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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97화 (97/131)

# 97

악녀 메이커 97화

어딜 보나 수상해 보이는 미친놈을 상대하고 약초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지금 당장 뽑아 달라고 유혹하는 탐스러운 약초를 포기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몸값 비싼 귀하디귀한 약초. 덕분에 고민은 길어졌지만, 누구보다 이성적인 필립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머피, 돌아가자.”

얼굴만 번드르르한 저 남자와 엮이면 굉장히 피곤해지고, 그전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필립은 제 등 뒤에 숨긴 머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쩐지 손은 허전한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없어?’

그렇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씨……!”

필립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머피를 발견하고 잠시 뒷골을 붙잡았다. 이 얼빠진 꼬맹이, 마물은 그렇게 무서워했으면서 낯선 사람은 괜찮은 거냐?

“마물이든 인간이든 널 해치려 마음먹으면 결국 똑같은 것들이라고!”

필립은 잔소리를 뱉으며 달려가 재빨리 머피의 팔을 막무가내로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어어.’ 하고 끌려가면서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치만, 오빠 저것 봐.”

또 뭐. 하고 보자 남자의 손 위에 새까만 무언가가 둥둥 떠 있었다. 뚜렷한 형체 없이 일렁거리는 작고 검은 구체였는데, 눈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검은콩 같은 게 콕콕 박혀 있었다.

“자, 됐지? 이제 네가 안내해.”

남자는 구체를 향해 쾌활하게 말했다.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저것과 대화 중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법인가? 마법이란 게 저렇게 불길해 보이는 거였어? 필립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법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까.

그때, 머피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귀엽다…….”

“야, 귀여운 거 보여 준다고 정신없이 쫓아가면 안 돼!”

아이들이 좋아하는 예쁘장한 얼굴로 이상한 술수까지 부리다니. 필립은 은발의 남자를 배는 더 수상하게 여기며 어린 동생을 끌어안았다.

“좋을 말할 때 와라.”

필립이 동생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척 이를 갈며 머피의 귓가에 살벌한 협박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은발의 미소년, 바실리는 아까부터 계속 시끄럽게 구는 머피와 필립 쪽을 돌아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민간인…….’

바실리는 팔링게아의 날,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일 때문에 그의 주인인 린다에게 한차례 탈탈 털렸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임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을 테고, 조금 더 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허락된 외출에 진심으로 신이 났다. 비록 탐색, 추적 및 납치라는 명목이긴 붙긴 했지만, 암살 의뢰도 아닌데 맘대로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런 기약 없는 장기 임무였기 때문에 린다는 바실리가 매번 허탕을 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하루를 계속 되돌리는’ 존재가 탐이 나는 거겠지.

물론, 린다에게 자신만만하게 찾을 수 있다고 말한 주제에 입만 살았다는 타박을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실리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분명 그가 처음 ‘그’ 존재를 찾으러 밤의 거리를 나오자마자 수도 근처에서 불쾌한 기운을 느꼈고, 곧바로 그 흔적을 쫓아 추적했다. 그런데 수도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응……?”

도착해 보니 흔적이 끊긴 곳은 놀랍게도 수도 번화가의 한복판, 광장 분수대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수도 한 바퀴를 의미 없이 빙 돌았다는 뜻이었다.

바실리는 한 손에 꼬치를, 다른 한 손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담긴 가방을 쥐고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흔적을 쫓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계속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네.”

바실리는 물줄기가 연신 솟구치는 분수대를 올려보다가 꼬치에 꿰인 고기를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바실리는 평생 무엇 하나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도, 배울 의지도 없었다. 타고난 힘이 있어 자신의 감을 믿고 살아가도 딱히 아쉬울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바실리의 감은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하루가 계속 돌아가는 것은 바실리가 어떻게 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한 차원 다른 단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은 무슨 일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이 개입했어.’

주술이다.

어떻게 한 건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추적을 방해하는 종류의 주술인 듯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간을 뒤틀어 계속 같은 공간을 빙빙 돌게 하는…….

