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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88화 (88/131)

# 88

악녀 메이커 88화

“허억, 아니…… 이게 무슨…….”

내리 질주라도 한 것처럼 거친 숨이 입술 새로 흩어졌다.

나는 숨을 고르는 게 힘겨워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말을 꺼냈다.

“일단 좀…… 떨어져 주실래요?”

이 맥락 없는 입맞춤에 당황스러운 건 둘째 치고 이게 키스인지 짐승의 영역 표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에서도 날 능수능란하게 대하던 그가 여유를 완전히 잃은 모습이 두렵기까지 했다.

만약 키스하게 되더라도 깔끔하고 부드럽게 끝낼 줄 알았다. 킬리안이라면 내가 놀라지 않도록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서 결국 빠져나갈 수 없을 때까지 서서히 사로잡는 쪽이 훨씬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깔끔하고 부드럽긴커녕 질척하고 거칠어서 나도 모르게 머리채를 붙잡고 쥐어뜯고 마는 키스라니, 이딴 게 그와의 첫 키스라니……!

“누가 키스를 이렇게 해요?”

잡아먹히는 줄 알았잖아요!

나는 뒷말을 꿀꺽 삼키며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놓아주면 다시 달려들어 내 입술을 집어삼킬 것 같아서…… 아니, 지금 그가 너무 야해서 정신이 나가 버린 내가 먼저 덮칠 가능성도 없진 않은데…….

“그럼, 어떻게 하는 거지?”

“…….”

“나는 잘 모르겠는데.”

“…….”

“네가 제대로 가르쳐 줘.”

이 인간이 어디서 개수작을, 하고 생각한 순간 그가 천천히 물기에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이니까.”

……처음?

내가 아는 그 처음을 말하는 건가? 시간상이나 순서상으로 맨 앞을 뜻하는 그 처음?

‘키스가 처음이라고?’

물론, 킬리안이 처한 상황으로 봤을 때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그의 마력은 웬만한 주술사들보다 훨씬 넘쳐 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은 살짝 닿기만 해도 죽거나 불행해진다고 했지. 애초에 다가가지조차 못하는 존재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같은 주술사끼리의 연애 경험은 많을 줄 알았다. 그의 어딘지 모를 능숙함은, 도저히 이성을 처음 가까이해 본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게 어딜 봐서 처음 키스하는 남자의 저력이란 말인가? 과거에 경험이 몇 번 있는 나도 완전히 얼이 빠질 정도였는데, 자기가 무슨 천연 에로남이야?

하긴, 과하게 열기를 품은 저 눈과 욕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마치 이성에 처음 눈뜬 십 대 소년 같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그전까지 아무런 징조 없이 담백했기 때문에 괴리감이 엄청났다.

‘……아니지.’

예전에 킬리안이 나를 ‘왜?’ 하고 수도 없이 되묻는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봤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럴 리 없다고 외면하고 지나쳤을 뿐, ‘뭔가 이상한데?’ 싶었던 순간이 많았다.

‘징조가 없었던 건 아닐지도…….’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란 말인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 버린 탓에 그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로 결 좋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져 차분히 제자리를 찾았다.

등 뒤는 벽이고, 내 다리 사이에 킬리안의 허리가 바짝 붙어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내 입술을 지분거리더니 그대로 내려와 턱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여린 살에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핥고 머금는다.

“……!”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교성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쾌락에 휩쓸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지만, 적어도 킬리안보다는 이성이 건재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고개를 억지로 떼어 낸 뒤 붉게 물든 입술을 손바닥으로 턱, 하고 막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망설임 없이 핥았다.

으앙, 패왕 색기!

나는 천연 에로남 때문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고 뱁새눈을 뜨며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그래서, 핵이 뭔데요?”

“…….”

그가 흥분 때문인지 살짝 붉어진 눈가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뭐, 방금 어처구니없이 홀랑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이제 안 속는다. 그렇게 쳐다봐도 아무것도 안 나와요.

킬리안은 내게 수많은 마물의 종류와 생김새, 특징까지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지만, 핵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핵은 장소, 시기에 따라 각각 다르며 특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킬리안이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지금의 협박에 추진력을 얻으려고 일부러 숨긴 것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저번에 내가 기사들과 같이 토벌에 어울려 다니니까 ‘핵부터 처분할걸 그랬습니다.’ 같은 말도 했었잖아. 그러니까 결국 핵이 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 아니야? 아주 제대로 낚였다. 내가 눈치 없는 바보인 탓도 있었지만.

상념에 잠긴 채 이를 갈고 있을 때, 킬리안이 혼탁하게 흐려진 눈빛을 내게 정확하게 맞추면서 말했다.

“네 우선순위를 너무 홀대하는 것 같은데.”

윽,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정작 본인은 마음을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았으면서 내 고백 아닌 고백은 아주 알차게 이용하고 있네.

나는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우선순위 가장 첫 번째는 저 자신이거든요?”

“그건 맞는 소리군.”

그는 키득거리며 흔쾌히 입을 열었다.

“핵은…….”

핵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핵이 뭔지 듣지 못한다면 지금 달려나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가 마물에게 해를 입지 않는다는 건, 나 자신만 무사할 뿐이라는 뜻 아닌가. 아무리 탱커를 자처한다고 해도 떼로 몰려오면 무리였다.

