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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90화 (90/131)

# 90

악녀 메이커 90화

“……??”

레녹스는 또 눈앞의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이 있었다.

정신 나간 괴짜가 아니고서야 손님방을 이딴 식으로 지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 안에 방문 안까지 열어젖힌 레녹스는 이 의미 없는 짓을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뒤돌아 닫혀 있던 반대쪽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2층 복도가 펼쳐졌다. 방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샬럿 또한 말이다. 그렇게 많은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 이라기엔 마나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오히려 방 안에서는 마나와 상반되는 마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불쾌한 감각은 산맥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계속 숨이 막힐 정도로 공기 중에 짙게 퍼져 있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영지는 산맥으로, 산맥은 마물로, 마물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주술일 리는 없고.’

뜬금없이 주술이라니, 차라리 마물의 소행이라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레녹스는 이상한 세계에 똑 떨어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방문을 닫았다. 어째 영지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 악마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듯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젠의 모든 영주민이 그가 마물을 물리쳐 주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역시, 메르텐시아 영애는 없죠?”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샬럿이 활짝 핀 얼굴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있어. 밖은 위험하니까.”

“저도 따라가면 안 되나요?”

“……어째서지?”

레녹스는 진심으로 궁금하여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러자 샬럿이 잠시 멈칫하며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당연히 그녀를 마지못해 데려가거나, 뜯어말리며 염려하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태어나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쌓고, 판단하기 마련이었다.

샬럿 또한 그랬다.

“네가 가면 뭘 할 수 있지?”

하지만 이건, 그녀의 경험에 없는 반응이었다.

“…….”

그러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나는 정말 그대가 이해 가지 않는군.”

그러고 보면 샬럿은 항상 그랬다.

가만히 있는데 시비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왜 사서 위험을 자초하는 건가. 호위를 동행하든가, 지금처럼 생사가 넘나드는 일엔 알아서 빠지든가. 그녀는 충분히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일조차 무시하고 겁 없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설마 지금 상황마저 자처해서 간다고 할 줄은 몰랐다.

산맥의 마물들이 전부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이 일의 심각성을 진정 모르는 건가? 마물을 두 번이나 겪어 놓고? 불과 이틀 전에 그 마물에게 죽을 뻔했던 기억은 어디로 날려 버린 건가?

“아니면, 이 일이 그대에겐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지는 건가?”

“저는 다들 너무 걱정돼서…….”

“샬럿, 걱정된다면 여기에 가만히 있도록 해. 그대가 다쳤을 때 내가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런 말을…….”

하, 이런 말까지 꺼낼 필요는 없지.

레녹스는 자신이 지금 살짝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작게 심호흡을 냈다.

그녀는 단지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그는 이번에는 조금 진정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때 메르텐시아 영애가 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죽었어.”

“…….”

“생색내고 싶진 않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그대는 죽었지.”

“……물론,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샬럿, 감사 인사를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럼에도 느끼는 게 없나?”

“…….”

샬럿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문제의 답을 모르는 아이가 어른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나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 아이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딘지 필사적으로까지 보이는 샬럿의 모습에 레녹스는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체 그동안은 왜 미처 인식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모순적이었다.

싸우는 게 싫고, 누가 다치는 게 싫다고 하면서 정작 불량배를 해치울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쉽게 동정하고 가엽게 여기면서도, 정작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나, 더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그녀 자신의 것이기를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면모가 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타고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물이기에 신관도, 기사도, 마법사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샬럿도 그냥 인간일 뿐이었다.

그것을 레녹스는 이제야 제대로 인식했다. 물론, 그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천사나 성녀라고 멋대로 상상해서 그녀에게 환상을 덧씌운 건 본인이었으니까. 멋대로 기대했으니 멋대로 실망할 수밖에.

“내가 네 진짜 얼굴을 알고는 있는 건지 모르겠어.”

“…….”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레녹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군. 내 잘못이야.”

그리고 짧게 사과한 뒤, 다급하게 제 옷소매를 움켜쥐는 샬럿의 손길을 뿌리치듯 놓았다.

빠르게 성문으로 향하는 레녹스의 등 뒤를 비싈이 쫓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아마 현재 카젠 영지의 상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보고를 하는 듯했다.

그런 두 기사의 뒷모습을, 샬럿은 손 놓은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내, 진짜 얼굴?’

샬럿은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자꾸 정신이 멍하게 흐려졌다. 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게 왜 중요해? 그들이 바란 건 천사같이 착하고, 성녀처럼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샬럿은 본능적으로 기민하게 알아차렸을 뿐이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이용했을 뿐이었다.