바실리는 이게 주술과 엮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말고 또 주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 땅에 존재한단 말이야?

‘린다한테 그런 말은 들어 본 적 없는데. 이 땅의 주술사는 거의 사라졌다고…….’

바실리는 평생을 린다만 바라보고 그의 말만 절대적으로 신뢰한 채 살아왔다. 그의 세계에서 린다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렇기에 바실리는 잠시 혼란을 느꼈지만, 이내 상념을 털어 냈다.

‘……제국 땅이 이렇게 넓은데 나처럼 신전을 피해 숨어 사는 주술사 한둘쯤 더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중요한 건 또 다른 주술사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이미 선수 쳤다는 것이다. 린다가 알게 된다면 아주 노발대발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조각의 위치를 알려 준다는 말도 없던 일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린다가 알기 전에 되찾아야 해.’

그렇게 바실리는 또 다른 주술사에 관한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열심히 수도를 뒤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일단, 그 주술사는 수도 전체에 걸쳐서 주술을 걸 수 있는 자였다. 그 말인즉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양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제 마력으로 그자의 위치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건 주변에 뭉쳐 있는 마력을 마음대로 흐트러트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주술사라고 해 봤자 주변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바실리는 이렇게 강력하면서도 섬세하게 주술을 다루는 건 처음 보았다. 만약 하루를 되돌리는 자와 주술사가 수도 밖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바실리는 영영 그들의 위치를 알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가 겨우 흔적의 꼬리를 잡아 도착한 곳이 바로 이 발크 산맥이었다.

바실리는 숲의 생명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찾아 안대를 풀었다. 그러자 숲의 생명력이 그의 마력과 반응하여 다시 마물의 핵이 탄생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핵의 초기 형태였지만, 이대로 몇 년이 지나 핵이 완전히 자라나면 이 산맥은 다시 마물로 뒤덮이게 될 터였다. 마물의 핵이 얌전히 산맥에서 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자, 됐지? 이제 네가 안내해.”

숲의 생명력을 먹고 쑥쑥 자라나야 할 핵의 초기 형태는 숲 밖을 벗어나면 힘없는 검은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바실리는 숲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핵을 향해 쾌활하게 웃으며 협박하듯 살기를 가득 흘려보냈다.

이제 고지가 코앞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주술사는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정면 돌파는 최대한 피해야 했다.

바실리는 그들의 위치를 파악한 뒤, 주술사가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 ‘하루를 되돌리는 자’를 몰래 납치해서 튀는 방향으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웬 부스러기 같은 아이들이 제 주변을 알짱거렸다.

‘사고 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목격자도 없고 어린애 한두 명쯤은?’

몰래 죽여 버려도 상관없지 않나?

바실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신의 조각을 먹고 불행이 사라지면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 거잖아. 이제 아무나 막 죽이면 안 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대를 다시 열심히 눈 위에 감았다. 그러자 머피가 필립의 품에서 바동거리다가 아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뜸 물었다.

“오빠는 그거 왜 해요?”

그러자 사고 회로가 어린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바실리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힘을 봉인해야 하니까.”

“왜요?”

“우음, 나랑 닿으면 죽으니까?”

“왜요?”

“나랑 있으면 불행해져서?”

“왜요?”

“몰라, 린다는 힘을 얻은 대가래.”

“왜…… 악!”

“조용히 해, 이 ‘왜’ 괴물아.”

필립은 생각 없이 사고만 치는 머피의 머리를 콱 쥐어박은 뒤, 다시 제 등 뒤에 숨기고 바실리를 보았다.

“힘…… 봉인……?”

그는 ‘뭐야.’ 하고 중얼거린 뒤에 살짝 안심하는 어투로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설마 싶었는데, 역시 형도 10대 중반이 되면 걸린다는 불치병에 걸리셨군요.”

“불치병?”

