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악녀 메이커 89화
“마물이다!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왔다!”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으윽…….”
레녹스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이 불쾌한 감각이 뭔가 낯설지가 않았다. 불과 이틀 전에도 직접 경험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잠시 지나치게 뻐근한 뒷목을 문지르다가 현실 감각이 내려앉자마자 경악했다.
‘잠깐, 내가 또 기절했다고?’
제국 최고의 기사씩이나 돼서 연속으로 내리 기절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틀 전은 악재가 겹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이번에는 대체 뭐였지? 그는 짧은 찰나 동안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밤이었으니 길어야 한두 시간 전의 일일 것이다.
돌연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갑자기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강한 충격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누가 계획적으로 접근해 그를 기절시킨 것이다.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어떻게?
이 영지에 그만한 실력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름 다시 보게 된 메르텐시아 영애도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나 놀랐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다.
자만이 아니었다. 어디 제국 최고라는 명성이 거저 붙었겠는가. 그 누가 되었든 제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접근했다고 해도 바로 알아차리고 반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레녹스 본인이 방심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
그는 낮은 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뒤늦게 성벽 밖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놀라, 바닥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방금 언뜻 들었던 외침을 다시금 상기했다. 마물이 마을로 내려왔다고 했던가?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 레녹스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때마침 우당탕거리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뛰어 올라가던 비싈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외쳤다.
“레녹스 경!”
레녹스는 비싈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던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물이 마을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그러자 비싈이 기다렸다는 듯 불안과 흥분을 담아 외쳤다.
“저도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젠장, 첫째 도련님의 말씀이 맞았다고요! 대단한 선견지명, 뛰어난 통찰력! 역시 우리 도련님!”
“…….”
비싈은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도련님을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동공이 살짝 풀어진 것 같기도 하고.
레녹스는 어딘지 맛이 간 것처럼 보이는 팔불출을 향해 잠시 짜게 식은 눈빛을 하다가 그의 등 뒤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금고를 든 채 부산스럽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카젠 남작과 그의 아들들이 보였다. 기사단장이 말한 첫째 아들은 이미 기사들과 합류한 건가?
만약 뜬금없이 기절하지만 않았더라도 레녹스 또한 선두에 서서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을 기절시킨 정체 모를 이를 향해 이를 갈다가 지금이라도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며 물었다.
“늦게 나와서 미안하군.”
그러자, 이성을 되찾은 비싈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뇨, 여명의 기사라도 그 절벽에서 떨어지셨는데 아무리 마법으로 회복하셨다고 한들 한동안 쉬셔야 하는 게 맞죠. 저희야말로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싈은 쩔쩔매며 레녹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의 표정을 했다. 그는 ‘레녹스 경이라면 기적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막막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거야’ 하는 막연한 희망을 담아 레녹스를 우러러보았다.
신앙보다 더 굳건해 보이는 기대와 믿음은, 여명의 기사에게 있어서 숨 쉬듯이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쯤 혼탁하게 풀려 있는 비싈의 눈빛은 굉장히 낯설었다.
‘술이나 약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레녹스는 그런 그를 탐탁지 않게 보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기척으로 보아 마물의 수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밖의 상황이 어떻지?”
“최악입니다. 산맥에 있는 마물들이 전부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수가 늘고 있어요.”
“피해는?”
“아직 없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얼쩡거릴 뿐 습격의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마물의 특성으로 보아 아마도 우리의 전력을 가늠해 보고 있는 걸 겁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죠.”
“그럼 저 불은 뭐지?”
“환영이나 그런 종류의 마력 덩어리로 추정됩니다.”
그 말에 레녹스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을이 불에 휩싸였다고 다급하게 생각했을 때는 간과하고 지나쳤지만 지금 보니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다. 저렇게 타오르는데 열기가 조금도 느껴지지도, 않고 또 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마치 부러 위협하고 겁을 주기 위한 불꽃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럼, 마물의 소행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죠. 아니면 저 불 자체가 마물일 수도 있고요. 일단 저 불도 현재로선 영지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무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추정됩니다.”
“환영을 쓸 줄 아는 마물이거나, 환영 그 자체인 마물이라……. 골치 아프군.”
밖의 상황이 충분히 예상됐다.
아비규환이겠지. 비싈의 말마따나 마물이나 불이 실질적인 피해는 주지 않았더라도, 지레 겁을 먹은 영주민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바쁘거나 혹은 서로 방해된다며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것이다.
단합하지 못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 정황을 추측해 봤을 때 마물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지금으로선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카젠 남작을 대신해서 그의 첫째 아들이 어떻게든 잘 수습해 주었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 제2기사단 단원 중 전력이 될 만한 이들이 남아 있나?”
“다들 부상이 깊습니다.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저도 어떨지는…….”
“늦었지만 메르텐시아 가문의 집사에게 치료를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세바스티안이라고 했던가?”
