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악녀 메이커 86화
샬럿을 업고 동굴에서부터 기사단원들이 말들을 따로 매어 둔 곳까지 향하게 되었다.
원래는 당연히 내 곁에 붙어서 보조를 맞췄어야 할 킬리안은, 내가 등에 업은 샬럿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자, 웃는 얼굴 그대로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잖아. 샬럿에게 불행이 옮아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그녀는 아무리 불행이 몰아쳐도 살아남는 굳센 생명력의 비싈과 달리, 주변에 지켜 줄 사람이 없으면 단박에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두 개의 심장 하이브리드 베르너도 어떻게든 살인 충동을 억누르면서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 왔다. 그런 세기말 감성의 종결자도 참고 견딘 마당에 여기서 샬럿이 죽도록 놔둘 것 같으냐. 내가 어떻게든 두 주인공 연놈을 이어서 이 소설의 완결을 보고야 말겠다.
……라는 건 표면적인 이유고, 사실 킬리안을 향한 샬럿의 개수작을 사전에 차단할 생각이라는 게 좀 더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설마 이것은…….’
‘질’로 시작해서 ‘투’로 끝나는 그런 단어의 감정인 것이냐?
미쳤네, 아주 미쳤다.
아까보다는 살짝 이성이 되돌아온 지금 생각해 보건대, 나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샬럿이 킬리안을 못 먹는 감 찔러보듯 푹푹 찌르며 호시탐탐 어장의 물고기로 들이려고 노린다고 생각하니까 순간 눈이 뒤집혔다.
내가 킬리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건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니, 솔직히 그러는 게 당연했다.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닌 그의 미모를 직시하면, 남녀노소 누구든 얼굴을 붉히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니까. 만약 킬리안이 저 얼굴 그대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어도 난 분명 두근거렸을 테다.
그런데 조각 같은 외모로도 모자라 심지어 행동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이상형에 부합하는 이가 나를 껴안지 못해 안달이었다. 심장이 터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전부터 위험하다, 위험하다, 생각하긴 했어도 그래도 아직 완벽하게 넘어가진 않았다고 믿고, 또 믿었는데. 그런데 질투까지 하면 그거, 빼도 박도 못하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그러자 심장 선생님이 답했다.
응, 너 킬리안 좋아함.
“……!”
내 인생이 종 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신랄한 심장 선생님을, 순간 철렁하고 떨어트릴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심장 선생님을 양손으로 부여잡느라 샬럿을 업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 잊고 말았다. 뒤늦게 깨달았을 땐 내게 업혀 있던 샬럿이 그대로 등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뒤였다.
“꺅!”
“아, 죄송…….”
반사적으로 사과하고 뒤를 돌아보니, 샬럿이 바닥에 엎어져 끙끙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엉덩방아를 찐 모양인데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서 꼬리뼈를 부여잡고 구를 수도 없고 여러모로 괴로운 모양이었다.
“흐윽……!”
그런데 샬럿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바로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영애, 아무리 제가 싫으셔도 그렇지 내던질 것까지는 없잖아요…….”
“음?”
조금의 텀도 없이 곧바로 누명 씌우기 작전으로 넘어가기로 한 건가? 한시도 쉴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의 집념이 조금 존경스러울 뻔했다.
이야, 나도 저건 못할 것 같은데. 대단해. 네 그 열정만은 본받아야겠다. 감명을 받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샬럿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덥석 손을 잡았다.
그녀가 기겁하며 손을 빼려고 한 것 같았지만, 이 가녀린 손으로 신성력과 고된 훈련으로 다져진 내 악력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영애를 싫어하다니,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사랑스러운 영애께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데 이런 오해를 하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군요.”
그 애정이란 바로 부모의 애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10년 전이라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만들어 낸 소설 속 캐릭터들은 다 자식 같은 법이었다.
한때 정말 애지중지하며 어화둥둥 열심히 적어 왔던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 샬럿. 처음 봤을 땐 천사처럼 잘 커 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사실 내면 깊숙이 어둠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무시하기 힘들어진 그런 애정이라고 할까.
샬럿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타인이 망가지든 말든 제 뜻대로 손에 쥐려고 하는 오만과 지독할 정도의 이기주의도 좀 옅어지겠지.
‘그런데 그 상대가 황태자야.’
……괜찮은 거야, 그거?
과연 황태자가 샬럿의 본성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인지 굉장히 의문이었다. 아직 그와 일대일로 대면해 본 적이 없어서 소설 내용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기는 한데.
‘내 기억대로라면 베르너는 10년 전 유행했던 아주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
어쩐지 굉장히 노답의 기운이 느껴졌으나, 어쨌든 그가 샬럿은 끔찍이도 아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둘이 서로 행복하면 아주 완벽한 결말이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감정을 모르는 희대의 사이코패스 폭군도 청순가련 여자 주인공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둘도 없는 순애보로 변한다는 로맨스 소설 속이다, 이거야. 샬럿과 베르너의 글러 먹은 인성 교정에도 사랑은 필수다.
‘오, 사랑, 위대한 마법…….’
부디 베르너와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을 해서 내게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하고 말해 주길 바란다. 완결 좀 나게.
“꼭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그런데 간접적으로 내 진심을 전하자 샬럿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내가 좀 뜬금없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상처다, 이것아. 나는 샬럿이 거부하든 말든 번쩍 일으켜 세우고 기사들이 나무에 매어 둔 내 말에게로 향했다.