“저 아는 형도 걸렸어요. 왼손에 흑염룡이 봉인되어 있다나 뭐라나 하면서 붕대로 감고 다니는데, 그거 걸리면 약도 없대요. 얼른 현실을 직시하고 착실히 사세요.”

시큰둥하게 일갈한 필립은 그럼 이만, 하고 인사를 날리며 떠나갔다.

좀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동생의 막무가내 같은 질문에 착실히 대꾸해 주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게다가 아는 형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낯설고 수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필립이 머피를 질질 끌고 망설임 없이 멀어져 갔다. 안대 너머로 연신 눈만 깜빡이고 있던 바실리가 그들을 향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마물을 없앤 게 누구야?”

“아, 마녀요?”

“마녀?”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이름이 뭐라더라…… 아, 맞아.”

스쳐 지나가듯 들은 이름이지만 똑똑한 필립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일라 메르텐시아.”

마녀, 아일라.

바실리는 마물을 무찌른 영웅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마녀라고 불리는 그 이름을 기억에 새겼다.

* * *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멀미가 나든 말든 내내 책에 고개를 박으며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아슬란의 넘치는 배려로 마음의 양식을 쌓는 풍족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한계는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현재 마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수도도 아니고 길이 전혀 닦이지 않은 시골길이었으니까. 마차는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위아래 양옆으로 요동치고 있었고, 멀미를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장렬하게 패배했다.

“웩…….”

“미련하시긴.”

킬리안은 스스로 고통 받고 있는 내게서 억지로 책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본인의 무릎 위에 눕혔다.

“멀미 날 땐 얌전히 누워 계시지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딱딱한 허벅지 때문에 내가 끙끙거리며 뒤척이자 알아서 마차 내부에 갖춰져 있던 낮은 쿠션을 머리 뒤에 덧대 주었다.

킬리안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얼굴을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이 치워지자 한결 편해졌다.

나는 이 각도에서도 굴욕이 없는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하품을 뱉었다.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한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슬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내가 방금 뭘 본 것인가, 하는 노골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능숙해 보이는데. 네 집사는 보통…… 그런 식으로 시중을 드나?”

아슬란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역시 귀족의 개인 시중을 드는 다른 집사들은 이런 거 안 해 주는 모양이지? 그동안 이 세계의 다른 집사들을 볼 기회가 없어 그냥 다들 이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더니, 그의 행동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 둘이 설마 그런…….”

아니, 대놓고 우리 둘 사이를 의심 받고 있잖아?

물론, 킬리안과 나는 손도 잡고 끌어안기도 하고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고 할 거 다 한 사이라 억울할 것도 없긴 하지만! 아직 남들에게 들킬 각오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당황해서 그대로 사고가 굳어 버린 나는 아슬란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선수 쳐서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어머니가 계셨다면 이렇게 무릎베개를 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

“……하는 철없는 마음에 제가 먼저 집사에게 부탁한 거랍니다. 그만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군요.”

그러자, 어머니 소리를 들은 킬리안이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물론,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의심 받고 있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그렇군…… 미안하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군.”

아슬란은 내가 감성팔이를 하자,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이고 마음속으로 계속 그리워해 온 건 그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겠지.

‘흑흑, 패드립 죄송합니다.’

나는 죄책감에 고통받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짙은 미소를 짓고 있던 킬리안이 능숙하게 날 다시 눕히고 내 눈 위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으며 말했다.

“주무십시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가 상냥한 음성으로 내게 잠들기를 권했다. 물론 멀미가 날 땐 자는 게 최선이기는 한데, 그런데 목소리 왜 그렇게 낮아졌어요? 바닥을 긁고 있는데?

“아가씨께서 절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니 유감입니다. 다시 깨어나실 때 최선을 다해 믿음직스러운 집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테니, 푹 쉬어 두십시오.”

……네?

“부디 가시는 길 편안하시길.”

앞으로 긴 여정 때문에 많이 지치고 힘드시게 될 테니까요, 하고 그가 예언이라도 하듯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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