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악녀 메이커 81화
샬럿은 내 손에서 퍼지는 새하얀 빛과 손가락에 끼워진 아티펙트를 게걸스럽게 응시했다.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아직 내가 누군지는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나 또한 방금 샬럿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귀를 후벼 보았다.
물론, 귀에 갑자기 뭐가 들어갔다고 해서 제대로 들은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였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흉 지면 어쩔 거야?”
이번에는 분명 똑똑히 들었다.
덜덜 떨리는 샬럿의 목소리는 분명 동정심이 절로 일 정도로 애처로웠지만, 이상하게도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마치, 제삼자가 샬럿의 말을 대신 더빙해 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착한 천사표 샬럿.
그런데 쇼크사로 죽지 않을까 염려되는 레녹스를 놔두고 자신 먼저 치료해 달라는 억지를 부리다니. 그것도 고작 흉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말이다.
‘……어떻게 샬럿이 저런 말을?’
아, 알겠다.
지금 저 여자는 샬럿이 아니라 샬럿의 탈을 쓴 마물인 거다. 킬리안에게 이 산맥에 그런 마물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역시 세상은 알아도 알지 못하는 미지로 가득 차 있는 법. 나는 현실 도피하면서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다.
물론, 전부터 샬럿이 어딘가 싸하고 느낌이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긴 했었다.
특히 내가 카지노 호텔에서 준 선택권을 뻥 하고 걷어찼을 때. 황태자의 고백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그 쉬운 양자택일에서 그녀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도 못했을 때.
‘선택 장애도 그 정도면 고의가 아닌 건지, 심히 의심스럽기는 했지.’
나는 지금까지 샬럿과 엮이는 남자들을 ‘물고기’라고 칭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자들이 샬럿의 매력에 알아서 낚이는 거지, 그녀가 의도적으로 어장을 치는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래 소설 속 여자 주인공 곁에는 여자 주인공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아서 남자들이 멋대로 꼬이고 반하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애초에 이 소설은 내가 쓴 거였다! 아무리 10년이 지났다지만, 내가 쓴 소설의 주인공 캐릭터를 작가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샬럿은 원래 자각이 없고 순수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해서 아무도 거절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말입니다.
‘분명 소설을 쓸 당시에는 그런 의도로 썼는데……. 하지만 카지노 호텔에서 봤던 그녀의 언동은 누가 봐도 의도적인 어장…… 이었지.’
그때부터 의심은 했지만 애써 언급을 피해 왔던 사실이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의 인성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에서 엄청난 위화감이 느꼈으니까.
그래, 뭐,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어장까지라면 샬럿은 내가 묘사한 것만큼 천사는 아니지만, 상당히 이기적인 일반인 정도로는 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보다 훨씬 더 이하가 아닌가.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 준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본인 상처가 더 중하다니, 인성의 상태가? 아무리 독에 중독됐다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하는 게 말이 되나?
분명 그녀가 사춘기를 겪을 시기는 지났을 텐데, 대체 그동안 샬럿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뭐라 답해야 할지 머뭇거릴 때였다.
“……아일라 메르텐시아?”
샬럿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껏 매달리던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한참 살피다가 내가 아일라라는 확신이 섰는지 그제야 내 다리를 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여긴 또 어떻게 온 거예요?”
마치 끔찍한 악몽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본래도 새하얬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샬럿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는 치켜뜬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역시 또 멋대로 제 걸 뺏으려고 온 거죠? 당신이 나타날 때마다 그랬어. 다, 다 뺏어 가려고 하고…….”
나는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또 놀랐다.
트란디아 공작의 등 뒤에 숨어서 울먹일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으니까. 그때는 공작의 등 뒤에서 나올 생각도 않더니.
오히려 주변에 감싸 줄 사람이 없으니까 더 대담해진 걸까? 아니면 그냥 독에 중독돼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그녀의 말을 인식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뺏는다고?”
나는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뺏었잖아요. 제가 아무리 착해 보인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본 줄 알아요? 영애께서 제 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셨잖아요.”
미안, 진짜 모를 줄 알았다.
‘진짜 내가 원래 알던 소설 속 샬럿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샬럿을 응시했다. 일단 본인 입으로 착하다고 하는 것까진 그러려니 하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나올 말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녹스와 샬럿의 종아리 상처를 번갈아 보았다. 적어도 지금부턴 소설 내용이 어땠든 간에 더 이상 그녀가 착해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뺏는다니,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안젤로 영애의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겠고.”
어쩔까 고민하다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물론, 조만간 샬럿의 주인공 자리를 뺏어 올 계획이기는 했다만, 나는 아직 ‘뺏는다’의 ‘ㅃ’ 자도 시작하지 않았는걸? 벌써 이렇게 엄살이어서야 나중에 어떻게 버티려고 저러는 건지.
내 태연한 대답에 샬럿이 표정을 살짝 굳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영애께서 다 가져가려고 해 놓고선 제 것이 뭔지 모를 수가 있어요? 귀족들의 관심도! 주목도! 전하도! 공작도! 레녹스 경도 다 제 거였는데! 제가 받아야 마땅하잖아요?! 조금도 나눠 가질 생각 따윈 없다고요!”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샬럿이 목소리를 깔며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영애께서는 원래부터 가진 것도 많으시면서, 어쩜 그렇게 욕심이 많으시죠?”
