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92화 (92/131)

# 92

악녀 메이커 92화

“반휘……?”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상한 말이었다. 어쩐지 발음하기도 전에 절로 혀가 꼬이는 기분이라, 레녹스는 아일라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알아서 사려야 할 것 같은 탓도 컸다.

“치료 마법으로도 중2병은 고칠 수 없나 봐.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재앙 같은 주둥이…….”

저것은 분명 살기다.

레녹스는 자신이 잘못 봤으며, 동시에 잘못 느꼈을 거라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살다시피 해 온 그의 몸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기민하게 살기를 읽어 냈다.

아일라는 진심으로 레녹스를 없애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마치 가늠하듯 자신을 천천히 훑는데,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죽일까 말까. 아주 극단적인 양자택일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제가 경을 걷어차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그런데 험악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일라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깔끔하게 살기를 갈무리하고 마물을 향해 등을 돌렸다.

일단, 산 건가?

레녹스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왜 이런 기분을 맛봐야 하는지 잠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자신을 상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의아해하던 그는, 아일라에게 또 한 번 생명을 빚졌다는 데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 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져 마물에게 습격당하는 걸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줬는데, 그녀가 건져 준 목숨을 또 자처해서 내던지려고 했으니 분노할 만하지.

레녹스는 비슷한 이유로 샬럿에게 화가 났었으면서 자신 또한 다를 바 없었다는 것에 지독한 환멸감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고 모순적이란 말인가.

“미안하군. 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아서…….”

레녹스는 잠시 속으로 자책하다가 동시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했다.

그는 쉼 없이 밀려오는 마물을 베어 넘긴 뒤, 아일라를 등지고서 말했다.

“그동안 나는 잘못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제국 최고라는 이명하에 우쭐대고 있었어.”

만약 아일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굳건한 강인함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샬럿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영원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검술 실력을 갈고닦았다고 해도 언젠가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하면 그건 희생이 아니라 그들에겐 상처가 되겠지. 내게서 희망을 얻어 가야 할 백성들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안젤로 영지로 향하기 위해서 발크 산맥을 지나야 한다는 것도, 최근 그 인근에 마물의 수가 급증했다는 말을 들었어도 가볍게 넘겼다.

도구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신성력을 담은 성수라도 준비해 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렇게 쉽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더는 자만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여 갈고 닦겠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일라는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저렇게 긴 대사를 할 정신머리가 있단 말이야?’ 하고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각자 앞에서 달려드는 마물들을 썰어 넘기고 있었기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아일라는 싸우랴 대꾸하랴 귀찮아서 대충 말했다.

“그렇군요.”

얼핏 성의 없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단순함 속에 그녀의 진심이 녹아 있는 듯하다 생각하며 레녹스는 감격했다. 연속으로 목숨을 빚지는 바람에 더욱 단단해진 콩깍지가 빚어낸 참사였다.

그들이 서로 답 없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을 때였다. 킬리안이 아일라가 활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흑마를 타고 등장했다. 다들 생사를 넘나들며 절박하게 싸우고 있는데 혼자 승마라도 즐기러 나온 듯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말의 검은 갈기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말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킬리안은 잘했다는 듯 말의 등을 토닥이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였다.

“꼴들이 말이 아니시군요. 역시 아가씨의 보조는 당신들보다 훈련 받은 사냥개를 데려오는 게 낫겠습니다.”

“개차반 집사!”

그러자 킬리안이 그 말을 외친 기사, 디질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킬리안이 정석 그대로의 반듯한 미소를 머금자,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환시를 보았다.

“개…… 개념 있고, 차…… 차원이 다른, 반…… 반반한 집사…….”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와중에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3행시를 마친 디질은,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저런.”

개념 있고 차원이 다른 반반한 집사가 그 하찮은 모습을 가엾이 여겨 자비를 베풀기로 한 모양이었다.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는 다친 기사들을 친히 그의 손으로 직접 어루만지며 치료 마법을 시전 했다.

“오오……!”

“저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개차반…… 개, 개념 있고 차원이 다른…….”

