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악녀 메이커 82화
나는 레녹스를 마저 치료해 주면서 잠든 샬럿을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진정 너까지 나한테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냐?
베르너는 내가 샬럿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 거라고 멋대로 지레짐작을 했다. 그런데 샬럿은 내가 수작을 부려 그녀의 것을 뺏어 간 거라고 단언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천생연분이었다. 이쯤 되면 황태자의 세기말 고백도 재평가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전생에도 후생에도 영원히 함께할 운명의 짝이 아무래도 정말 맞는 것 같아.
내가 판타지 소설을 쓰다 보니 여주까지 가정 교육을 판타지로 받았네. 본의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내 탓도 있으니 3초간 반성하기로 했다. 1, 2, 3. 반성 끝.
‘그리고 사실, 내가 자책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지. 선전 포고까지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나는 그때부터 매우 착잡한 심정으로 고민을 쌓아 가기 시작했고, 그러던 와중에 레녹스가 깨어났다.
나는 샬럿을 목숨 바쳐 지켜 냈는데 낙동강 오리 알보다 못한 신세가 된 그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샬럿은 네가 죽든 말든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같아.
‘가만 보니 얘도 참 호구…….’
나는 무보수로 수도 없이 굴려졌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직장에서 만능 노예 취급을 당하는 정도라면 호구라고 말도 안 했다. 일상에서도 ‘도와줘, 하늘아.’ 하면서 노진구 빙의해서 날 도라에몽 부르듯 호구 잡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난 그들이 내게 실망할까, 내게서 멀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아무런 대가 없이 다 퍼 줬고.
그나마 나는 이쪽 세계로 넘어온 뒤에 운 좋게 킬리안을 만나 어느 정도 호구 탈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레녹스의 주변에는 샬럿 같은 인간들밖에 없지 않나. 그러니까, 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말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는.
그러자 나는 샬럿의 일과는 별개로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최대한 그가 듣고 싶을 법한 말을 해 주었다.
좀 더 쉬라고. 자라고.
사실은 윤하늘이었던 시절에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레녹스는 피로에 지쳐 다시 잠들었다가도 조금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기만 하면 번쩍 눈을 떴다. 나뭇잎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소리, 심지어 동굴 속에 바람이 들어와 휭― 하고 짧게 우는 소리에도.
얼마나 깊게 잠들지 못하는 건지. 그는 결국 한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들지 못해 힘들어 보이는 것치고 그의 눈동자에는 잠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안 쫓아와요.”
마물도 이젠 더는 보이지 않고. 내가 안심하라는 듯 말하자, 그는 잠시 날 응시하더니 시선을 내리깔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깊이 잠들어 본 적 없어.”
그러고 보니,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설정이었지. 거의 한평생을 전장 속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맘 놓고 푹 잠드는 쪽이 더 이상하긴 했다.
‘매일 깊게 잠들지 못한다니…….’
그 한마디가 내 심금을 찡하게 울렸다. 얘는 애가 왜 이렇게 짠한 건지, 샬럿의 물고기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공감이 가서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레녹스는 내가 윤하늘이었던 과거보다 더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을 때만 밤을 새우거나 의자에서 선잠을 잤다. 하지만, ‘매일’ 그러라고 하면 그건 죽으라는 뜻과 다름없지 않나?
‘아니, 잠깐.’
지금 막 떠올랐는데, <백합 아가씨>에서 레녹스는 황태자를 호위하기 위해 매일 밤 베르너의 처소 밖에서 서서 잔다고 썼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그게 왠지 멋있어 보여서…….
미쳤니, 하늘아? 무슨 기사가 나무도 아니고, 적어도 앉아서 꾸벅꾸벅 졸게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창백하게 질려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고문 중에 사람이 잠 못 들게 하는 고문이 있다고 들었는데.”
“뭐?”
레녹스는 내가 한 말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
“레녹스 경은 지금 자각 없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지금 당장 기사 노조를 만드세요.”
“……노조?”
아니지, 황실을 상대로 노조를 만들면 그건 반란 아닌가? 레테 제국이 왕권신수설을 믿고 있는 절대주의 국가이니만큼 아무리 부당하다고 외쳐 봤자 황제가 ‘응, 너 사형.’ 이러면 끝일 것이다.
‘더러운 신분제 사회.’
물론, 메르텐시아 공작의 딸로서 더러운 신분제 사회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어쩐지 더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레녹스를 앞두고서 기사의 인권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 따위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레녹스야, 레녹스야. 서서 자는 레녹스야.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지 절절히 공감 가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제발 부탁이니 누워서 자거라.
“제가 싸우는 거 못 봤어요?”
나는 그가 좀 더 맘 편히 잘 수 있도록 한번 허세를 부려 봤다.
“어떤 마물이 나타나든 간에 다 이겨요.”
내가 사람과 정식으로 대련한다면 아마 몇 초도 못 견디고 나가떨어지겠지만 마물의 한해서는 투명 드래곤이다, 이거야.
그러자 레녹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내 딴엔 진지하게 한 말인데 웃다니, 이 자식. 웃을 일이 아니야.
“그러다 경 진짜로 죽어요.”
