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악녀 메이커 91화
베고, 또 베고, 또 베고.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런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
전장은 생지옥이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죽은 이들의 미련과 원통함, 공포를 적나라하게 마주해야 해야만 했다.
피로 물든 대지와 그 위에서 썩어 가는 시체들. 살아남기 위해선 영혼이 떠나 버린 육신을 밟고 걷어차 치워 버리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그게 적군이든, 몇 분 전까지 웃고 떠들던 아군이든 관계없었다. 단 1초가 생사를 가르는 공간.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져 널브러진 시체와 같은 꼴이 될 바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겪고 나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만 가는 전장에 비한다면 마물과의 전투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산맥에 서식하고 있는 마물들이 전부 마을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직접 토벌해 본 적이 있거나, 혹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물이 산맥을 타고 끝도 없이 밀려왔다. 매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마물들을 보며 이곳에 모인 기사 모두가 질린 표정을 했다.
“저건…….”
“아무래도…….”
“……끝이지?”
그들은 이미 마음속 깊이 이 카젠 영지에 종말의 날이 도래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다른 영지 출신이었으나 현재는 카젠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디질이 비장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쥐었다.
“아니, 다들 희망을 버리지 마. 사실 나는 고향에서 날 기다리는 약혼자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
“그래, 디질 경의 말이 맞다. 사실 나도 언제나 품속에 가족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고 있지. 얘가 우리 딸아이야. 귀엽지? 하하, 못난 아비였지만 꼭 살아 돌아가서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낼 거야.”
“저는 전부터 모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투가 끝나면 모든 것을 얘기해 드릴게요.”
“미친놈들아, 너희 때문에 다 죽게 생겼잖아.”
세상만사 냉소적인 기사, 팩트히트가 금기어를 뱉는 기사들을 차례로 타박했다. 그리고 레녹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녹스 경,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기척만으로도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승산이 있기는 한 겁니까?”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공허하기만 했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곳에 모인 모두가 이미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력이 있는 한, 죽여도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 마물. 그들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다. 거짓말로 기사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에는 너무 뻔히 보였다.
레녹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영주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들의 전력은 시간을 버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기사들은 살짝 동요했으나, 이내 검을 뽑아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예!”
“하지만 승산이 없는 건 아니야.”
“예?”
그럼 무슨 희망이 있기라도 한 건가? 기사들은 절박하게 대답하며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레녹스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마물들이 경계를 넘어 마을 안으로 밀어닥쳤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속이 짚으로 채워진 허수아비를 베어 넘기는 것만큼이나 이 의미 없는 짓을 전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마물은 죽인다, 인간은 지킨다.
그런 원초적인 본능만이 남은 기사들은 대체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마물의 몸체에 검을 박아 넣었다.
피도, 시체도 남지 않고 검은 마력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니 허무함은 더욱 짙어졌다. 도무지 수가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허공에 헛발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마물은 본디 인간보다 강했다.
당연했다. 마력 덩어리 그 자체인 존재와 지치고 다치기도 하는 살아 있는 육체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상대가 마법사거나 소드 마스터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물은 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영주민들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움직였다.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을 신경 썼더라면 애초에 이 영지에 남아 있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 전투가 길어질수록 레녹스를 포함한 기사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마물이 절대 산맥 밖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 그것은 산맥을 벗어나면 마물들이 본래의 힘의 절반 정도밖에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물을 처치하기 수월하다고 해도 마력이 넘쳐나는 한 의미가 없군.’
레녹스는 잠시 속으로 고민하다가 역시 메르텐시아 영애를 부르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마력이 없으면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마물이었다. 겉으로야 지금 상황이 마물과의 전투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이것은 마력이라는 실체가 없는 유령과 싸우는 것과 같았다.
마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력을 상쇄할 수 있는 신성력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정화’라고 불리는 그 작업 외에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신관을 어디서 불러올 수도 없었으니, 생각나는 건 역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메르텐시아 영애의 신성력은 적어도 고위급 신관 이상이야.’
왠지 그 사실을 스스로 꺼리는 것 같았고 비밀로 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라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애초에 레녹스는 입이 대단히 무거운 편이었다. 그녀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그녀의 그 신성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크든 작든 분명 마력에 영향을 미칠 거다.
그렇다면 기사들이 영애가 마물에 한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 증언에도 맞아떨어졌다. 자각 없이 일격마다 신성력을 담아 마물들을 정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농도가 짙은 마력을 조금이나마 없애 줄 수 있다면. 아니, 영애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아마 상당히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런데 지금 부를 수는 있나?’
레녹스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무한 문의 미스터리를 떠올리고는 잠시 떫은 표정을 지었다.
“크윽, 쿨럭……!”
그때, 갑자기 디질이 울컥 피를 토하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배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쳐 가고 있었지만 분명 그는 아직 버틸 수 있었다. 적어도 마물 열은 더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판단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예리한 검날에 관통당한 것 같은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마물에게 찔리기는커녕 오히려 검을 찔러 넣었는데 정작 다친 것은 자신이라니.
게다가 아무리 봐도 검에 찔린 이 상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내가 마물을 향해 검을 박아 넣은 위치잖아…….
“으, 으으…….”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치 새까만 연기처럼 일렁이는 마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루뭉술한 형태를 지닌 마물은, 서서히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면서 뭉쳤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디질 경!”
디질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설마…….”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비싈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안 돼! 공격하지 마십시오!”
“뭐?”
디질은 끔찍한 격통에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죽을힘을 다해 말했다.
“……카피 퍼펫.”
비싈은 마물 베어 내려고 검을 한껏 들어 올린 자세에서 행동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눈을 한계까지 부릅뜨면서 검은 안개를 돌아보았다.
