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악녀 메이커 94화
‘네가 절대 신일 수가 없다’는 말은, 그가 날 신으로 의심해 본 적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의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에게 있어서 내가 신이라는 가정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일 터였다.
나는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진 내 입술 위를 손등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레제르브만 아니면 되는 거 맞아?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까지 허용 범위 내에 있는 거 확실해?
신을 능멸한 당신에게 벌을 내린 건 레제르브라는 신이겠지만, 애초에 당신이 겪은 모든 불행의 발단을 제공한 게 나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입만 계속 달싹였다. 그러다 결국 가장 솔직한 내 심정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
“저도 제가 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단순히 10년 전 쓴 소설에 빙의한 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성력 같은 게 생기고, 하나둘씩 변해 가는 나를 보니 더는 인간이 아닌 것 같고.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샬럿을 위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세상은, 어쩐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고 나에게 관대했다.
지금까지의 계획대로 새로운 루프가 찾아오기 전까지 샬럿과 베르너를 이어 주고, 물고기들에게 호감을 사면 되는 걸까? 그러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목이 꽉 막힌 듯 아파서 침을 삼키기도 힘들어졌다.
“사실요…… 신의 계시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알아.”
“알아요……?”
“레제르브가 계시 같은 걸 내릴 리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처음부터 반신반의했지.”
그럼 날 완전히 믿지도 않았으면서 내 말대로 따라 준 거라는 말이 된다.
물론 그는 그만의 목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겠지만, 새삼 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에 선뜻 가담해 준 건지 감탄스러웠다.
“……제가 절대 신이 아닐 거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레제르브 말고도 알려지지 않은 신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창조주라든가, 창조주라든가.
초조해서 조금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저 말은 나도 나 자신을 신이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러자 킬리안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토닥이며 말했다.
“애초에 신이 여럿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쳐도 신은 너처럼 지극히 인간다울 수가 없어.”
“인간답다고요?”
“인간은 부당하나, 신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고들 하지. 철저히 순리대로만 움직이는 걸 온당한 처사라고 믿는 작자들이니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신들도 그럴 수는 없는 건가요?”
“불가능해.”
그러자 킬리안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이타적인 신에게 남은 결말은 죽음밖에 없으니까.”
* * *
산맥에서 마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마력과 숲의 생명력이 있는 한 언제든 그 둘은 결합해서 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잠복 기간이 필요하다 들었으니, 적어도 몇 년간은 마물 없이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뻐 날뛰면서 달려드는 기사들과 남작을 피해 도망쳤다. 이곳 카젠은 영주나 기사들이나 너무 흥분하면 악몽 같은 주둥아리를 놀리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까지야 익숙한데 나까지 휘말리게 된다는 끔찍한 부작용이 있었다. 후폭풍은 내가 다 감당해야 하잖아.
나를 상대로 또 무슨 장황하고 극적인 서사시를 읊을 생각이란 말인가. 향후 20년 치 항마력은 이미 고갈된 지 오래였으니, 지금만큼은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들은 생각보다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들의 반절 이상이 직접 킬리안의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00년 이상을 살아온 주술사가 주최하는 불행 파티.
“왜?”
내가 빤히 쳐다보자 킬리안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어왔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지 않게끔 알아서 잘 조절했겠지.
어쨌든, 발크 산맥의 마물을 완전히 토벌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것은 당연히 나로 지목되었다.
‘의도했던 바지.’
나를 향한 사람들의 열광이 진정되었을 무렵, 나는 영주성의 모두를 불러 모은 뒤 말했다.
“산맥에 있던 마물의 본체를 친 건 나지만, 결정적으로 그대들이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나 혼자였더라면 이뤄 내지 못했을 거야.”
내가 뜬금없이 시상식 소감 같은 말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마물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미래가 막막하기만 한 답 없는 카젠 영지에 새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였다.
“특히 카젠 남작.”
그러자 지목된 카젠 남작이 기대 어린 반짝이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너는 뭘 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마물이 내려왔을 때 돈 빼 들고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으면서?
“……의 장남, 알레이 카젠.”
내가 남작의 첫째 아들을 부르자, 묵묵히 서 있던 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영식께서 선두로 나서 영주민들을 대피시켜 준 덕분에 아무런 인명 피해가 없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알레이는 ‘내가 뭘 했다고’ 하고 말하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감사를 표하듯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지요. 영애가 없었더라면 이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을 겁니다.”
“겸손하시긴.”
내가 미소를 지으며 알레이를 치하하자, 열심히 내 눈치를 살피던 카젠 남작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아, 제 아들 알레이가 마음에 드신 거라면 언제든 차기 백작님의 가신으로 삼아 주십시오. 알레이는 제 하나뿐인 자랑이자,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아들이니까요.”
