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악녀 메이커 95화
레녹스와 샬럿은 나보다 하루 먼저 영지를 떠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샬럿의 고향인 안젤로 영지로 향하던 중이었으니까, 빨리 갈 길을 서두르는 게 낫기야 하겠지.
‘이상하게 샬럿은 얌전하고…….’
또 무슨 선전 포고를 할 줄 알았는데, 외려 나를 피하는 느낌이라 의아했다. 설마, 벌써 포기했나? 아니면 황궁에 돌아간 뒤를 노리며 지금은 얌전히 칼을 가는 중이라던가.
그러던 중, 킬리안 없이 홀로 복도를 지나다가 막 떠나려던 레녹스와 마주쳤다.
“메르텐시아 영애가 없었다면 마물들의 본체 격인 마물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지. 그리고 본체인 핵을 죽이면 마물이 일시적이나마 깨끗하게 사라질 거라는 것도.”
그는 대뜸 나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금 제국 곳곳에서 마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영주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라, 그의 치사를 뻔뻔하게 받아들일 생각이기는 했다. 그런데 마물의 핵에 대해 그는 어느 유능한 주술사에게 들은 것도 아니면서 거의 정답에 근접하지 않았던가.
‘생색도 안 내네. 순수하게 치사만 하기에는 본인도 엄청나게 굴렀으면서. 그 심연…… 어쩌고 하는 주문까지 외워 가면서 기사들 대신 희생하려 했잖아.’
역시 레녹스는 청렴결백하다는 설정 그대로인가.
너무 깨끗한 사람 옆에 있으면, 왠지 속물 그 자체인 내 속마음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내가 타락천사라면 레녹스는 무슨 인간계로 떨어진 대천사인가?
나만 모든 공을 가로채는 것은 양심에 찔려서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건 아니죠. 마물들의 힘의 근원이라는 게 산맥에 있다는 걸 레녹스 경도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그렇다고 한들, 핵을 처리한 건 영애였지. 그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건 조금 아쉽군. 다른 마물들이 마을로 침입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음. 아니, 직접 봤으면 아마 실망했을걸. 마물 토벌이라기보다는 그냥 검으로 구슬 깨기였으니까.
1초 만에 끝나 버린 그 토벌 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산맥이 보스가 가장 처리하기 쉬웠냐고. 아무래도 이 사냥터는 밸런스 패치를 다시 해야 할 듯하다.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레녹스는 내 상념을 단박에 부수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해 주었다.
“영애의 공로가 너무 크기에 황궁에서 공로상을 받아야 할 거다. 아마 폐하께서 직접 수여해 주시겠지.”
“……예? 아니 뭘 이 정도로.”
“이 정도?”
당황한 내가 되묻자, 오히려 레녹스 본인이 더 기막혀 했다.
“신관을 불러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마물을 깨끗하게 퇴치할 방법을 알아낸 정도를 말하는 건가?”
음, 그렇게 말하니까 쓸데없이 대단하게 들리기는 하네. 산맥을 끼고 있는 영지는 어디든 마물에 의한 크고 작은 피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부유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어디에 돈이 있어서 신관을 부르겠는가. 한 번 부를 때마다 영지의 1년 치 예산과 맞먹는 고위급 신관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 그런 그들에게 죽여도 죽여도 계속 생겨나는 마물이란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핵이란 존재 자체가 절실하게 들릴 테고.
“핵이 산맥마다 다른 형태를 한다는 게 걸리지만, 폐하께 산맥마다 기사단을 파견하기를 청할 거다. 핵의 형태에 관한 통계를 낸다면 산맥 근처에 거주하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했다니.
“아무래도 공로상은 저보다 레녹스 경이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역시 최고의 기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항상 자기 희생을 기본 전제로 생각하고 이타적이어야 한다니. 윤하늘도 목숨을 내걸지는 않았거늘.
“영애의 말대로 이건 내 직업이니까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 하지만 영애는 기사도, 이 영지의 영주도 아니지 않은가.”
레녹스는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그러니까 내가 공로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하.”
완전 싫다.
물론, 명예스러운 일일 테고 황태자한테도 날 죽이면 손해라는 것을 어필하기 아주 좋은 기회일 테지.
잘하면 샬럿과 베르너를 직접 엮어 줄 수도 있었다. 지금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다음 루프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것 하나만큼은 이뤄 내기로 했다. 그래도 본인의 심장이 두 개라 주장하는 인간의 본거지로 제 발로 찾아가는 건 께름칙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얼굴에 술을 퍼부어 줬는데 분명 뭐라고 내게 시비를 걸겠지. 날 무시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네?”
“……표정이.”
아. 나는 그제야 똥이라도 씹은 듯 구겨진 표정을 수습하며 빙긋 웃었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싫은 티를 너무 낸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확신하는 투로 물었다.
“명예에 별로 관심이 없나?”
예? 저는 당신처럼 거저 주는 명예를 마다하는 청렴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명예보다는 돈 쪽에 관심이 더 많기는 합니다만. 공로상을 받으면 당연히 보상도 덤으로 따라오는 거겠지?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편이죠.”
“역시…….”
넌 또 뭐가 역시인 거야.
