하늘을 나는 것만큼이나, 1퍼센트의 가능성조차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은 분명히 그 메르텐시아 영애였다.

쌍둥이? 아니면 사실은 이중인격이었다거나? ‘그’ 아일라와 ‘이’ 아일라가 동일 인물일 거라는 가능성보다 황당한 생각이 먼저 불쑥 들었다.

“메르텐시아 영애가 어떻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느냔 질문보다, 대체 어떻게 혼자 마물을 처리할 정도로 강하냐는 뜻이었다.

레녹스는 나타난 지원군이 적어도 용병이라거나 근처 영지의 기사라거나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메르텐시아 영애가 변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건…….’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레녹스는 아일라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것은 다 차지하고서라도 그 어떤 요행으로도 단기간에 검술 실력을 늘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결론은 하나였다.

아일라는 사실 지금까지 그녀의 날카로운 발톱을 숨겨 오고 있었다는 것.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레녹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일라는 자신이 판단했던 것보다, 아니, 판단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황태자를 광적으로 쫓아다니던 그 모습조차 계산된 연기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아일라를 빤히 응시했다. 물론, 그가 쓰러질 당시에 제정신이 아니라 그녀의 실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하나, 둘, 셋―”

방금 예고대로 숫자 셋을 센 아일라는, 여전히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레녹스의 눈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어깨를 눌러 그를 억지로 도로 자리에 눕혔다.

‘억지로’라고는 했지만, 손길은 부드러웠다.

몸을 완전히 회복한 레녹스는 충분히 반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그런 것처럼 몸을 맡겼다. 그리고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본인의 판단에 스스로 혼란스러워했다.

“샬럿은?”

뒤늦게 그녀의 상태를 묻자.

“무사해요.”

조곤조곤한 음성이 돌아왔다. 마치 자장가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대체 여기에 왜 있느냐, 우리를 어떻게 찾은 거냐, 목적이 뭐냐, 애초에 샬럿이 무사하다는 것도 진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 이성이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끝도 없이 속삭였지만.

“자, 주무세요.”

하지만 그녀가 다시 안식을 선물하자, 낯설면서도 어딘지 벅차오를 정도로 그리워서, 그리고 거부할 수 없이 달아서.

레녹스는 그대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

나는 결국 몸 상태를 이기지 못한 레녹스가 바닥에 철퍼덕하고 멋대가리 없이 쓰러져 버리는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레녹스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아일라의 우월한 높이뛰기 솜씨를 뽐내며 그대로 마물의 등 위에 올라타 단박에 쓱싹. 그리고 도도한 시선으로 슬쩍 그를 내려 봐 준 뒤에 바로 다음 차례의 마물로 뛰어갔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아무리 내가 검술에 재능이 있고 마물의 포식자라고 해도, 아직 무게까지 잡으면서 싸우는 건 무리였다. 좀 더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의식하면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심한 뻘짓을 했다.

예를 들면 거미의 등에 올라타려다가 잘못 밟고 발을 헛디뎌서 미끄러졌다든가, 그 뒤에 낑낑거리며 거미 등을 기어 올라갔다든가…….

레녹스가 본인 싸우기에 급급해서 내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아주 차갑게 식어 버린 표정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분명 소드 마스터 이상부터는 기척만으로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어 낼 수 있다고 설정한 것 같은데.

‘……제발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몰랐다고 해 줘.’

나는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아니면 적어도 림비 토드스툴 밟고 미끄러진 가장 꼴사나운 모습만 몰랐다고 해 주라. 아니, 등 타고 기어 올라간 것도 만만찮게 꼴사나운가.

에이 씨, 몰라.

폼 잡는 건 실패했지만, 어쨌든 구해 줬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아닌가. 레녹스나 샬럿이나 내게 생명을 빚졌으니 초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네가 우릴 구해 준 건 고맙지만 허우적대며 싸우는 모습이 심히 깨는군.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지,라고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일단 주변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레녹스를 질질 끌었다.

림비 토드스툴은 나와 레녹스 주위를 빙빙 돌면서 그를 집어삼킬 틈만 보고 있었다. 겨우 의식을 잃은 강한 인간을 어떻게든 먹고 싶은데, 나 때문에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떽! 저리 가, 이놈들아.”