내가 없는 하루 동안 그들이 내 말을 잘 데려온 모양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흰둥이가 푸릉, 대며 나를 반겼다. 참고로 흰둥이는 내가 이곳 카젠 영지에 있는 동안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말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다. 하야니까 흰둥이…….
나는 망설임 없이 흰둥이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런데 어디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찌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시선으로 꿰뚫어 버릴 기세였다.
“이젠 하다 하다…….”
뭔가 낮게 읊조리며 이를 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요. 나는 등 뒤로 싸한 한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끽, 끼익 하고 고철에서 날 법한 소리가 났다.
“아가씨.”
“예?”
날 나지막하게 부르는 그의 기세가 막 소환진 위로 소환된 마왕에 버금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쫄아서 대뜸 존댓말로 답하고 말았잖아.
“……오, 예. 음오아예…….”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존댓말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모두가 킬리안의 기세에 놀라느라 내 헛소리를 들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카젠 기사단원들은 폭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아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째 최근 들어 킬리안의 다양한 표정을 자주 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살얼음을 밟기 직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숨을 졸이고 있자니, 예전에 킬리안이 낮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렸다.
―하지만 거짓말이 쌓이는 만큼, 내 인내심이 그만 한계에 닿을 만큼. 뒷감당은 네가 해야 할 거야.
아니, 심장 선생님이 내가 사실 킬리안을 좋아한다고 알려 주자마자 갑자기 이게 무슨 공포 서스펜스야?
나는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펄떡거리며 뛰어 대고 덜덜 떨리는 것이, 이 의미로 뛰는 건지 저 의미로 뛰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지?”
“피곤은 좀 가셨습니까?”
뭔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내 직감이 피곤해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 아니…….”
“흠.”
그러자 킬리안이 본인이 타고 온 아주 윤기가 좔좔 흐르는 잘빠진 흑마를 끌고서 내 옆에 바짝 붙였다. 참고로 저 말은 내가 보자마자 검둥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루, 그 이상은 못 참아.”
하루 뒤에 뭘 할 생각인데?!
이게 정말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흔들 다리 효과인 거야.
불안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모를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킬리안 옆에서 말을 세워 두고 알짱거리던 샬럿이 이번에는 말이 너무 높아 올라갈 수 없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킬리안을 흘끔거릴 때마다 또 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정작 킬리안 본인은 샬럿은 안중에도 없고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며 종말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는데.
‘음,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나는 내 감정과 망한 인생을 차분히 정의 내리며 말을 샬럿의 곁으로 몬 뒤,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 양손으로 붙잡아 번쩍 들어 내 말 위에 태웠다.
“메르텐시아 영애!”
샬럿이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드디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가증의 경계에 서 있는 해맑은 미소의 가면은 깨질 듯 말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대고 영혼 없이 하하, 하고 웃었다.
“저만 믿고 꼭 붙잡으세요, 영애.”
샬럿을 앞에 태우고 말고삐를 꼭 쥐니 한 품에 쏙 들어오는 게 어쩐지 안정감이 있었다. 킬리안으로 공포 체험을 한 직후라 그런 건지 씩씩 몸을 들썩이며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든 게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름 이거 백마 탄 왕자…… 는 아니고, 백마 탄 차기 백작 아니냐. 여자 주인공의 입맛에 아주 안성맞춤!
내가 미동조차 하지 않자, 뻣뻣하게 몸을 경직시키며 끝까지 반항하던 샬럿이 포기해 버린 듯 한풀 꺾인 기세를 보였다. 물론, 샬럿의 집념으로 봤을 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지만.
“황궁으로 돌아가면 해 봐요. 내가 오늘 일, 후회하게 해 줄 거니까.”
그래그래.
샬럿이 2차 선전 포고를 했으나, 나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그대로 흰둥이를 타고 영주 성으로 질주했다.
내가 예고도 없이 출발해 버리자, 뒤에서 기사들과 레녹스 킬리안이 내 뒤를 쫓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쩐지 폭풍전야를 예고하는 등을 찌를 듯한 시선까지도.
* * *
킬리안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덜컥 답해 버리긴 했지만, 일단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아니, 당신은 말로만 듣던 최연소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이름을 떨친 여명의 기사 레녹스 경? 레녹스 경께서 저희 영지를 찾아 주시다니. 오, 완전 산맥을 뒤집어 놓으셨다.”
나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대사와 함께 레녹스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카젠 남작에게 모든 것을 떠맡겨 버렸다. 그리고 대충 빵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릴 만큼 푹 잤는데도 눈꺼풀이 무겁다, 싶을 때쯤이었다. 아득히 멀어진 감각에서 뭔가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걸까.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열심히 뭉개고 있다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누군가 이불 속을 파고든 나를 꺼냈다. 동시에 이마에서 깃털이 닿은 것 같은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으음…….”
살짝 실눈을 뜨니, 창밖은 깜깜해지고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방구석 폐인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일어났을 때 밤이면 아침이 될 때까지 잤었는데. 요즘 킬리안 때문에 착실히 생활하느라 막상 눈을 뜨니 금세 정신이 현실에 내려앉았다.
아니, 어쩌면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잘 잤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리고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감촉이 다시 볼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좋은 밤이야.”
이번에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어서 생생히 봤다. 내 볼에 스스럼없이 입을 맞춘 킬리안이 고개를 들자 그의 은빛 시선이 감겨들었다.
어느새 하루는 훌쩍 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