“카피 퍼펫.”

그런데, 이어지는 킬리안의 말을 들어 보니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카피 퍼펫이라면 형체 없는 유령 타입이잖아. 그림자에 숨어들어 있다가 공격하는 마물이라 처리하려면 성가시다 했다. 게다가 그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굉장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을지…….

킬리안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물 1순위라고 내심 생각했었는데 하필 핵이라니,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해 봐야겠네요.”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애써 각오를 다졌음에도 꿈쩍도 할 수 없는 건 여전했다. 킬리안이 날 붙든 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도 보고, 위아래로 들썩여도 보다가 그의 볼을 꾹 잡아 누르며 말했다.

“진짜 가야 하거든요?”

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빙그레 미소 지은 채 눈만 깜빡였다. 이런 찌그러진 찐빵 같은 꼴을 하고도 잘생겼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한 박자 늦게 말을 꺼냈다.

“주인공은 극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편이 좋아. 지금은 너무 이른 것 같군.”

“아직도 그런 소리를……!”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게끔 마물의 위치를 조절하고 있어. 성벽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마물은 마을로 침입하지도 않았고 성벽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지.”

뭐라?

“……저 불은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그런 직관적이면서도 무슨 뜻인지 영 알아들을 수 없는 작명은 대체로 주술이었다. 그게 과연 어떤 주술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눈을 부릅뜨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저건 사람을 태우는 불이 아니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의 크기에 따라 몸집을 불리는 불꽃이지.”

아, 그래요? 화력을 보아하니 이 주변에 마력 한번 엄청나게 몰려 있는 모양이군요. 그야 그렇겠죠. 다른 누구도 아닌 킬리안이 여기에 있는데. 나는 뒷골이 뻐근해져서 잠시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니까, 사기를 치셨다?”

나는 낚시왕 강태공을 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마물을 불러 모은 건 당초 계획대로 샬럿과 레녹스를 만나 이 영지에 더 이상 용건이 없으니 빨리 처리하고 뜨기 위해서라는 건 알겠다.

그런데 왜 나한테 영주민들의 목숨이 위험한 것처럼 속인 거야? 그리고 본인이 지금까지 주장했던 말과 상반되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도 전부…….

‘그가 내 우선순위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입 밖으로 내뱉었으니 속전속결로 키스한 거야?

“많이 참고 있다고 했었지. 그런데 내가 네게 미움을 살 만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이미 하셨는데요. 협박까지 하고 멋대로 키스…….”

말하고 보니 멋대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협박에 가깝긴 했지만 분명 허락을 구했고, 나는 한 번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래서, 정말 싫었어?”

싫었으면 애초에 고개를 끄덕였을 리가 없잖아. 영주민들이 진짜 위험한 줄 알고, 그럼에도 욕망에 충실한 나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그가 싫은 게 아니라 날 속인 게 화가 난 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가 난 것조차 아닌 듯했다. 나만 고스란히 속마음을 드러낸 게 억울하고 불안했다. 초조해졌다.

“……왜 저한테 입 맞춘 건데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의 감정도 토해 내라고 말했다. 그의 진심을 듣는 것은 언제나 두려웠지만, 외면하고 도망치다가 이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용기를 냈다.

만약 정말 능력이 통하지 않는 인간은 나뿐이라서, 인간의 온기를 원해서였을 뿐이라면 그와 언젠가 멀어질 각오를 해야겠지. 그가 날 버리고 외면하더라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도록 단단해져야겠지.

그러자 그는 짙게 잠긴 은회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도망가지 않을 자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키스했기에 갑자기 도망 얘기가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순식간에 납득하고 말았다.

“모든 비밀을 토해 낼 각오는 되어 있고?”

내 비밀이라는 게, 훗날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생각할 정도의 비밀이라는 걸 킬리안은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아니면 그 언젠가?

“……아뇨.”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금은 충동 정도로 해 두지.”

“충동?”

“그래, 충동.”

충동이라니. 순간적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자극에 휘둘리는 철부지에게나 어울릴 법한 단어였다. 하지만 비밀이라는 말에 덜컥 내려앉았던 심장을 다시 잠잠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단어이기도 했다.

킬리안은 그렇게 결론을 지은 뒤, 내 입술을 훔치고서 허락을 구하듯 입술 사이를 가볍게 훑었다. 아까 멋대로 파고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점잖은 신사처럼 굴어 봤자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신사와 짐승을 넘나들다니, 태세 전환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급이네.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그가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어쩌면 그 말이 계속 울렁거리던 마음에 불을 지핀 도화선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길에 휩싸인 영지 밖을 내다보다가, 공포에 떠는 영주민들을 생각하다가, 결국 시야에 가득 들어찬 킬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그를 만난 이후로 내가 이성적인 순간이 있었던가? 날 하루하루 성장하게 하고, 멋모르는 철부지로 만들기도 하는…….

“이리 와 봐요.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나는 한숨을 뱉으며 그의 목에 느릿하게 팔을 둘렀다. 덧붙여 작게 심술을 부린 건 찰나의 변덕이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 진짜 키스 못 해요.”

그러자 입술을 잠시 떼어 낸 그가 귓가에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번엔 네가 가르쳐 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받아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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