레녹스는 조각인지 인간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던 집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직접 실력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샬럿의 상처를 선뜻 치료해 주겠다고 나섰을 때의 당당함으로 봤을 때 적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글쎄요.”
그런데 비싈이 굉장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메르텐시아 영애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모든 게 안중에도 없는 작자라, 영애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꿈쩍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비롭다거나 이타적인 인물도 아닌지라…….”
그러고 보니 치료해 준다고 선뜻 나섰을 때도 메르텐시아 영애가 피곤해 하는데 하나같이 정신이 사납게 군다는 이유 때문이었던가.
자신에게 별 이득도 없는 일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는 주인과는 전혀 다른 성향인 모양이었다.
‘제 주인만 끔찍이 챙기는 모양이군.’
레녹스는 잠시 눈 사이를 좁혔다.
그 집사를 본 순간, 첫눈에 평범한 자는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근처에 있으면 섬뜩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집사와 대면한 이후로 찰나일 뿐이었지만 검날이 목에 바짝 들이밀어진 듯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 두 번 있었다. 그 집사가 샬럿을 치료해 주겠다 나섰을 때와 정신을 잃기 직전…….
“레녹스 경!”
그때였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1층 홀을 서성이고 있던 샬럿이 레녹스를 발견하고 외쳤다.
그리고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계단 위를 뛰어온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 듯이 안겼다.
“흑, 너무 두려웠어요…….”
아마 밖에 있는 영주민들이 더 두렵지 않을까. 레녹스는 안겨 오는 샬럿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가 이럴 때가 아니었기에 슬쩍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더욱 파들파들하며 애처롭게 떨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레녹스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샬럿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이다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당장은 제2기사단의 전력이 무용지물이라는 판단을 내리자, 급한 대로 떠오르는 얼굴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메르텐시아 영애는?”
그러자 샬럿의 몸이 돌연 바짝 굳었다가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레녹스는 그런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잠시 찝찝한 기색을 내비쳤다. 메르텐시아 영애가 구하러 온 이후,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샬럿에게서 느꼈던 생생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기에 그보다 먼저 비싈에게 답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는 멍하게 풀린 눈동자를 깜빡이며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메르텐시아 영애요? 음, 영애는 곧 오실걸요?”
“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는 레녹스 경을 모시고 기사들을 함께 밖에 나가야 합니다.”
“성을 나가야 한다고? 왜?”
“왜냐하면…… 그래야 하니까요?”
아무래도 비싈은 심히 맛이 간 듯 보였다. 레녹스는 그의 대답이 워낙 황당했던지라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이 메르텐시아 영애가 산맥의 마물 대부분을 토벌해 주었다 하지 않았나? 언젠가 이 카젠 영지를 구원해 줄 거라고…….”
“물론, 그렇습니다. 영애께서는 저희의 희망이시죠. 그런데 지금은 일단 저희와 함께 나가 계시죠. 왠지 지금 메르텐시아 영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기운이 옵니다.”
“……제정신이 아니로군.”
약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다. 아니면 성 밖에 나서기도 전에 벌써 마물의 공격에 당하기라도 한 건가?
레녹스는 비싈의 눈앞에 대고 잠시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비싈이 반 박자 늦게 반응하며 대체 뭐 하느냐는 시선을 던졌다.
이성은 건재한데 반응은 늦고, 또 세뇌당한 사람 특유의 반응을 보인다. 제정신이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 힘든 묘한 상태였다.
‘뭐지?’
그때, 레녹스의 품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샬럿이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잖아요. 아무리 메르텐시아 영애께서 강인하시다고 해도 제국 최고의 기사만 하겠나요. 일단 마물부터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영주민 한 명이라도 큰 해를 입을까 봐 저는 너무 걱정스러워요.”
“…….”
품속에 끌어안긴 채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로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품에 가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절벽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 걱정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레녹스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샬럿을 제 품에서 떼어 냈다.
“네? 당연하잖아요.”
“그대의 걱정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걱정과 많이 다른 듯하군.”
그리고 당황한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사이에 곧바로 아일라가 묵고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제자리에 못이 박인 듯 가만히 서 있던 샬럿이 뒤늦게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레녹스는 그런 그녀가 조금, 성가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방문을 똑똑 노크하면서 물었다.
“메르텐시아 영애.”
그런데 방 내부가 지나치게 잠잠했다.
아니,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벌써 성을 빠져나가 기사들과 합류한 건가? 그렇다면 성벽 위로 올라가 성 밖 상황을 살피고 온 비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의아한 얼굴을 하던 레녹스는 예의가 아님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지금만큼은 긴급 상황이니까 영애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방문 안에 또 방문이 있었다.
“……?”
이쪽 손님방은 이런 구조였던가?
레녹스는 하는 수 없이 안쪽의 방문 앞으로 가 그 문도 열었다. 그랬더니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