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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93화 (93/131)

# 93

악녀 메이커 93화

늘 궁금했다.

신을 향한 킬리안의 증오심은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모든 일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를 이렇게까지 뒤틀리게 한 신은, 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빠져들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수렁에 나 스스로 발을 담그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절대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일 리도 없는 신이었으니까.

킬리안은 어떠한 비밀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신만 아니면 돼요?”

덜컥 겁을 먹은 나는, 오히려 내가 신이 아닌 것처럼 당당하게 되물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거의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하는 순간 동시에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하면서도 무르지 않았다.

‘거짓말도 하면 할수록 느는 거라더니…….’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기서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분노케 한 신이 아니잖아. 그리고 과연 나를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세계를 창조하기는 했지만, 신다운 능력은 쓰지도 못하는걸. 신성력이 생겼다고 한들, 신성력은 본디 인간이 신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 거고…….’

내가 신이라면 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창조한 세계 속 악녀의 몸 속에 빙의되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신을 과연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세계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건 유일신, 레제르브였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도 레제르브겠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응. 신만 아니면 돼.”

그가 더없이 달콤한 미소를 머금으며 쐐기를 박자, 순간 심장이 따끔하게 아려 와서 그대로 입가를 허물어트렸다.

바스락―

그 순간, 기척을 느낀 킬리안이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바로 의심받았을 법한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갈무리한 뒤, 재빨리 평정을 유지하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저 소리가 들려?”

그리고 어쩐지 놀라워하는 킬리안을 보고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신성력의 영향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쳐도 동화가 빠른데……. 뭐, 네게 묻어 있는 레제르브의 기운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만.”

내가 뭔가 또 일반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의미 없이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내가 신이면 어쩌나 해서.

그는 잠시 바람 소리를 가늠하듯 눈을 감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 한 곳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걸 파괴하면 모든 게 끝나.”

그 말과 동시에 그가 허공에 술식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유려한 문체로 새겨진 황금의 식이 마치 춤을 추듯 흔들거리더니 둥글게 모여 하나의 진을 이루었다.

킬리안은 그 안에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공간을 찢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무언가 짧은 비명이 터지더니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이 그의 손에 사정없이 끌려 나왔다.

드디어 만났다.

마물들의 핵이자, 카피 퍼펫의 본체.

카젠 영지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원흉 중 하나가 드디어 나타났다. 나는 심란한 생각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핵을 향해 검을 들었다.

“거기보다 조금 밑에 구슬 같은 까만 구체가 있지? 그걸 깨트리면 돼.”

나는 킬리안이 옆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발크 산맥에 있던 모든 마물의 본체는, ‘꿱!’ 하고 생각보다 하찮은 소리를 내며 마력으로 흩어졌다.

고작 이걸로 끝인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마물들이 전부 사라졌는지 기사들의 함성이 산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

핵을 처치하는 건 예상대로 순식간에 끝났다. 그렇다고 내가 고군분투하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긴장감 없이 너무 빨리 끝나 버렸잖아. 이렇게 되면 말을 돌릴 틈도 없이 아까 킬리안과 나누던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한다.

“역시 너…….”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킬리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나는 올 게 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으며 그가 내릴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인가?”

그런데, 킬리안이 상상도 하지 못한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예?”

나는 나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고민이 그대로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분위기를 잡기 시작한 지 몇십 분도 채 안 됐는데 대뜸 천사라니.

“처음 봤을 때 심각할 정도로 착한 것도 그렇고, 그런 것치고 가르치면 아주 쉽게 물드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그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닌 모양이다. 턱을 쓸며 중얼거리는 말이 쓸데없이 진지해서 듣고 있는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처, 천사…….”

나는 더듬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왠지 온몸을 타고 두드러기까지 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그러지 마. 답 없는 호구 기질을 천사로 오해하지 말라고!

“가끔 있지. 신의 심부름꾼 노릇을 자처하는 머저리들이. 일반적으로는 천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만.”

하기야 천사라는 단어 자체에 엄청난 거부감이 생기기는 하지만, 천사라는 게 존재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이미 신까지 등장한 마당에 천사라고 있지 말란 법 있나.

잠시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어려웠지만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신의 심부름꾼이요?”

“주로 레제르브의 전언을 전해. 내게도 자주 오는 편이다만, 상당히 일방적이고 융통성이 없어 상대하다 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곤 하지.”

천사에게도 굉장히 유감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제게도 그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신 겁니까?

