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85화 (85/131)

# 85

악녀 메이커 85화

킬리안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더니 여전히 입술로는 완만한 호선을 그린 채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그것참…… 주제넘으시군요.”

“네?”

“계속 되물으시는 것 보니 한 번 말하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좀 더 확실히 말씀드려야겠습니까?”

샬럿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킬리안이 치료해 준다고 직접 나선 이상, 당연히 그렇게 해 줄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킬리안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내심 샬럿과 마찬가지로 놀랐다. 그가 아까부터 그녀의 상처를 지금 당장 빨리 치료해 버리고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색을 엄청나게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짜증이 가득한 미소만 봐도 그랬다. 물론, 옆에서 지켜봐 온 내 눈에만 뚜렷하게 보일 뿐이지 남들에겐 그저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반듯한 미소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치료해 주신다고…….”

“제가 치료해 드린다고 한 건 온전히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가씨께서 고단해하시니까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왜 그쪽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여러분들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신다면…….”

“대체 뭘 믿고 제가 거기까지 해 드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킬리안이 브라움을 상대할 때도 저런 느낌 아니었나? 거슬리면 그냥 치워 버리거나 입 다물게 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꼬박꼬박 상대해 주는 모습이 말이다.

그는 메르텐시아 공작 가문에 속한 집사였다. 게다가 일단 표면적으로는 샬럿과 같은 자작 가문의 영식이고 말이다. 집사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고, 샬럿이 무언가를 원한다고 해서 따를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저렇게까지 삐딱하게 대꾸하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샬럿은 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존재 자체가 킬리안에게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멍하니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잠시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생각해 보니 좀 이상했다.

악녀의 몸에 빙의되고 루프의 영향에 휘말렸을 뿐인 내가 고위급 신관과 맞먹는 신성력을 얻었다. 그렇다면 샬럿에게도 신성력이 넘치도록 흘러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의 사랑을 받는 건 오히려 그녀 쪽이니 말이다.

‘그런데, 다리에 상처가 알아서 치유되지 않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물론, 그렇게 되면 내가 쓴 소설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이미 나라는 존재로 인해 원작 파괴는 충분히 이뤄지고 있었다. 신이라는 작자가 새삼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지.

만약 레제르브가 본의 아니게 악녀인 내게 능력이 생기게 했다면, 샬럿에게도 대항할 만한 힘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레제르브가 진정으로 샬럿을 아끼고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랬듯이, 샬럿이 어딜 가든 모든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신의 사랑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소설 속을 살아갈 뿐이었다.

내게 반발심을 느끼는 것도 내가 그녀가 가진 것들을 빼앗아 갔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그 말은 어찌 보면 내가 멋대로 소설의 내용을 틀어 버렸기 때문인 듯하고.

새삼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내가 지금껏 믿어 온 것들이 과연 진실인가 의문이 생겨났을 때쯤이었다.

킬리안의 칼 같은 거절을 듣고 잠시 굳어 있던 샬럿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말했다.

“전에 나눴던 이야기, 혹시 기억하세요?”

전에 나눴던 이야기?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킬리안 쪽을 돌아봤다가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둘이 안면이 있다고 무도회장에서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자세한 얘기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뭐지?’

샬럿이 깨어난 이후로 모든 사태를 방관하던 나는, 따끔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뭘 하든 딱히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불쾌해졌다. 그리고 속이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쓰리기 시작했다.

“제게 그때 하신 말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치료와 함께 전에 그 건에 대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을 뿐이에요.”

설마가 아니라 확실하다.

그러니까, 지금 킬리안 꼬시냐?

샬럿이 내 것까지 빼앗겠다고 한 선전 포고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금 대놓고 개수작을 부리다니.

나는 대놓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그녀도 나와 시선이 잠시 허공에 부딪혔을 때 의기양양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쯤, 갑자기 이성을 붙잡고 있던 끈이 뚝 하고 끊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방관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샬럿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킬리안을 불렀다.

“세바스티안.”

“……네, 아가씨.”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하얀 장갑 끝을 입술로 살짝 물고 있던 킬리안이 흐드러진 꽃처럼 눈웃음을 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서릿발 같았던 기운이 순식간에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보자, 속에 묵직하게 얹혀 있던 기분이 조금 가시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말했다.

“아무리 날 걱정했다고 한들 좀 무례하구나. 내 집사이면서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나서다니.”

확실히 그가 정말로 내 집사였다면 방금 행동은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가 거침없이 말할 줄은 몰랐는지, 킬리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나른하게 접었다.

“이런,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내 앞으로 다가와 가볍게 경례를 했다.

그런데 정중함을 가장하고 있는 그의 발언이,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기특하다는 칭찬으로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내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어하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가 놓으며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집사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누가 보면 당연히 용서해 마지않으리라는 오만처럼 보입니다마는.

상당히 뻔뻔한 집사를 앞두고, 나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내 불안함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온전히 아가씨에게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아가씨의 허락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그래, 샬럿.

내가 창조했으니 어떻게 보면 부모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동안 너를 너무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널 만들어 놓고 본의 아니게 10년 동안 내버려 두고 말았구나. 네가 판타지로 받은 가정 교육을 내가 사랑의 매로 보듬어 주고자 하는데 어떠냐.

“안젤로 영애의 말이 맞아요. 기사분들은 영애께서 치료를 받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켜 주셨으면 하는군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샬럿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거기에 저까지 포함될 이유는 없죠. 그렇지 않나요?”

