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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87화 (8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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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87화

나는 그대로 호흡을 멈춘 채 굳어졌다. 킬리안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고 자각한 뒤라 그런지 파급력은 엄청났다.

뭔가 한마디라도 반응을 해야 할 텐데, 가깝게 풍겨 오는 그의 향기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그가 내게 좋은 밤이라고 말했던가? 그 말을 인식하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더욱 강렬해졌다. 물속에 잠겨 듣는 듯한 웅성거림이 대부분이었지만, 딱 한마디가 선명하게 귓가를 찔렀다.

“마물이다!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왔다!”

……뭐?

이름 모를 새소리만 울리던 고즈넉한 산속 작은 영지에서 비명과 절규로 찬 변주곡이 울려 퍼졌다. 마물들은 절대 산맥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불문율이 깨지고 만 것이다.

“마물이 마을에…….”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라, 그 말이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멍한 머리를 붙잡으며 누군가가 외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전례가 없는 일?’

아니지. 전례는 없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내 앞엔 절망적인 비현실을 모두 현실로 끌어 앉힐 수 있는, 조커 카드 그 자체인 주술사가 있었으니까.

“새까만 밤은 대지를 집어삼키고, 미약한 달빛은 많은 걸 관망하고, 처절한 바람은 창을 긁어 대고…….”

서로의 코가 맞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킬리안이 나긋하게 중얼거리며 내게서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자 온몸을 속박하던 강렬한 향기도 조금 옅어진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숨통이 틘 나는, 입술 새로 얕은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창을 등지고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면서 말을 이었다.

“지옥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니로군, 그렇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나는 눈을 한계까지 치켜뜬 채 그대로 굳어졌다. 성벽 너머로 거대한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는 게 뚜렷하게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게 뭐람!”

119! 아니, 치안대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방화범이 아니라 마물인데?!

나는 혼란스러움에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추정되는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반쯤 감긴 눈으로 활활 치솟는 불길을 담고 있었다.

“가엾기도 하지. 마물이 날뛰고 불꽃은 타오르는데도 아무런 힘없는 어린 백성들은 곧 무력하게 당하겠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동정은커녕 오히려 속이 시원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킬리안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어딘지 버석하게 갈증이 이는 눈을 했다.

그는 혀로 입술을 느릿하게 훑더니 목울대를 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자처한 거야, 아일라. 넌 항상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거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집요한 시선으로 날 쫓았다. 내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오는 저 시선은 날 관찰하듯 바라보며 떠보고 있었다.

그가 내 성장을 위해 본인의 방식대로 시험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굉장히 도가 지나쳤다.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내게 피곤하면 하루만 더 시간을 준다고 해서 대체 뭘 할 생각인지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런 거였습니까? 확실히 그가 저지른 짓을 자각하자마자 잠이 확 깼으니 그의 배려는 참으로 쓸데없이 친절했다.

“진심이세요?”

그렇게까지 하루빨리 카젠 영지를 뜨고 싶었던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반인들까지 휘말리게 하다니. 나는 지금까지 본 킬리안의 악마 같은 면모가 전부 양호한 수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래도 영주민들은 무슨 죄?

“태울 거면 영주의 방을 태워요!”

“……그건 괜찮은 건가?”

킬리안이 뭐라고 답한 것 같았는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중에 화를 내든 따지든, 어쨌든 지금은 한시가 급했기에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새가 없었다.

나는 침대 옆에 세워 둔 검을 챙기고 잠옷을 바지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만 급해서 서두르다가 발을 잘못 껴서 쭉 미끄러졌다.

……다리 찢기! 하지만 창피한 짓을 했다고 볼을 붉힐 새도 없었다.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성 밖으로 나가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저런, 조심해야지.”

그런데 킬리안이 헛발질하는 나를 여느 때처럼 붙잡아 주면서 말했다. 이 순간마저 그는 지나치게 친절해서, 성벽 너머로 보았던 불꽃과 영주민들의 공포 어린 외침이 꿈인지 잠시 헷갈렸다.

킬리안에게 반했다든가 빠졌다든가 하는 일은 이미 뒷전이었다. 너무 놀라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머리가 싸늘하게 식고 이성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아니, 오히려 이성이 날아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배신감이 짙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멱살을 잡는 것처럼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단정한 옷차림이 내 무자비한 손길 아래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화를 내지?”

킬리안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화가 안 나겠어요?!”

“이 무대의 배역들은 다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 이제 네가 가서 구원자가 되면 되는 일 아닌가?”

기가 막혀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구원자? 내가 아무리 짜고 치는 영웅놀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었다.

“착하지?”

킬리안은 내 붉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가져가 그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널 악녀로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 이 정도 희생에 일희일비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어.”

“……뭐라고요?”

모든 도덕과 양심을 가져다 버린 채 생각해 보면 킬리안의 방식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가장 적절했다. 모든 이야기에는 절정이 필요한 법이었다. 자극이 없는 스토리에 독자들은 금세 흥미를 잃는다.

하지만 마을까지 내려온 마물들을 일망타진한다? 이건 이야기가 된다. 음유 시인의 입소문을 타고 영웅담처럼 퍼지게 될지도 몰랐다. 운이 좋으면 이번 일로 내 모든 오명을 단번에 씻어 내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당장 마물들을 다시 산맥으로 돌려보내요.”

“이미 내 마력에 홀린 마물을 되돌려 보낼 수는 없어.”

“킬리안!”

“모순적인 것도 귀엽긴 하다만.”

“…….”

