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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83화 (83/131)

# 83

악녀 메이커 83화

역시 그나마 가장 정상인 물고기답게 곧장 말이 통하는구나. 나는 할 말을 잃은 그에게 재차 물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연인의 작은 흉터마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대체 그건 누구의 잘못일까요?”

정답이 아주 뚜렷하게 보이는 간단한 질문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단언할 수 있다. 똥차야, 그거. 폐차 각이라고.

“하지만…… 사회적인 인식이…….”

레녹스는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 것인지 말끝을 늘이며 얼빠진 대답을 했다. 본인이 그동안 믿어 왔던 것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이유는 알 만했다. 귀족 영애의 흉터는 흉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상보다 내 말이 더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겠지.

뭐, 이곳 카젠 영지의 기사들이 날 보고 레이디라 운운했던 것처럼, 대체로 기사들은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 강요받아 온 신념이 보통 일반인보다 더할 테니 이해는 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알면 되지.’

도무지 말이 안 통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던 비싈과는 달리, 레녹스는 그보단 말귀를 알아들을 것 같으니.

“사회적 인식마저 뛰어넘고 포용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아니면, 경은 아무리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몸 어딘가에 다친 흉터가 있다면 거절할 건가요?”

“……그럴 리가.”

그래. 알면 됐다, 인마.

나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 대답이 없는 레녹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만에 만나는 말이 통하는 정상인이란 말인가. 엑스트라로 갈수록 정상인일 확률이 높다는 거 취소다. 조연 중에서도 정상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딱, 한 명뿐인 것 같긴 하지만.

“진짜 안젤로 영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흉터의 사정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레녹스 경에게 감사를 표할 거예요. 영애를 살려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영애에게는 살아 줘서 고맙다고, 당신과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하늘에 감사하다고 하겠죠.”

내 연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났다는데 그런 반응이 정상이지. 내가 너무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는 건가? 아니, 이게 정상이 아니라면 차라리 비정상이 되는 편이 낫겠다.

“샬럿 영애의 흉터를 ‘흉’으로 본다면, 그 인간 존재 자체가 흉이니 하루빨리 영애의 곁에서 배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는 내 주장을 빠르게 피력한 뒤, 얼이 빠진 레녹스가 뭐라 반박하기 전에 결론을 지어 버렸다.

“그러니까, 안젤로 영애의 생명의 은인이신 경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일이 전혀 아닙니다. 더는 둘리가 되지 말고, 영애에겐 목숨을 구해 줘서 감사하단 인사를 꼭 받아 내시기를 바라요.”

“……둘리?”

“호의를 권리로 받게 두지 말라는 말이에요.”

“…….”

흠, 아직 이 대답까지 받아 내는 건 무리였나.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다했으니까 판단은 그에게 맡기겠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레녹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동굴 한쪽 구석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샬럿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라는 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었고요.”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소 갑작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자 혼란 속에 잠겨 있던 레녹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영애의 흉터는 영지로 돌아가기만 하면 바로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뭐?”

레녹스는 그 사실을 왜 이제야 얘기했느냐는 듯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하, 죄송.’

사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장 연설은 샬럿의 목숨을 구하고도 그녀에게 휘둘려야 하는 레녹스의 인생이 불쌍해서 해 준 조언일 뿐이었다. 샬럿의 다리에 흉터가 생길 거라는 걸 전제로 한 소리는 아니지.

“지금 당장 치료할 수 없다고 했지, 카젠 영지에 있는 내내 치료받지 못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는걸요?”

지금 끼고 있는 아티펙트는 못쓰게 됐지만, 킬리안이 간단한 마법을 쓸 줄 알았다. 레녹스 같은 중상은 치료하기 힘들겠지만, 샬럿의 상처 정도야 뭐, 간단하게 치료할 거다.

그리고 만약 킬리안이 치료 마법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주술로는 분명 가능하겠지. 물론, 주술로 치료를 받았을 때 파생되는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레녹스가 당황하다가, 이내 깨달음을 얻고 농락당한 사람의 얼굴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저렇게 표정이 풍부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는걸. 왠지 한 대 맞을 분위기라 나는 눈꼬리를 곱게 접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로부터 조상님들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랬다.

그런데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레녹스는 뜬금없이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맞먹는 폭탄 발언을 했다.

“역시 그건 신성력이었나?”

“……네?”

역시 그건 신성력이라니. 한 문장에 속하는 모든 어절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또 처음이로군.

갑자기 어디서 무엇 때문에 신성력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지 이번에는 내 쪽에서 의아함을 담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레녹스가 오히려 내 말에 놀라면서 ‘음?’ 하고 당황하더니 자신이 추측한 것을 말해 주었다.

“난 당연히 영애에게 신성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꽤 상당한.”

“대체 왜죠?”

“검을 다뤄 본 솜씨인데, 손은 전혀 아닌 것부터…….”

이어지는 레녹스의 설명은 이랬다.

고위급 신관으로 갈수록 신체에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이 넘쳐 나는 덕에 상처가 알아서 치유된다고 한다. 그들은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웬만하면 지치지 않고, 쉬는 즉시 몸이 최상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되돌아오기도 한다고.

‘뭐야, 딱 나잖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레녹스가 물었다.

