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악녀 메이커 96화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
내가 의아하게 묻자, 그는 눈 사이를 좁히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슬쩍 미간을 찡그린 얼굴이 참으로 복잡해 보인다. 허를 찔린 것 같기도, 의심하는 것 같기도,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몰라?”
“네.”
처음엔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던 귀여운 아슬란은 대체 어디 갔는가.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래서,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휙 하고 멀어져 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응시하고 있는데 킬리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정작 간절히 원할 때는 눈앞에 두고서도 보지 못하는 법이지.”
꼭 찾을 때는 안 보이는 그런 걸 말하는 거지? 그럴 때 많지.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킬리안을 봤지만, 그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 * *
아슬란은 마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가는 내내 무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상하게 주변 온도가 10도쯤은 내려간 것처럼 으슬으슬 떨렸다.
아니…… 내가 뭐 잘못했어?
아슬란이 끌고 온 메르텐시아 가문의 마차 안에는 링테 작가의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아무리 내 돈을 가져가라며 출판사를 꼬드겨도 작가님이 원하지 않는다고 절대 내주지 않았던 초기작 한정판도 있었다.
대체 저걸 어떻게 구했대. 겉 포장이 제거된 걸로 봤을 때 아무래도 친필 사인본 같은데. 무슨 거짓말 운운하더니, 역시 링테 작가의 친구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잖아.
“아슬란?”
나는 입가에 흐를 것 같은 침을 닦아 내며 그를 불렀다. 노력했지만 초기작 한정판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링테 대표작은 뭐 말할 것도 없는 명작이지만 초기작은 초기작대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매력이 있지.
본인은 별로 링테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잔뜩 작품을 쌓아 오다니. 아무래도 나 읽으라고 가져온 모양이다.
이런 상냥한 츤데레 같으니. 널 두고 현실 남매라고 한 거 취소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질식할 것 같아서 눈치 없는 척 헤헤하고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먹음직스런 먹이를 둔 채 조련당하는 개라도 된 기분이었다. 봐도 돼? 봐도 되지? 본다?
“아슬란? 저 책, 저 읽으라고 가져온 거죠? 동생을 이리도 생각해 주시다니 감격입니다.”
“…….”
“아슬란?”
“…….”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여.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순순히 책을 읽게 허락해주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멱살이라도 잡고 협박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너무 양아치였다.
하지만 난 이성을 잃기 직전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고문인지 모르겠다. 오아시스를 눈앞에 두고 그게 사실은 신기루라는 걸 알아챈 사막 유목민이라도 된 듯 비통해졌다.
나는 갈증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욕망에 눈이 뒤집혀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 뭐게요?”
아슬란의 새까만 유리구슬 같은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모든 걸 방관하던 킬리안의 시선 또한 내게 닿았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빵.”
“…….”
“…….”
음, 내가 들어도 방금 먹은 아침이 다 쏠릴 정도로군. 이거 오히려 역효과 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역효과의 순기능으로 더는 듣기 더러우니까 그냥 읽어라, 해 주지 않으려나?
다행히 아슬란은 내 비음 섞는 소리에 헛구역질하지 않았다.
“그만해.”
단호박보다 단호하게 끊어 냈을 뿐.
“네…….”
내가 내 죄를 알아 소금처럼 짜져 있자, 그가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없이 내가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던 책을 내밀었다.
진짜 츤데레 같잖아……. 반사적으로 책을 받아들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말없이 나가지 않을게요. 아슬란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산맥의 마물 때문에 편지도 늦게 도착해서.”
“그 산맥의 마물 때문에 편지도 제때 도착하지도 못할 영지에 네 발로 찾아간 것을 걱정한 거다.”
나는 일단 잘못했다며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애초에 여긴 왜 온 거지?”
그거야 샬럿과 레녹스의 목숨을 구해 주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서…… 라고 말할 수는 없지.
“그냥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일?”
아슬란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물었다. 세상 진지한 표정을 보니 방임주의를 표방하는 메르텐시아 공작처럼 대충 넘어가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 사소한 행동 하나에 방방 들뜨던 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마물을 토벌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콩깍지가 생기는 바람에 내가 이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착각 속에 빠졌지.
“마물을 토벌하려고요.”
그러자 아슬란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역시나 개뿔도 통하지 않을 변명이었나.
“안 그래도 카젠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대충 전해 듣기는 했다만, 대체 언제부터 그런 실력을 숨기고…….”
아슬란은 본인의 말허리를 자른 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그 얘기는 됐다. 네가 마물을 토벌하려고 왔다고 쳐. 대체 왜 우리 가문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카젠 영지인 거지? 그렇다고 네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산맥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토벌을 위해 나섰는데 왜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고 가지 않았지? 집사만 대동하고 마물 토벌을 하러 갔다고? 저 집사가 기사단과 맞먹는 대단한 실력자라도 되는 건가?”
어쩐 일인지 그가 아슬란어(語)를 사용하지 않고 제대로 문장을 구성해서 말했다. 못 본 사이에 화술 특강이라도 받고 오셨어요?
아슬란이 방언 터졌다. 그의 은밀한 취미에 관한 얘기를 할 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수줍어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다니, 반칙이다! 그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싸늘한 무표정으로 쏘아붙이니까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맞아요. 킬리안은 기사단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단한 실력자랍니다. 이 산맥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바로 그 ‘악의 주술사’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 아슬란의 눈이 명백한 의심을 담고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킬리안 쪽을 돌아보며 그의 단정한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 집사,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금시초문이군. 서류상에는 아무런 특기도 기재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킬리안의 위조 서류까지 확인했어?