모두가 광명의 빛줄기를 보듯 감탄하는 가운데, 아일라는 그 모습을 두려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그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뿐인가. 그녀는 잠시 속으로 킬리안에게 치료 받은 기사들의 명복을 빌어 주는 시간을 가졌다.

아일라가 나타나자, 상황은 순식간에 수습되었다. 그녀 곁에 딸려 등장한 킬리안이 치료 마법을 퍼부어 준 덕도 컸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사들이 고전하고 있던 카피 퍼펫을 아일라가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줄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던 마물들이 주춤하며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카젠 기사단은 감탄하면서도 역시 마물 학살자라면서 술렁였다.

“기백만으로 마물을 죽인 겁니까?”

브라움은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였다. 이대로 놔두다간 또 멋대로 소설 한 편을 쓸 기세라 아일라는 최대한 싸늘하게 대꾸했다.

“술주정할 거면 집에 가라.”

그 말에 브라움이 시무룩해졌다.

“……카피 퍼펫이 그들의 머리 격이었나?”

그때, 드디어 실마리를 붙잡은 레녹스가 물었다. 그러자 브라움을 향해 쯧쯧, 혀를 차고 있던 아일라가 레녹스에게 의외라는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마물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산맥으로 가야 할 것 같군. 내 추측이지만 그들의 힘의 근원은 산맥에 있어.”

그 또한 정답.

그의 말을 들은 아일라는 자신이 얼마나 레녹스를 허접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반성하기로 했다. 그래, 명색이 여명의 기사인데 역시 하루 이틀 먹은 짬밥이 아니겠지.

“그럼 얘기는 빠르겠네요. 저 혼자 산맥으로 가겠습니다.”

그러자 레녹스를 포함한 킬리안에게 치료를 받은 기사들이 반발했다.

“혼자는 위험해. 나는 여기에 남아 마물을 처리할 테니, 누구라도 한 명쯤은 데려가는 편이 좋아.”

이제 좀 살 만해졌다고 남 걱정할 여유가 생긴 것일까. 아일라는 그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말없이 킬리안을 가리켰다. 내 집사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모습에 기사들은 침묵을 지쳤다.

아일라는 풀이 죽은 그들을 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카젠 영지의 특산품을 가장 기대하는 중이라고.”

“……네?”

기사단원들은 그녀의 말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마물 토벌과 특산품의 상관관계를 대입해 보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그들은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인즉, 영애께서는 처음부터 마물을 토벌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카젠 영지에 왔던 겁니까!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영애께 터무니없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냥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서 말하는 거 아니야?”

팩트히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일라가 잠시 그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찼을 뿐.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은…….’

왠지 뜨끔한 아일라는 산맥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마물과 대치하고 있는 기사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향해 기대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게 보였다.

“…….”

뭐냐, 이 만화 주인공의 고정 명대사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들은.

아일라는 잠시 번뇌에 잠긴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고는 레녹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한 것도, 지는 것도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언젠가 강해지고 다시 이겨 내면 그만이니까. 구질구질하게라도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라고요.”

“영애…… 고맙군.”

“여러분에게 내일의 태양을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까 절 믿고 이 자리를 지켜 주세요.”

“예!”

그들이 우렁차게 외치자, 아일라는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며 킬리안과 함께 유유히 떠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주먹을 들었다가 내리며 기사들의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그녀의 뒷모습에 기사들은 존경을 담아 경건한 태도로 경례를 붙였다.

* * *

“내게도 내일의 태양을 보여 주지그래? 해가 떠오를 때까지 내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면 되겠군.”

“닥치세요.”

이럴 줄 알았다. 태양 운운하는 소리에 또 킬리안이 한참을 웃더니 내 말을 그대로 응용하며 놀려 댔다.

그래, 이런 전개로 이어질 줄 분명 알고 있었어! 이래서 하기 싫었다고!

하지만 아까는 왠지 오글거리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기사들이 하도 그럴듯한 대사를 바라는 눈빛을 보내서 나도 모르게…….

‘망할 10년 전 소설 같으니!’