나는 파리 쫓아 내듯 손짓하면서 림비 토드스툴들을 저 멀리 보낸 뒤에 그를 안전한 동굴 구석에 패대기쳤다. 그 옆에는 샬럿이 계속 내 다리 내놓으라고 하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왜 하필 유명한 귀신 대사를…….’

진짜 무섭습니다만. 나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샬럿을 슬슬 피했다. 그리고 다시 기회만 틈틈이 엿보고 있는 림비 토드스툴들을 처리했다.

이번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되는 대로 맘껏 죽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멋있게 싸운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세상에는 참 되는 일이 하나 없다.

이제부턴 여기서 이렇게 날이 밝아 기사들이 찾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직도 귀신 소리를 내면서 흑흑 울고 있는 샬럿에게 다가가 보았다.

‘설마, 귀신이 빙의한 건 아니겠지.’

내 소설이 아무리 세기말이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 막장 같은 전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일단 해독을 하는 편이 좋으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샬럿에게 말을 걸었다.

“안젤로 영애?”

“흑, 흐윽…….”

역시 대화가 안 되려나.

나는 빠르게 대화를 포기하고 그대로 두 남녀를 동굴 밖까지 질질 끌어낼 생각이었다. 어쨌든 독가스 잔여물이 남아 있는 동굴 안보다는 밖이 낫겠지.

샬럿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그녀가 뭐라고 작게 중얼대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엔 또 무슨 귀신 소리를 내려고? 하면서 살짝 거부감을 느꼈다가 귀를 기울였다.

“아파, 다리가 너무 아파…….”

……다리?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샬럿의 다리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얕다고도, 깊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상처가 그녀의 종아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났다.

매번 언급하는 사실이지만 <백합 아가씨>는 10년 전에 집필한 소설이었다. 그때의 마냥 철없고 어렸던 윤하늘은 누군가의 평생 책임지고 지켜 준다는 말을 참 듣고 싶어 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 와서 그런 건가? 아니면 열여덟 살 때부터 이미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며 내 생계는 내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일까. 기댈 곳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샬럿은 레녹스와 함께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그만 다리를 다치게 된다. 그 상처는 영원한 흉터로 남게 되는데, 레녹스는 샬럿을 볼 때마다 그 일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레녹스가 샬럿의 어장에 완전히 들어가게 된 아주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거 참 고민되네.

저걸 치료해 줘, 말아?

‘일단 레녹스부터 치료해야겠다.’

그보다는 레녹스가 구석에서 죽어 가고 있었기에 샬럿의 상처는 나중으로 보류하기로 했다.

나는 내 오른손 중지에 끼워 둔 에메랄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레녹스를 툭, 건드렸다.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이 반지는 사실 아티펙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메랄드로 보이는 비취색 보석인데, 정해진 횟수만큼 사용할 수 있는 치료 마법이 담겨 있었다. 오늘 일을 대비해서 이곳 영지로 향하기 전, 메르텐시아가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마법이 통하지도 않고 재능도 없으나, 반지에 마법을 담아 온다면 얘기가 다르지.

킬리안의 말에 의하면 내 몸은 전도체 같은 상태란다.

좀 더 자세히 예를 들자면 번개 치는 날의 피뢰침처럼 내가 받은 충격, 즉, 온갖 능력들을 그대로 땅으로 흘려보내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전혀 통하지 않아도 발동시킬 수는 있다고 한다.

나는 레녹스의 명치쯤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치료 마법을 레녹스의 몸 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기절한 와중에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그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치료를 성공적으로 시작한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손을 떼어 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아까부터 내 다리 내놔, 타령을 하고 있던 샬럿이 갑자기 내 다리를 절박하게 붙잡았다.

그녀가 엄청난 악력으로 발목을 꾹 쥐어 오자, 나는 여자 주인공이고 나발이고 순간 경기를 일으키며 그녀를 걷어찰 뻔했다.

아까부터 왜 계속 귀신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정신도 못 차리는 것 같은데 어떻게 재울 방법 같은 건 없나? 기절이라도 시켜?

그때 샬럿이 입술을 달싹였다.

“……해.”

응?

“내 다리 먼저 치료해.”

그녀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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