“애초에 마법을 다룰 수 있는데 집사를 자처하다니, 여간 수상한 게 아니야.”
앗, 킬리안은 의심하지 마! 한 번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단 말이야! 숨소리조차 수상하다고!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서 몰래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제 집사는 치료 마법을 좀 쓸 줄 알긴 하지만 그뿐이랍니다. 집사로서는 아주 완벽하고 유능한데, 능력 면에서는 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어요. 병풍이나 다름없지요.”
“…….”
그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킬리안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러다 옆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왠지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을지 두려워져서 나는 애써 그쪽을 외면했다.
아슬란은 내 필사적인 변명에 납득했는지, 아니면 킬리안이 힘없는 병풍이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긴 건지 한숨을 내쉬며 재차 물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출이 아니라면 카젠으로 온 목적은 뭐지?”
아슬란은 타인을 위해 조건 없이 희생하는 아일라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사 수행뿐이었다.
“저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
아슬란은 나를 착잡하게 응시했다. 대체 얘를 어쩜 좋을까 하는 시선이었는데, 본인이 깊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타일렀다.
“아무리 그래도 대체 얼마나 무모한 거야……. 적어도 오래 저택을 비울지 모른다는 한마디 말이라도 해 줬으면 이렇게 걱정할 일은 없었을 거다.”
“아버지한테는 말하고 나갔는데.”
“……들은 기억 없어.”
“있잖아요,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통의 부재인 것 같아요.”
“…….”
“…….”
왠지 서로 할 말이 없어진 아슬란과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
* * *
발크 산맥 입구에 출입 금지 구역이라는 팻말이 사라졌다. 머피는 팻말이 원래 붙어 있던 자리를 신기하다는 듯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어릴 때부터 위험하다, 절대 가지 말라 세뇌를 당하던 장소였다. 마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전부터 산을 오르면 마물 한두 마리씩은 꼭 마주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꼭 산맥을 지나야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힘 있는 어른과 동행하거나 마을 내 용병을 고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마물에게 당해 다리를 다친 이후로 그조차도 요원해졌다. 그런 이유로 머피는 그녀의 오빠, 필립과 단둘이 산을 오르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생소했다.
“뭐하냐? 빨리 와.”
머피는 한참 입구 근처에서 미적거리다가 필립의 성화를 들어야만 했다.
“정말 괜찮아?”
“그렇다니까.”
원래 어린아이 통제 구역이었는데, 이제는 남매 둘이서 와도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산맥을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벌써 사람들이 잔뜩 있잖아. 좋은 약초를 따려면 아무래도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겠어.”
필립은 동생을 이끌고 더욱더 깊은 곳을 향해 들어갔다. 계속 불안해하던 머피는 아무리 숲을 파헤치고 헤쳐도 마물의 ‘마’ 자도 보이지 않자, 조금 안심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마물이 진짜로 다 사라졌나 봐.”
“마녀가 우리 마을을 구한 거래. 혼자서 마물 보스를 쓰러트렸다나 봐.”
“마녀가 왜?”
머피는 그렇게 물으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공주님에게 독이 든 사과를 건네거나, 영원히 잠들게 하는 마법을 거는 동화 속 마녀를 떠올렸다.
“마녀는 나쁘잖아.”
“그래도 우리한텐 영웅이지.”
“왜?”
“힘없는 공주나, 아름다운 공주를 구해 내서 어떻게 할 생각밖에 없는 왕자가 무슨 소용이야? 우리한테는 아무리 사악해도 강한 힘으로 마물을 없애 준 마녀 쪽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그 마녀가 무슨 생각으로 우리 좋을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말이야. 필립이 산을 타며 냉소적으로 빈정거리자, 머피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목적이 있든, 단순히 흥미 위주의 충동이든 상관없어. 마녀 덕분에 당장 굶어 죽지 않게 되었으니 발등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들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에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마물이 사라지고 사람의 출입이 허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좀만 깊이 들어와도 귀한 약초가 천지에 널려 있었다. 한동안 먹지 못해 푹 꺼져 있던 필립의 볼이 오래간만에 사랑스러운 볼우물을 만들어 냈다.
그는 퀭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오빠가 저번에 약초랑 개풀떼기 구분하는 법 가르쳐 줬지?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큰일 나니까, 꼭 나한테 먼저 보여 주고…… 내 말 듣고 있냐?”
필립이 멍하니 서 있는 머피의 볼을 사정없이 잡아 늘이자, 그녀는 우는 소리를 내다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 이상한 사람이 있어.”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소년인지 청년인지 경계가 모호한 은발의 남자였다. 그리고 까만 안대 같은 것으로 눈을 둘둘 감아 시야를 가린 채 허공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확실한 줄 알았는데…… 허탕이네. 그래도 상관없어. 돌아다니니까 좋다. 응, 여기 좋아. 예뻐, 그치? 이 정도 마력이면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겠지, 응. 기대된다…….”
게다가 활짝 웃으며 이상한 혼잣말까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필립의 표정이 단박에 썩어 들어갔다.
“가까이 가지 마. 엄마가 미친 사람은 상종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어린 동생을 재빨리 등 뒤로 감췄다.
그런데 예의 미친놈이 안대를 풀자, 빛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까지 눈꽃처럼 새하얘서 그런지 더욱 성스러워 보이는 외모였다.
“천사인가 봐.”
“상판은 말이지.”
머피가 입을 헤, 벌리다가 속삭이자 필립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넘어가기엔 저 남자가 중얼거린 혼잣말이 실로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