나는 내일의 태양은커녕 지금 떠오르는 태양조차 직시하지 못한 채 양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내가 심연 어쩌고 하는 레녹스를 나무랄 처지인 건가?

……죽자. 그냥 죽자.

자업자득에 몸부림치며 시야를 포기하고 있을 때, 킬리안은 내가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대신 말고삐를 잡아 주며 덧붙여 말했다.

“농담 아닌데.”

“…….”

그래, 나도 조금 전의 일로 킬리안의 농담이 더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대단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쪽 지식이 해박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매체를 통해 상당히 접하긴 했지만 실제로 해 본 건 몇 번이 다였다. 키스라는 게 상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달콤하지 않았기에 실망했었던 것도 있었고.

그런데 대체 무슨 만용으로 킬리안을 가르치겠다는 그런 말을 선뜻한 것이냐,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이 모든 걸 충동이라 한정 지어 버리고 날 구속하던 브레이크를 완전히 부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키스는…….

네, 환장하게 좋았습니다.

내가 지금껏 해 본 키스가 애들 장난이었던 건지, 아니면 이게 키스가 아니라 유사 성행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내 온몸이 성감대라도 되는 줄 알았다.

키스를 가르쳐 준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다가 30분 만에 모든 기술을 흡수당하고 Z까지 갈 뻔했다. 말 타고 마물을 토벌하러 가야 한다고 설득해서 직전에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넘어갈 뻔…….

“크,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핵은 어디 있는데요?”

그러자 킬리안이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날 보다가 지금은 봐 줄 생각이었는지 선뜻 대답을 들려주었다.

“핵을 제외한 나머지 마물들을 산맥에서 전부 다 쫓아냈으니까 찾기 쉽겠지.”

“……그런 목적이었습니까?”

“일거양득이라고들 하지.”

“대단한 인성입니다.”

“과찬의 말씀을.”

칭찬 아니라고.

아무튼, 다행히도 아무런 인명 피해가 없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 둘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뒤로 아무런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

“…….”

살려 줘.

그와 단둘이 있기가 굉장히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내가 평소에 그를 어떤 표정으로, 어떤 식으로 대했더라? 킬리안도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분위기 좋았다가 마물 때문에 중간에 뚝 끊겨서 그런가, 어쩐지 눈동자가 검게 번들거리고 있고.

내가 어색한 침묵에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숨긴 거지?”

“예?”

“네 손.”

아…….

키스하면서 그의 입술에, 양 뺨에, 뒷목에, 두피에, 가슴팍에, 수도 없이 스쳤을 내 손바닥. 그때마다 내 손의 굳은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진작부터 알아차렸겠지.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겼다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는 양손을 맞잡았다.

“네 신성력이 날로 높아져 간다는 것쯤이야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는 맞잡은 내 한쪽 손을 가져간 뒤에 매끈한 내 손바닥을 그의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면서 말했다.

“상처를 입어도 능력이 통하질 않으니 치료할 방법이 없어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나는 간질거리는 손바닥에 어깨를 움찔 떨다가 멍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이 먼저 나오는 거야?

“그 기사도 아는 눈치던데, 내게는 잘도 숨겨 왔군.”

그저 단순한 욕구 불만인 줄 알았는데 이것 때문에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조금은 화가 난 듯한 그에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킬리안은 신을…….”

“더없이 증오하지.”

“…….”

“하지만 넌 다르다는 걸 얼마나 표현해야 알아주겠어?”

역시 직접 말해야 아는 건가?

킬리안은 그렇게 물으며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 오롯이 내게 시선을 맞추며 한 글자씩 똑똑히 말했다.

“상관없어. 네가 뭐든.”

그 말이 심장을 울렸다가.

“신이 널 뭐라고 생각하든.”

뚝, 하고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매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스러져만 가는 낙엽은 초겨울의 바람을 만나 그와 나 사이로 맥없이 흩날렸다.

가을이 깊어 가고 만개했던 꽃봉오리가 다 져 버린 삭막한 숲속에서, 홀로 꽃처럼 웃고 있던 킬리안이 안심하라는 듯 속삭였다.

“네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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