나는 지금 본인이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가엾은 자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자 내 단호한 말투에 당황한 것인지 레녹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영애가 강하다고 해도, 내가 편하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몸도 다 회복된 듯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가볍게 어깨를 돌리면서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여기서 그를 완벽하게 회복시킬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몇 시간 전에 아티펙트로 치료를 끝마쳤으니 지금 최상의 컨디션이겠지. 저러니까 살 만해졌다고 안 자고 버티고 있는 거다.
“다 치료해 주지 말걸 그랬네.”
“뭐?”
레녹스는 내 중얼거림에 어이없다는 듯 되물으면서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읽어 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영애가 날 직접 치료해 준 거로군.”
나는 다시 잠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손가락에 끼고 있는 아티펙트 반지를 보여 주어 레녹스의 의문을 단박에 해결해 주었다.
아니, 해결해 준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레녹스는 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내 손과 반지를 번갈아 보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갑자기 다른 문제를 떠올렸는지 급격하게 초조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샬럿도 상처를 입었다.”
음.
“흉터가 생길지도 몰라.”
그 말, 샬럿도 했는데.
다 죽어 가는 레녹스를 살리는 것보다 다리의 흉터를 없애는 게 더 절박해서 울고불고 내 다리에 매달리고 난리였지. 진짜 뭐에 씐 줄 알았다니까.
샬럿은 뭐, 그래. 본인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니 그렇다고 치자. 천사표가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렇지, 심히 이기적인 사람 중에서 저런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마법으로 즉시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송장을 치렀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샬럿의 흉터를 걱정하다니. 생사를 넘나드는 일이 잦은 직업을 가진 만큼 본인의 몸 상태도 잘 자각하고 있었을 텐데.
문득,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났다. 서서 잘 때부터 인간의 범주를 넘는 거 같긴 했지만, 아무래도 레녹스는 나무의 환생인 건가…….
나는 호구의 현신 같은 그를 질린 듯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치료 못해요.”
어차피 아티펙트에 담아 온 치료마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만약 샬럿이 치료해 달라고 계속 내게 애원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레녹스의 상태가 소설보다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삼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그를 살리기 위해 예정과는 다르게 반지에 남은 마법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 치료할 수 있는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가.”
레녹스는 왜 샬럿이 아닌 날 먼저 치료했느냐고 따지고 싶은 표정을 하다가, 그래도 사람이 염치가 있는 모양인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물고기 중 가장 정상…….’
……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뭐래.
“내가 좀 더 조심하지 못한 탓에 샬럿에게 깊은 상처가 생겼다. 지금 바로 치료받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다리에 흉터가 남아 있게 되겠지.”
내가 쓴 캐릭터지만, 눈앞에서 보니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호구력에 질식할 정도였다. 아니, 목숨을 살려 줬는데 상처가 대수인가?
대체 흉터가 뭐길래,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예전에 ‘귀족 영애는 자고로 몸가짐을~’으로 시작하는 책을 떠올렸다. 예법 책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펴들었다가 몇 장 읽고 바로 불쏘시개로 태워 버렸었지.
거기서 그랬다. 활동적인 일은 되도록 지양하고, 자수나 놓으면서 살결을 새하얗고 부드럽게 관리하면서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말라고. 자고로 영애는 그리해야 한단다. 아무래도 여기선 그게 기본 상식인 듯했다.
아마도 내가 흉터 하나 때문에 레녹스가 샬럿을 책임지려고 했던 장면을 쓰는 바람에 생겨난 빻은…… 아니, 잘못된 사고관이겠지.
‘그때는 나도 많이 어렸었고.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 예법을 빙자한 헛소리 책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래요. 흉터 생기면 기분이 좋진 않죠. 내 몸에 멋대로 흉이 새겨지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겠지.”
그러자 레녹스가 몸을 작게 흠칫 떨더니 더더욱 죄책감에 잠겨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흉터가 없었으면 안젤로 영애도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모르시는 건 아니죠, 설마?”
내가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를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가 답했다.
“물론, 샬럿이 살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흉터 때문에 그녀의 미래에 지장이 갈지도 모르고…….”
“무슨 지장요?”
“아무래도 사내들은 흉터를 꺼리니까. 혼사 문제라든가…….”
저 답답한 말을 듣다 보니 베르너도 샬럿을 위해 카지노 호텔의 일을 묻어 버렸던 것이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 황금빛 앞날을 막는 근본적인 원흉 중에서 고정화되어 버린 구세대 여성관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귀족이 노예로 팔려 갈 뻔한 일을 여자라는 이유로 그저 흉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왜 항상 피해자만 필사적으로 숨기고 손가락질 받아야 해? 그런 사고관 때문에 카지노 호텔과 그에 묶인 밤의 거리를 칠 기회도 잃은 거 아니야!
“있잖아요, 레녹스 경.”
나는 답답함에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흉터가 있다고 해서 떠나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요?”
“뭐?”
“경의 말마따나 만약 안젤로 영애의 흉터를 본 뒤 실망하고 예정된 혼사를 물리는 사내가 있다고 칩니다. 그 사내는 애초에 영애의 뭘 보고 접근했던 게 되는 거죠?”
“…….”
내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자, 레녹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동그랗게 커진 캐러멜빛 눈동자가 명백히 당황을 담고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