나는 샬럿과 같은 여자이기도 했고, 또 치료를 담당할 킬리안의 주인이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샬럿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평정을 유지했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제게만 상처를 보여 주세요. 그럼 괜찮겠죠?”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지만, 털을 세우는 고양이처럼 내게 잔뜩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네? 하지만 영애는 이제 치료를 못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샬럿은 아까 레녹스가 했던 말로 전부 유추한 것인지 내가 낀 아티펙트를 흘낏 응시하며 말했다. 이런 걸 보면 눈치가 없지는 않은데.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제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아니라면 어떻게 마물을 물리칠 수 있었겠어요?”

“……특별한 능력이요?”

말했던가, 내 몸은 전도체와 비슷한 상태라고. 만약 마법이 전기라면 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갈 수 있다는 거지.

그 말인즉, 킬리안이 직접 샬럿의 상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본인의 다리를 외간 남자에게 보이지 않아도 될 테니 거절할 명목이 없어지겠지.

“영애께서 불편해하시니 다 나가 주시겠어요?”

나는 그 말을 하면서 기사들을 다 내쫓아 냈다. 그러자 샬럿은 돌아가는 상황이 불만이었는지 안절부절못하면서 내게 미안한 척 말했다.

“번거로우실 텐데.”

“제 집사에게 상처를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가 낫지 않겠어요?”

“하지만 집사님께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그런 건 개인적으로 나중에 따로 요청하세요. 지금은 상처가 더 중요하잖아요?”

내가 대꾸하자 샬럿은 할 말이 없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괜히 뭐라고 더 말했다간 ‘타인에게 맨다리를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왜 낯선 동성과 낯선 이성의 선택지 중에서 후자를 택하려 하는 거죠? 이상하네요’ 같은 말을 들을 텐데 반박한 말이 없겠지.

“세바스티안, 내 손을 잡은 뒤에 뒤돌아. 영애께서 불편해하실 테니까.”

“명이시라면, 기꺼이.”

킬리안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대로 치유 마법을 쏟아부으면 내 몸을 통해서 샬럿에게 흘러들어 갈 것이다. 마법을 운용하는 방법은 아티펙트와 동일하겠지.

‘물론, 이것도 나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킬리안과 손을 붙잡는 순간 바로 마력의 영향을 받고 불행해지거나 죽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해도 몸에 직접 능력이 통하지 않아 타인에게 마법을 전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는 샬럿에게 말했다.

“상처를 보여 주세요, 영애.”

“…….”

그러자 그녀가 나를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째려보더니 똥 씹은 표정으로 치마를 걷어 올렸다. 나는 그 위에 킬리안이 전해 주는 치료 마법을 퍼부어 단숨에 치료해 버렸다.

“좋아요, 이제 출발해 볼까요?”

나는 속전속결로 치료해 버리고 손을 털고 일어났다.

샬럿의 입장에서는 독에 취해 잠들 땐 절대 내게 상처를 치료해 주지 말라고 했으나, 지금은 자처해서 그녀가 받겠다고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도 샬럿은 거기서 개수작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치료를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그녀는 동굴 벽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죄송해요. 아직도 다리를 원활하게 움직이기는 힘든가 봐요…….”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남자들을 향해 눈을 한껏 치켜뜨며 애처로운 얼굴을 해 보였다.

“저런.”

나는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등을 보인 채 쭈그려 앉아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뭐죠?”

“업히세요.”

“……네?”

등 뒤로 샬럿의 얼빠진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살피니 과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영애께서 걷기 힘드시다면 업어 드려야죠. 당연한 소릴.”

“아니 기사분들이 많으신데 왜 영애가…… 힘드시잖아요. 무거울 텐데요.”

그러자 당황한 건 샬럿뿐만이 아닌지 레녹스까지 다가와 날 말리려고 들었다.

“샬럿은 내가 안고 가겠다.”

“무슨 소리세요? 아무리 호위라도 영애께서 불편해하실지도 모르잖아요.”

타인에게 맨다리를 보이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인데, 하물며 안기는 건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겠어?

레녹스는 날 불안하다는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이내 내게 신성력이 있다는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자가 치유가 가능한 고위급 신성력. 날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의외로 순순하게 물러났다.

끝까지 반항하는 건 샬럿뿐이었다.

“아니에요, 영애! 분명 몇 발자국 가고 지치실 거예요. 제가 얼마나 무거운데…….”

무겁기는 개뿔 키로 보나 체구로 보나 깃털이라는 묘사가 절로 나올 것 같은데.

그때, 갑자기 잠자코 있던 카젠 기사단들이 끼어들었다. 가장 먼저 울컥해서 열변을 토하는 건 내 추종자를 자처하는 브라움이었다.

“안젤로 영애, 메르텐시아 영애를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저도 번쩍 든 괴력의 소유자이신걸요!”

“맞습니다! 체력도 얼마나 괴물 같은데요! 같이 연무장을 뛰어도 끝까지 돌고 도는 게 바로 영애라고요!”

“힘과 체력만큼은 우리보다 더 하다니까요?”

“가끔 영애의 미래가 기대되면서도 한없이 두려워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나를 옹호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은근히 돌려 까는 거냐.

내가 표정을 지운 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사들은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 서로의 등 뒤에 숨었다. 지켜보는 내가 창피해질 정도로 바보 같은 꼴이었다.

“그럼 이제 안심이 되죠?”

“…….”

샬럿은 입술을 꾹 깨물며 기사들과 레녹스, 마지막으로 킬리안을 돌아보았으나 그 누구도 내 의견에 반박하는 자가 없었다.

결국, 선택권을 박탈당한 그녀는 결국 내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아주 초라한 자승자박이로군.

‘하긴, 지금까지 주변에서 다 알아서 몰려들고 손가락만 까딱해도 다 들어줬을 텐데 제대로 수작을 부려 보고 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

아가네, 아가.

나는 내 등에 업혀서 자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게 억울했는지, 색색거리는 숨을 몰아쉬는 샬럿을 보고 속으로 어이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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