안개는 계속 두루뭉술하게 형태를 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방금 마물과 싸우다가 생긴 상처까지 완벽하게 같았다.
“젠장! 진짜 카피 퍼펫이잖아!”
“실제로 존재하는 마물이라니, 빌어먹을!”
기사들은 디질의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너도나도 하나같이 욕설을 뱉었다.
카피 퍼펫은 형체가 없고 보통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 싸우는 상대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 체형, 실력까지 구현해 낸다.
그러니까 카피 퍼펫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격이었다.
내가 나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도 이미 상당한 난이도였는데, 거기에 더불어 더 큰 난제가 있었다. 카피 퍼펫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 그 상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거였다.
그게 세간에 알려진 전부였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마물까지 등장하다니. 이쯤 되면 세상이 그들에게 그냥 다 망하고 다 죽으라고 시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찌른 격이 되어 버린 디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왜…… 왜 메르텐시아 영애를 부르지 않았지, 우리?”
그의 눈빛은 반쯤 감겨 혼탁하게 흐려졌으나, 이상하게 검에 찔리기 전보다 더욱 또렷해 보였다. 그런 디질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기사들은 하나둘씩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표정으로 ‘그러게?’, ‘이상하네?’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카피 퍼펫이 비싈을 향해 달려들었고, 나머지 마물들도 쉴 새 없이 수를 불려 갔기 때문이었다.
레녹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기사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동시에 새하얗게 달아오른 검을 휘둘러 수십 마리의 마물을 한꺼번에 해치웠다.
처음부터 불리할 수밖에 없던 기사들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카피 퍼펫은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 몰래 숨어 있던 카피 퍼펫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자, 기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아주 완벽하게 접었다.
그런데 그때, 카피 퍼펫과의 전투를 유심히 지켜보던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 나와. 내가 선두에 선다.”
최고의 기사라는 이유로 가장 많은 마물들을 홀로 상대해야만 했던 레녹스의 꼴이 가장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한으로 생겨나는 마물을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선두에 선다고? 죽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레녹스 경, 이 상황에 무슨…….”
반사적으로 작게 반박하던 기사는 차갑게 굳은 그의 눈빛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뒤로 빠졌다. 그리고 기사를 눈빛 한 방에 조용하게 만든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카피 퍼펫을 이길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그, 그게 뭡니까?”
“나를 죽이는 거지.”
“네? 경 대체 뭐 하시는……!”
그렇게 말한 레녹스는 남들이 경악하든 말든 망설임 없이 검날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러자 손목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맙소사, 자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런데 그때,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꽤 깊어 보였던 레녹스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더니, 그의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낸 카피 퍼펫의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상처가 옮겨가기라도 한 것처럼.
카피 퍼펫을 해치면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온다. 카피 퍼펫이 날 해쳐도 당연히 내가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면, 날 스스로 해치면 내 상처가 카피 퍼펫에게 가는 게 아닐까?
사실 카피 퍼펫을 특성을 좀만 깊게 들여다본다면 ‘혹시?’ 하고 문득 떠올릴 법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신없고 급박한 상황에서 그것을 선뜻 시험해 볼 사람은 적었다.
다들 경외를 담아 레녹스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그럼 차라리 우리가 직접 자신을 찌르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니, 상처가 카피 퍼펫에게 옮겨 가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 급소를 찌르면 상처가 옮기 전에 반드시 그대들이 먼저 죽을 거다.”
그 말은 카피 퍼펫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급소를 피해 조금씩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지금 그런 짓을 하며 여유를 부렸다간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목숨과 맞바꾼 자기 희생 주문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내가 이곳에 몰린 마물을 한 번에 쓸어 버리겠다. 그 틈을 타서 메르텐시아 영애를 불러와. 그리고 영애를 모시고 산맥으로 가라.”
산맥 밖으로 나오면 마물들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말은 얼핏 들었을 때 마물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산맥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즉…….
“그들의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이 산맥 안에 있다는 거겠지.”
여기서 아무리 버텨 봐야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길을 트고 그사이에 메르텐시아 영애가 산맥을 정화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느 쪽이든 도박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정 위험하다 싶으면 그 집사가 알아서 영애를 대피시켜 주겠지.’
하지만 그녀라면,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레녹스는 남들이 여명의 기사를 볼 때처럼 자신이 아일라를 보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극한의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마물들을 마주 보고 선두에 선 레녹스가 기사들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목숨을 내놓기로 결정을 내렸으니 기사들이 한 명이라도 더 다쳐 봤자 손해일 테니까.
카젠 기사단원들은 레녹스의 빠른 판단력과 희생 정신에 감탄하면서도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모아 성호를 그으며 그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명복을 비는 이도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아무튼, 레녹스는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검을 겨누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틀 만에 이 기술을 다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똑똑하게 외쳤다.
“심연에 흔들리는 연옥의 업화여!”
그런데 한 문장을 뱉자마자 레녹스의 앞에 있던 카피 퍼펫의 머리가 날아갔다.
“뭣!”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신의 목은 여전히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살아…… 있어……?’
어느새 그의 앞을 가로막은 여인의 등 뒤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여전히 암담한 상황이라는 건 전혀 달라질 게 없음에도 마치 투쟁과 저항, 자유와 승리를 상징하는 깃발만큼이나 선명한 그런 붉은색이었다.
아, 이게 나를 볼 때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이었던가. 이런 건 줄 알았다면 그들의 기대가 무겁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벅차오를 정도로 찬연한 감정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메르텐시아 영애.”
레녹스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아일라를 불렀다. 그러자 아일라가 곧바로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가 무슨 반휘혈이냐?”
“예?”
아일라의 음산한 하대에 레녹스는 반사적으로 존대로 답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