그러자 고분고분 얌전한 태도를 보이던 알레이의 눈에 경멸과 환멸이 어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감정을 다스리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을 했다.
지긋지긋하겠지. 벗어나고 싶겠지.
나는 그런 알레이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남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첫째 아들을 치하할 때와는 상반된, 서릿발 같은 싸늘한 말투로.
“반면, 안타깝게도 카젠 남작을 향한 영주민들의 원성은 자자하더군요. 제가 발크 산맥의 마물들을 토벌한 권한을 행사하고 싶을 정도로요.”
“그, 그런……!”
처음부터 내게 제 아들들을 정부로 팔려고 했던 카젠 남작. 하지만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나니까 이제 가신을 빌미로 첫째 아들 덕을 보고 싶은 모양인데…….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권위와 권력은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그에게 있어 자식들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이 세계로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분명 메르텐시아 공작도 이런 아버지일 거라고 착각했었지. 하지만 카젠 영지에 와서 남작이라는 완전체를 보고 나니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제 냉정하게 말했느냐는 듯, 이번엔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남작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알레이 카젠 영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시다니.”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영식께 카젠 영지의 운영을 맡기고 민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근신하심이 어떠신지요.”
그러자 비굴한 웃음으로 실실거리던 카젠 남작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작위라도 물려주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영애라고 해도 그런 폭거를 자행하시다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얼씨구,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할 땐 부득불 차기 백작이라 부르더니, 이제는 곧바로 영애냐? 내가 없었다면 이 영지는 진작 망해서 작위조차 박탈당한 채 쫓겨났을 테니, 이 정도 간섭은 해도 된다고 보는데.
“이대로 가다간 제가 겨우 살려 놓은 영지에 다시 폭동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걸 원하는 건 아니실 테지요.”
“…….”
“남작께서 하실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이대로 물러나거나, 혹은 영주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 낮은 곳에서 계속 봉사하십시오.”
“낮은 곳에서 봉사라면…….”
“민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영주민의 곁에서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거죠.”
나는 수도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이 좋겠네요, 하고 덧붙여서 말했다.
하나의 선택권을 더 주는 척했지만, 귀가 얇고 입만 산 아첨꾼의 특성상 절대 후자는 택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설마 카젠 남작이 표정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그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맙소사, 제가 어떻게 평민들 따위의 수발을 듭니까.”
나왔다, 귀족 우월주의.
대체 이런 전형적인 구세대 귀족을 대표하는 꼴통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저런 뛰어난 아들들이 나왔는지 의문인 부분이군. 역시 카젠의 아들들은 혼자 알아서 잘 큰 자식의 표본이 아닐까?
“평민들 따위?”
나는 본인의 주제도 모르고 영주민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남작에게 팩트를 날렸다.
“지금 재정 상태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차피 그들이 전부 떠나면 영주직을 박탈당하실 것 아닙니까. ‘그’ 평민들 따위에게 남작님의 운명이 달린 건 알고 계시는지?”
그렇게 카젠 남작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카젠 기사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며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표정을 했다.
기뻐하십시오. 이제 열정 페이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카젠 기사단 여러분들. 현명하고 똑 부러진 도련님들 밑에서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 가세요!
내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계속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알레이가 말했다.
“이든에게 들었습니다. 제 동생들에게 기회를 주셨다고요. 그런데 제게도 이렇게 기회를 주시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뒤늦게 카젠 남작에 의해 정부로 팔려갈 뻔한 셋째 아들, 이든에게 내가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으면 한 번쯤은 도와주겠다고.
“기회라기보단, 선택권을 하나 더 늘려 주었던 것이죠.”
그러자 그가 내 말에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듣던 대로군요. 영애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에 대한 콩깍지가 제대로 씐 이들 중 한 명 같다는 예감이 아주 강렬하게 들었다.
“선택권이라 하셨지만 제게 최고의 기회를 주셨으니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에 주신 선택권은 물러 주시지요. 이든은 셈이 빠삭하니 영지의 재정을 담당하면 잘해 내 줄 겁니다.”
“형님!”
알레이가 말하자,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나를 흘끔거리며 잠자코 듣고 있던 이든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잔뜩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이든은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아이니까요.”
정곡이 찔렸는지 이든은 시선을 돌린 채 잠시 대답이 없었다. 내가 기껏 준 선택권을 본인 앞에서 걷어차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멋있네요. 마음에 들어요.”
조금은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너희는 나보다 더 나은 애들인 것 같다. 살짝 등을 밀어 주기만 해도 이렇게 선뜻 자신의 길을 찾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굳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벗어날 수 있었겠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다가 창백하게 질린 카젠 남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도망가지 말고 당당하게 보여 주세요. 가치를 모르고 팔아넘기려고 했던 아들들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었는지.”
내 말에 카젠의 영식들은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흐리다가, 한참 입술을 달싹이곤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