사랑 받았기에, 사랑 받는 방법을 알아서 바라는 대로 그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내 진짜 얼굴 같은 걸 찾아? 애초에 진짜 얼굴이라는 게 뭔데?

나약하며 눈물 많고, 가녀리고 상냥하며,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하나부터 열까지 곁에서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자신의 모습.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 모습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여 줬다.

그것을 사랑스럽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렇게 아일라 메르텐시아가 대단해?’

그래, 대단하긴 했다.

무도회장에서 마주친 순간, 첫눈에 아일라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알 수 있었다. 부유하고 대단한 집안에 얼굴까지도 아름다웠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남들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당당하고 주관이 뚜렷하며 강인했다.

향기가 너무 짙어 스스로가 의도치 않아도 주변을 홀리고 타락시키는 부류다. 거기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꼭 쥐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냐, 내겐 아직 베르너가 있어.’

휘말리지 마.

그것만은 절대 놓쳐선 안 돼.

샬럿은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치열한 전투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혼자 성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으니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틀 전, 마물에게 호되게 시달린 샬럿은 두 번 다시 마물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 속에서 울컥하고 오기가 치솟았다.

“기사님, 제발 안 될까요?”

결국, 샬럿은 성을 지키기 위해 남은 카젠 기사의 팔뚝에 매달려 간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하늘색 눈망울이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호수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제발요, 기사님…….”

“…….”

샬럿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방울진 눈물을 매단 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굉장히 애처로워 보였다.

지금 샬럿의 부탁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기사 또한 고역이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애가 부탁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뭔들 들어주지 못할까.

하지만 기사는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저는 도련님의 명이 아니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카젠 남작이 아니라 그 아들의 명에 움직이겠다는 이상한 발언에 샬럿이 잠시 당황했으나, 그녀는 다시 연기에 몰입했다.

“……역시 그러시군요.”

샬럿은 눈에 띄게 풀이 죽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만약 그녀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지금쯤 축 처져 있었으리라.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어요. 기사님들도, 영주민들도 저는 너무 걱정되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쓸쓸하게 응시했다.

“혹시, 혹시나 큰일이 벌어져도, 어쩌면 다시 못 보게 될지라도 저는 여기서 속을 태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들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로…….”

마물과의 전투로 여기까지 치열한 열기가 느껴지는데, 아련하게 중얼거리는 샬럿의 옆모습이 쓸데없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사의 식은땀도 늘어났다.

처음엔 당연히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냐.

영지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 위 관망대, 기사는 그곳에 샬럿과 단둘이 있었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망했다는 생각만이 명치를 얹힌 듯 무겁게 누를 뿐.

그런 기사가 좌절하거나 말거나, 샬럿은 성벽 밖의 상황을 빤히 살펴보았다. 신속하게 영주민들을 대피시켰는지, 산맥과 마을의 경계에는 마물과 기사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백, 아니 수천일지도 모르는 마물의 앞에 서서 홀로 대치하고 있는 건 놀랍게도 레녹스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먼 곳에서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절벽에서 샬럿을 끌어안고 뛰어내렸을 때보다 더욱 몸을 가누기 힘들어 하는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서 샬럿을 지켜 주었을 때처럼, 지금 영지를 지킬 수 있는 건 레녹스밖에 없었다.

‘이래서 오지 말라고 했던 거구나…….’

샬럿은 자신이 저 근처에 서 있었다가는 한순간에 죽어 버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 잠시 휘청거리던 레녹스는 무언가 결심하는 듯하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먼 거리라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의 모양으로 봤을 때 ‘심연에 흔들리는…….’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살럿은 왠지 온몸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헉, 메르텐시아 영애 아닙니까?”

샬럿이 왠지 소름 돋은 팔뚝을 쓸며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그녀와 함께 성 밖을 내다보던 기사가 말했다. 근심과 걱정에 까맣게 죽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보자 샬럿은 갑자기 배알이 뒤틀렸다.

기사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말 위에 올라탄 아일라가 마치 망토처럼 붉고 선명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빠르게 레녹스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확하게 레녹스의 앞으로 뛰어들어 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앞에 있던 마물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리고 어쩐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레녹스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샬럿의 옆에 있던 기사는 그런 아일라와 레녹스를 내려다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희망에 가득 찬 눈빛을 보자 그대로 찔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문득 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은 이렇게나 까마득한 곳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데, 강인하고 용맹하신 메르텐시아 영애는 선두에 서서 마물을 해치우는 영웅이었다.

“어휴, 어딜 가셨나 했더니 다행이네요. 이제 한시름 놓았습니다.”

“…….”

그래, 메르텐시아 영애가 거슬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 그들의 보호 아래 한껏 안주하며 호의호식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샬럿은 자신이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없으면, 혼자 남겨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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