아, 그래서 레제르브가 단 한 번도 인간의 부름에 답한 적 없다고 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던 거구나. 천사가 그에게 신의 전언을 대신 전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 역시 천사도 종처럼 부리고 권능도 멋대로 쓰고 그런 게 신이지 내가 무슨 신이야? 내가 속으로 안심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신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네가, 나를 망치러 온 천사인지 묻고 싶은데…….”

하긴 킬리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권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창조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신은 레제르브가 유일하니까. 그런데 그 레제르브의 기운이 잔뜩 묻어 있는 나를 천사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는 게 없는 천사가 있을 수 있나요…….”

“타락 천사?”

루시퍼냐고.

킬리안도 이 답 없는 10년 전 소설 속 인물이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상상을 진짜처럼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니까 전례가 있는 사실이긴 하겠지만. 타, 타락 천…… 그 표현 자체가 견디기 힘듭니다만!

나는 항마력이 부족해 주먹을 꾹 쥐면서도 그의 뒷말이 궁금해 오기로 버텼다.

“천사가 죄를 지으면 기억을 지우거나 다른 기억을 심어 인간계에 떨어트린다더군. 그리고 윤회를 거듭하다가 어느 조건을 충족하면 다시 신계로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고.”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다만, 대체 저런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만약…….

“……제가 천사라면요?”

떠보듯이 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럼 널 여기까지 끌어내려야지.”

“…….”

“내가 있는 곳까지 타락해 줘.”

같이 지옥에서 살자, 아일라. 하고 그가 날 보며 웃었다.

지옥이든 어디든 그가 있는 곳이라면 선뜻 따라가고 싶어질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걸 본인은 알까?

‘아니까 저러겠지.’

킬리안은 내가 천사여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천사라면 타락시켜서라도 신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뒤 곁에 두면 되니까. 너무나 그다운 발상이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정말 레제르브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네.

아니나 다를까, 킬리안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저 잔잔한 미소는 자수해서 광명 찾으라는 뜻인 건가. 예정된 절차처럼 수렁에 발끝부터 천천히 잠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물었다.

“킬리안은…… 킬리안이에요?”

어딘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500년 전, 신성한 황금의 도시라 불리던 왕국 엘도라도. 그들의 살아 숨 쉬는 역사, 문화, 인종까지 모조리 다 없애고 한낮 전설로 내려 앉혀 버린 악의 주술사가 맞는 거냐고.

그러자 그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무슨 답을 원하든, 네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그 답이 정답이야.”

내가 그의 정체를 지금껏 모르는 척 외면했던 것까지 꿰뚫어 본 한마디였다.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듯한 그의 언동에 위화감을 느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대마법사가 위협을 느끼고 도망칠 만한 주술사가 흔한 것도 아닐 텐데.

그리고 평범한 주술사 한 명이 제국 땅으로 몸을 옮겼다고, 마력 때문에 마물들이 들끓을 정도의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 모든 걸 외면하려고 했지만.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라는 가정도 깨졌고, 정체를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날 해치고도 남을 거라는 가정도 깨졌다.

외면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로툴로의 왕…….”

주술로 돈을 벌어들이며 아이들이 돌 대신 황금을 가지고 논다는 숲. 그 숲의 왕이라는 건.

“주술사들의 왕이에요?”

“그래.”

잔뜩 긴장하고 물은 보람도 없이 선뜻 돌아오는 대답에 허탈해졌다.

“……어떻게 살아 있어요?”

소드 마스터, 대마법사, 대신관 같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들은 젊은 모습을 유지하며 평균 수명보다 오랜 기간을 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길어 봐야 150살이 한계였다. 늙지 않고 500년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신의 힘이 개입된 게 아닐까, 하고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묻자, 킬리안이 웃었다. 거기까지 파고들었다는 건 의미 없이 그를 밀어내고 거부하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므로.

“신을 능멸했거든, 내가.”

신의 벌을 받아 영원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거야 왕국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렸으니 신이 벌을 내릴 만도 하겠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왜 능멸했는데요?”

킬리안은 엘도라도 왕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없애 버렸다. 역사가 말하길 사람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그를 몰랐던 시절이라면 ‘세상에, 완전히 미친놈이네.’ 하고 대충 생각한 뒤 넘겼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랬다. 팔은 안쪽으로 굽는걸. 영문도 모른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왕국보다, 킬리안이 느꼈을 고통이 더 중요했다. 대체 어떤 원한이 있었기에 그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말했다.

“신의 권위에 도전해서?”

“아뇨, 신이 왜 벌을 내렸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요. 왜 당신이 신을 능멸했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거봐, 이렇다니까.”

아까부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킬리안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내 곁을 맴도는 바람결을 따라 상쾌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내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그는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 네가 절대 신일 수가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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