“난 당연히 영애가 검술 실력과 함께 고위급 신관에 맞먹는 엄청난 신성력을 숨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 외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여태 계속 의심하고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 사살을 받자, 정신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아니, 이게 진짜 신성력 탓이었다니. 전부터 계속 속으로 품어 왔던 불안감이 현실이 됐잖아……!

“전부 금시초문인데요…….”

“뭐,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니까.”

레녹스는 정작 본인인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놀랍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수긍했다.

“독실한 신도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만한 정보긴 하지. 영애는 주말마다 대신전에서 열리는 의식에도 잘 참석하지 않으니까…… 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잠시 나를 불경한 사람 보듯 응시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영애를 대신전에서 본 기억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은데.”

레테 제국의 신민들은 신앙의 자유 같은 건 영원히 박탈당한 채 평생 유일신 레제르브를 믿어야 한다. 그들에겐 레제르브를 자신의 신으로 모시는 것이 숨 쉬는 일만큼 당연한 일이라, 그러지 않으면 저런 시선을 받게 된다.

‘뭐, 무신론자 처음 보냐.’

신의 존재는 믿기는 하니 무신론자라고 말하기는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신이 있다고 믿어도 조금도 신뢰하지 않으니 오히려 무신론자보다 더 불경한 쪽에 가까울지도.

아무튼, 메르텐시아 저택에서 가깝지도 않은 신전을 의식 때문에 매주 가는 건 굉장히 귀찮고 시간 낭비였다. 그 신이 내게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원흉씩이나 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내 곁에 늘 붙어 다니는 킬리안이 신과 관련된 건 아주 치를 떠는 바람에 당연히 신전의 의식도 생략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그쪽에 관련된 지식이 전혀 없는 것도 그가 신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끔찍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킬리안 눈치가 보여서 따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것도 있고…….’

킬리안은 레제르브가 단 한 번도 인간의 부름에 답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신전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다 신성력 때문이었다는 거지? 갑자기 뜬금없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고 아무리 격동적으로 움직여도 지치지 않고, 상처도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치유되고?

나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태연한 척 물었다.

“신성력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나요? 제게 뭔가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거나.”

“음, 없어.”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단호해.

나는 잠시 동굴 바닥을 짚으며 좌절 금지 포즈를 취하다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프 때부터 한결같이 내 발목을 잡더니. 레제르브 네놈,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리 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신성력일 줄 알았는데 고위급 신관이라니? 이렇게 되면 이젠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어졌다.

‘……킬리안도 알고 있을까?’

눈치 빠른 그가 전혀 모를 거라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상처가 절로 낫는다는 걸 아직 들키지 않았고, 또 내 손을 잡긴 했지만 장갑 위에서 잠시 겹쳐 잡았을 뿐이니까.

킬리안이 알고 있는 건 기껏해야 내 체력과 힘이 일반인을 웃돈다는 정도일 텐데, 그 정도는 킬리안 본인 기준에선 평범한 수준인 것 같고.

‘아직까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그래도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레녹스가 분위기를 잡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그 정도의 신성력을 가지고 신전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군. 영애라면 곧바로 대신관을 알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음, 그런가. 이 기현상의 원인도 확실하게 알 겸 주말에 한 번쯤 의식에 참석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디 한번 상상해 보자.

킬리안에게 ‘저 주말에 신전에 좀 다녀올게요.’ 하는 내 모습을. 그러면 그는 아마도 그림처럼 미소 지으며…….

“…….”

아무래도 킬리안에게는 비밀로 하는 편이 좋겠다.

문제는 어떻게 그를 따돌리느냐는 건데……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그가 내 일에 간섭하지 않고 알아서 빠져 주지 않았는가.

킬리안의 면모 중에서 가장 악마 같은 부분이라고 한다면, 대가를 받은 이상, 그 부분에선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점을 첫 번째로 꼽겠다.

지금도 레녹스를 혼자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그의 손을 잡고 품에 안겨 절벽에서 다이빙한 덕분이었고. 그러니까 결국 정당한 대가만 지급한다면 만사형통이란 뜻이었다.

‘정당한 대가라…….’

평소처럼 킬리안 쪽에서 먼저 제안하는 게 아닌, 내 쪽에서 그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는 걸까. 왠지 웬만한 것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 골머리가 아팠다.

* * *

아침이 밝을 때까지 절대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존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동굴에서 퍼질러 자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돌바닥에서 자느라 배긴 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영애!”

갑자기 웬 남정네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영애! 무사하셨습니까!”

“그렇게 먼저 가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셔서 놀랐잖습니까!”

“사실 걱정도 안 했지만요!”

마지막 누구냐.

그러니까 카젠 기사단들이었다. 나는 잠에 취해 해롱거리다가 잠시 눈을 비볐다. 기껏해야 몇 초였을 뿐이었는데, 다시 눈을 뜨니 옹기종기 내 주변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킬리안만 남았다.

음?

‘해산물들이 모여 인간으로 변하는 매직…….’

무의식중에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킬리안은 내 양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돌바닥에서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그제야 빙긋 입매를 끌어 올렸다.

“원하는 바는 다 이루셨습니까?”

그가 나만 들리도록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대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아, 피곤해. 킬리안이 타 주는 카페인 듬뿍 얼리 모닝 티 마시고 싶어.

“피곤하십니까?”

“응…….”

“그럼 잠시 영지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는 또 뭐야. 내가 피곤해하지 않았으면 영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나?

의아함을 가득 담고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샬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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