이제 보니 샬럿은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대체 내가 언제 베르너와 트란디아 공작과 레녹스를 뺏으려고 했다는 건지. 난 아직 ‘ㅃ’도 시작도 안 했다니까?
애초에 샬럿이 내게서 그 모든 것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그것들을 전부 다 누려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소설 속에서 너무 오냐오냐해 줘서 맛이 갔나?’
어릴 때부터 뭐든 원하면 다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사랑해 주고 양보해 주며, 찬양해 주는 식으로 써서 애를 버렸나?
그러고 보니, 이런 옛날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한 아이의 부모가 ‘내 아이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아이는 너무 사랑만 받고 커 버리는 바람에 아주 개차반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훗날 그 부모는 다시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내 아이가 모두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고 한다.
물론, 사랑받고 컸다고 해서 모든 아이가 성격을 버리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샬럿의 언행으로 봤을 때 유독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나는 어쩐지 그 이야기 속의 부모의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쯤 진짜 실패도 시련도 줬었어야 했는데, 내가.
그녀가 저만큼이나 세상을 만만하게 보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을까. 그녀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잘못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벌조차 받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썼으니까.
‘아이고…… 어쩐담.’
나는 이 소설을 10년 전에 쓰긴 했지만, 여자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샬럿을 편애해 왔었다.
딱히 잘해 준 건 없지만 못해 준 것도 없고, 나름 기회를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제는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뺏는다고 뺏어지면, 그걸 진정 영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요?”
내가 무심하게 툭 뱉은 말에 샬럿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관심과 주목까지는 그렇다 쳐도, 사람을 이것저것 하는 건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들은 사람이에요.”
“그냥 통틀어서 지칭한 거예요. 너무 예민하시네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제야 샬럿은 조금 전보다는 정신이 돌아온 건지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아뇨. 표현 자체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사람은 자유 의지가 있다는 거죠. 만약 그들이 영애의 것이었고, 영애에게서 떠났다고 느끼신다면…… 그게 어떻게 제 잘못이죠?”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포시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샬럿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영애가 문제 아닌가?”
“……문제?”
“무언가 잘못했다거나, 실망하게 했다거나…… 일단 남 탓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이어지는 내 말에 샬럿은 처음에는 전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말뜻을 인식하자마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굳어졌다. 마치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팩트로 때려서 너무 아팠나.
“제가…… 문제라고요?”
샬럿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고, 나는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제기는 하지.’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어느 정도 샬럿의 자업자득이었다.
만약 그녀가 베르너의 고백을 진작부터 받아 줬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일도 없었을 거다.
샬럿은 분명 황태자비가 되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행복해졌을 테지. 그리고 나는 소설을 임의로 완결 낸 뒤에 누구와도 엮이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물론, 그렇게 됐으면 킬리안과는 조만간 헤어져야 했겠지만.
‘아무튼!’
따지고 보면 개고생은 전부 네가 시켜 놓고서는 이건 무슨 적반하장!
속으로 남몰래 씩씩거리고 있는데, 내 말을 듣고 동요하던 샬럿의 떨림이 불현듯 뚝 하고 멎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독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 그래요.”
“……?”
왠지 눈동자가 까맣게 죽어 있는데 지금 상태 많이 안 좋은 거 아닌가? 사실 별로 그녀의 말을 들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재워 버릴까 생각할 때쯤, 샬럿이 알아서 자리에 누웠다.
‘아니, 이 타이밍에서?’
아무래도 샬럿은 진짜 잠들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황당해하면서도 이제야 좀 얌전해져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샬럿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제게 그런 견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답니다, 메르텐시아 영애.”
누가 누굴 견제했다는 거야.
그건 견제 같은 게 아니라 너무 오냐오냐하다가 내 자식 성격 버린 괴로움에 던진 훈계 쪽에 더 가까웠는데.
“영애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든 전 상관없어요. 결국엔 다 제게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도 그럴 게, 이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단 한 번도요.”
그건 그랬지…….
사실 그렇게 해 준 게 나야. 나는 또 딸자식 잘못 키운 고통을 느끼고 답답함에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제가 뭔가를 잘못했을 리가 없어요. 이건 그러니까, 제게 좀 더 노력해서 쟁취해 보라는 일종의 신의 시련일 뿐이라고요.”
샬럿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가만히 누워 있으니 잠이 몰려오는 것인지, 그녀는 독과 잠기운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깐 제가 잘못 판단했네요. 다리 치료해 주지 마요. 치료해 주기만 해 봐…….”
그녀는 내가 마치 억지로 상처를 치료해 주기라도 할까 봐 몸을 웅크리고 상처 입은 다리를 감싸 쥐며 자신을 보호했다.
“두고 봐요. 다 돌려받을 거야.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까지 전부 뺏을 거예요. 저는 그런 존재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이 말하고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