“신성력에 대한 것도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나는 생각보다 예리한 레녹스의 중얼거림에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상념에 잠겼다. 오늘 동틀 녘에 킬리안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킬리안은 그가 왜 신을 능멸하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았고, 나는 끝끝내 내가 이 세계의 작가라는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냥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모래로 쌓은 성이라든가, 카드로 지은 집일지라도 지금은 이대로 행복할 수 있잖아. 비밀 위에 쌓인 관계 때문에 언젠가 무너지고 쓰러질지라도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잖아.
이런 걸 보면 킬리안의 말이 맞았다. 순리대로 철저히 움직이는 게 신이라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굳이 그 길을 택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나는 도저히 신일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냥 그런 걸로 충분했다.
“비밀로 해 주실 거죠?”
“그럼 신전을 찾지 않을 건가?”
“그러려고요.”
그러자 레녹스는 내가 그렇게 답할 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재차 내게 물었다.
“……그대의 오명을 단박에 벗을 수 있을 텐데도?”
신전에 가면 막연히 내 정체가 무엇인지 확답을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킬리안이 아무리 500년 이상을 살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는 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멀리해 왔으니까. 대대로 일평생 신을 섬겨 오고 연구하며, 그들의 힘을 빌려 왔던 수만 년 역사의 신관들보다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를 속이고 신전에 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킬리안이 내게 그저 소중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내가 그만을 원한다는 감정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리고 내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알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찬란하고 잔인하게 내 심장을 짓밟던 그 미소가 떠올랐다.
“신과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레녹스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는지 한숨을 내쉬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비밀은 꼭 지키겠다. 그래도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바로 대신관과 연결해 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그 말을 남긴 뒤,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 * *
올 때는 맨몸으로 왔는데, 돌아갈 때는 카젠의 구원자라며 영주민들에게 뭔가를 잔뜩 받았다.
허허, 이거 참 기분이…….
나는 실실 찢어지는 입꼬리를 꾹꾹 내리누르며 영주민들이 챙겨 준 음식과 장신구, 생필품 같은 것을 하나하나 살피며 챙겼다.
손님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뭔가 이거 팬한테 편지와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옆에서 같이 짐 정리를 도와주던 킬리안이 ‘음?’ 하고는 선물 무더기 속에서 무언가를 쭉 잡아당겼다. 속이 훤히 다 비치는 재질의 속옷이었다. 아니, 천 쪼가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저런 건 또 어떻게 찾은 거야.
“이것도 입을 건가?”
“입긴 뭘 입어요!”
애초에 속옷 본래의 기능을 조금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용도가 아주 노골적인 속옷이었다. 대체 왜 끈인 건데? 왜 끈에 진주가 구슬 꿰기처럼 알알이 달린 건데?
내가 기함하는 사이, 킬리안은 흥미 어린 표정으로 속옷에 매달린 쪽지를 읽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상냥하기도 하지.”
무슨 내용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가져다 버려요.”
“귀여운 표정으로 선물 하나하나 소중히 챙겼으면서, 지금 선물 차별해?”
평소엔 무기력한 편이면서 날 놀릴 때만 의욕 넘치지 말라고.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속옷을 빼앗아 등 뒤로 던져 버렸다. 물론 남이 준 선물을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어서 한숨을 삼키며 다시 챙기긴 챙겼지만.
‘집에 가자마자 버려야지.’
그렇게 열심히 떠나기 위한 짐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어요.”
똑똑. 내 방문을 두들기고 들어온 하녀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고마워, 여기 두고 가.”
마물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영지 내로 들어오지 못했던 파발꾼들이 그동안 쌓인 편지나 물품을 한꺼번에 배달했다고 했다.
기껏해야 한두 장이나 될까 했는데, 나는 내 몫으로 온 꽤 많은 양의 편지를 보고 의아해 했다.
대체 누가 날 이렇게 찾아. 나는 편지의 발신자를 살펴보았다.
A.M. A.M. A.M. A.M. A.M…….
이것은 오전을 뜻하는 그 약어가 아니다. 아슬란 메르텐시아의 이니셜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 영지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달 하고도 보름?
잘 지내느냐로 시작한 편지는 서서히 걱정으로 바뀌더니, 종래에는 내가 혹시 네 심기를 거스르게 한 게 있느냐는 자책으로까지 번져 있었다.
대체 내가 없는 사이 어디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간 거야? 돌아가면 잘 달래 줘야겠다. 설마 아슬란이 날 걱정할 줄은 몰라서 메르텐시아 공작에게만 이번 외출은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하고 왔는데.
열 장이 넘는 편지를 하나하나 읽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아슬란 본인이 보였다. ……응?
“……?”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비벼도 아슬란의 형체가 사라지지 않자, 편지를 내려다보고, 아슬란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아슬란을 보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툭 건드려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정확히 이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하녀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던 게 날 찾아온 아슬란 때문에……?
나는 그를 진정시킬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린 뒤에 말했다.
“가출이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내가.”
“네.”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래서 떠난 건 줄 알고…….”
갑자기 무슨 거짓말?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아슬란과 최근에 나눈 대화라고 해 봤자 링테 작가의 안부를 물은 것밖에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