그가 붉은 입술을 곱게 휘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여전히 내게 멱살을 잡힌 채 내 한쪽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끝까지 외면한 부분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온 그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속삭였다.

“나 때문에 이곳 영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아니,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산맥을 두르고 있는 영지 어느 곳이든 마물로 인한 무의미한 피해가 일어났을 거다.”

“하지만, 마물은 숲에만 있고…….”

“숲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건 아니지. 식량을 찾지 못해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멋모르고 산맥을 타던 어린아이가 마물에 당하게 될지 누가 알지?”

“…….”

네가 진정으로 그들의 목숨을 걱정했다면 나를 아예 이 제국 밖으로 쫓아냈어야지, 하고 킬리안이 말했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가 지적한 내 이기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시선으로 자책하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다스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말에 동요하고 무너지기에는 많은 길을 지나왔고, 앞으로도 갈 길이 많았다.

“우선순위요.”

킬리안의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그러자 그의 은회색 눈동자 너머로 아일라의 얼굴, 단단한 내 표정이 오롯이 담겼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소유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일, 이득 볼 일, 즐겁게 하는 일…….”

“…….”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무덤덤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이성이 제동을 걸고 킬리안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그냥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입술을 달싹이며 거친 숨만 헐떡이다가 겨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한마디를 뱉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떠나보내요?”

킬리안의 멱살을 거침없이 붙잡던 패기는 다 어딜 갔는지. 나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우물쭈물하다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되새기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이대로 증발하고 싶어졌다.

‘심한 말! 심한 말!!’

아니, 너는 이 타이밍에서 고백이 나오는 거냐?

고백이라고 하기엔 모호하긴 하지만, 눈치 빠른 킬리안이라면 단박에 알아듣고도 남을 것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 그가 거의 모든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아주 절절하게 알아챘겠지.

그의 말대로 참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계속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같은 방식을 밀어붙인다면 나도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애초에 날 이렇게 변하도록 가르쳐 준 건 킬리안 아니었어? 그래 놓고 이제 와 날 나무라다니,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걸 포기하고 잠옷 차림 그대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때, 킬리안이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런 말을 하고 어딜 가?”

짐승의 위협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여유를 잃은 그의 표정은 굳은 채 명백하게 욕정만을 담고 있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산란하는 사납고 맹렬한 은빛이 언뜻 시야에 담겼을 때, 커다란 손이 급하게 내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내가 언제까지 널 인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

“화가 나다가도 이러는 게 마냥 귀여운 걸 보니 나도 영 글러 먹었군.”

그가 물었다.

“날 망친 값, 지금부터 받아 갈 생각인데 허락해 줄 텐가?”

킬리안이 그 말을 뱉은 동시에 열기 어린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조금의 예고도 없었던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지만 동시에 가슴이 술렁였다. 그가 말한 값이라는 게 내가 현재 원하는 것과 가장 가까우리라 직감적으로 느꼈던 탓이었다.

‘이거 키스할 각…….’

갑자기 어째서?

내가 마냥 귀여워 보인다고 콩깍지 선언을 하는 건 사실 그도 나를 좋아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나에 대한 호기심인가? 아니면 단순히 곁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다 보니 더한 것도 하고 싶어진 것뿐인가?

수만 가지의 번뇌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가장 먼저 뇌리에 박힌 생각은…….

잠깐, 나 방금 자고 일어났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나는 내 설레발에 지레 놀라 소리를 질렀다.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에 더 가까웠다.

지금 밖의 상황은 성벽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적어도 아비규환이 예상되는데 킬리안한테 정신을 뺏겨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 많은 마물들을 처리하려면 핵이 뭔지를 아셔야 할 텐데, 우리 아가씨께서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협박입니까?”

“상냥한 제안.”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음에도 내 입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도리 저었으리라 여겼던 고개가 주인의 의사를 배반하고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킬리안은 언제 정색했느냐는 듯 예쁘게 웃으며 채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읏…….”

입술이 닿기가 무섭게 그대로 집어 삼켜졌다.

부드러움이나 상냥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입술 사이를 가르고 안쪽을 찔러 왔다. 치열을 거칠게 훑으며 멋대로 유영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놓쳤던 그의 옷자락을 꾸깃꾸깃하게 주름이 질 정도로 다시금 꽉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혀를 물어뜯자 비린 혈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타액과 섞인 피를 질척하게 마주 비비며 휘어 감았다.

“흐으…… 그만…….”

빈틈없이 맞붙은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채 완성되지 못한 단어를 뱉었지만, 집요하게 쫓아온 그의 입술이 다시 날 덮쳤다.

그의 타액이 넘어갈 때마다 마비되는 독을 삼킨 것처럼 온몸이 저릿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힘까지 풀렸다.

킬리안은 무릎이 꺾여 휘청거리는 내 허벅지를 붙잡고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여전히 빈틈없이 맞붙은 입술을 피해 고개를 틀어 봤자 더욱 깊숙이 안쪽을 파고들 뿐이었다.

그가 벽에 날 밀어붙이자 쿵! 하고 뒷머리와 등이 제법 세게 부딪혔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더욱 은밀한 곳을 향해 가고, 뱀처럼 뿌리까지 꽉 죄며 집어삼키던 혀는 안쪽을 깊게 찔러 왔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치르겠다 싶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숨을 헐떡이며 킬리안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거의 뜯어내다시피 머리채를 뒤로 당겼다.

“하아…….”

고개가 강제로 바짝 젖혀진 그가 나른한 숨결을 뱉어 냈다.

그리고 반쯤 몽롱하게 흐려진 지독히도 야한 눈빛을 하며 늘어진 은사를 혀로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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