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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98화 (98/131)

# 98

악녀 메이커 98화

나는 갑자기 정신이 맑게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바닥 밑에서 눈을 말똥말똥 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오던 잠도 다 달아나 버린다고.

대체 저 말이 무슨 뜻인가. 아슬란이 우리 대화를 듣고 있어서 최대한 돌려 말하고 있는 거 같은데, 긴 여정 때문에 많이 지치고 힘들게 될 거라니? 신성력을 얻게 된 이후로 웬만해선 지치지 않는 내가 지치고 힘들 정도의 일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고자 내가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뱉었던 변명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약하고 아무런 능력 없는 병풍…… 어머니의 무릎베개…….

본의 아니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몰염치한 발언을 해 버렸지만, 그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고자 아무 말이나 해 댄 것뿐이라는 걸. 그리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아슬란의 의심을 단박에 잘라 버렸으니까.

그, 그렇지? 얼른 그렇다고 말해.

들릴 리 없는 마음의 소리로 박박 우겨 보았으나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나는 입술을 달싹여 사과의 말을 뱉었다. 그런데 킬리안이라면 내 입 모양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건만, 그는 갑자기 눈치가 실종된 척하며 물었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그가 내 사과를 모르는 척했다.

‘어라, 사과해도 소용없다는 거야?’

걱정을 가장한 음성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제대로 지뢰를 밟은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책을 좀 읽어 드릴까요?”

그때, 킬리안이 내 눈을 덮고 있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방금 그에게 느꼈던 공포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볕이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반짝 빛냈다.

“제 음성이 낮은 편이라 가만히 듣고 계시면 잠이 오실 겁니다.”

낮다고 다 잠 오는 건 아냐. 어린이 동화책을 읽어도 섹스어필로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재우려고 하는 건 그만둬.

“읽어 드릴 책은 이것뿐이지만요.”

그는 내가 아까까지 읽고 있던 링테 작가 책을 들어 보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어…….’

나는 처음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상황을 이해하고 순식간에 홀딱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직접 읽으면 멀미 때문에 괴로우니까 가만히 들을 수 있도록 직접 읽어 주겠다는 거잖아.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뭐야…… 착한 사람…….’

어쩌면 생각보다 그렇게 화가 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과를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인 걸지도? 나는 그 순간 킬리안의 느꼈던 까닭 모를 두려움을 한 번에 날려 버리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안 된다!”

……응?

그때, 창백하게 질린 아슬란이 발작하듯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마차 천장에 정수리를 쾅 박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프겠다. 나도 전에 저런 짓 했었는데. 나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에게 잠시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왜요?”

아슬란은 쓸데없는 체면 때문인지 정수리를 감싸 쥐지도 못하고 벽을 짚은 채 끙끙거리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물이 맺힌 눈동자를 이리저리 방황시키다가 필사적으로 더듬거렸다.

“나, 나는 싫어…….”

그러니까, 왜.

“부탁이니까…….”

부탁까지 할 정도야?

“뭐, 링테 작가 소설을 싫어하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친우분 소설인데 익숙해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무리 취향 존중이라지만 링테 작가 입장에서는 로맨스 소설 좋아하는 친구가 내 소설만 극도로 혐오하는 티를 팍팍 내면 섭섭하지 않을까.

읽으라고 강요한 것도, 귀담아들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경 소리 정도로 흘려들으면 되는데, 과민 반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걸.

그러자 왠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던 킬리안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계속 그런 태도로 일관하시면 아가씨 말씀대로 친우분께 상처가 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해 보심이 어떠신지.”

“…….”

“…….”

“……나갈래.”

그때, 아슬란이 갑자기 인형처럼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고양이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런 울음소리를 낸다는 말을 언뜻 들었는데……. 달리는 마차 안에서 나가긴 어디를 나가. 여기서 저택까지 걸어가게?

아슬란은 끝까지 반항했으나 킬리안은 온갖 감언이설을 술술 늘어놓은 뒤, 결국 링테의 소설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째 아슬란을 괴롭힐 의도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네 세계를 떠넘기지 마. 너와 같은 감정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마. 나는 서로를 이해하길 바란 것이지 네 일부가 되고자 한 게 아니니까.”

킬리안이 차분한 음성으로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읽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부들부들 떨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탄했다.

“하, 제발…….”

저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니 유감이긴 하지만, 나는 킬리안이 읽어 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으니까.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서로 키스를 할 때 즈음에, 아슬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 * *

결국, 끝까지 완독했다.

“이게 첫 작품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진짜 링테 작가는 천재라고요!”

“……첫 작품 말이지.”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아슬란이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링테 작가 첫 작품의 남자 주인공은 고양이처럼 도도한 척 가끔 빙구 같은 게 유난히 아슬란과 닮았다. 친구를 모델로 쓴 건가?

“사실 이쪽이 더 제 취향이거든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링테 작가의 글 같다고 할까? 아무래도 최신작으로 갈수록 좀 더 대중화된 느낌이라.”

“……그런 의식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나는 아슬란이 기어들어갈 듯 중얼거린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끝을 이었다.

“……라고 링테 작가가 말했다.”

갑자기 웬 문어체?

하늘이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 때쯤, 점점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어느새 완전히 멈췄다. 마차를 끌던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짧게 울렸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도록 하지.”

그러기가 무섭게 아슬란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툭 던져 놓고 마차를 빠르게 벗어났다.

카젠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센터만 해도 꼬박 보름은 말을 타고 달려야 한다…… 라고 말해주었던 비싈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올 땐 킬리안의 도움으로 하늘 위를 걸어왔는데, 갈 때는 아슬란이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그게 불가능해져서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여관에서 머물러야겠네. 어차피 킬리안이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듣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제대로 푹 쉬었다 가 볼까. 나는 별생각 없이 아슬란이 사라진 여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죠, 손님? 방은 1인실 한 개, 2인실 한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잠깐만, 로맨스 소설에 꼭 한 번쯤은 등장하는 이 익숙한 패턴은…….

여관 주인의 설명을 듣자 하니 발크 산맥에 마물이 사라지는 바람에 안팎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갑자기 숙박객이 늘어났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럴 법했다. 카젠 영지 사람들은 그동안 강제로 영지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고, 외부에서 물자를 나르던 상인들도 강제 출입 금지 상태였을 테니까.

나는 침착하게 대처했다.

“그렇다면 2인실을 오라버니와 세바스티안이 쓰면 되겠네요.”

“싫어.”

“네?”

“내가 1인실 쓸 거다.”

아슬란은 멋대로 돈을 전부 지불하면서 말했다. 반박할 틈도 없었다. 그는 찬바람을 쌩쌩 날리다 못해 스스로 얼음 왕국을 구축하더니 1인실 열쇠를 낚아채 그대로 사라졌다.

아니, 이런?

여관 주인은 ‘방금 뭐가 지나갔나?’ 하는 표정으로 사라진 아슬란 쪽을 응시하더니 어깨를 으쓱이곤 내 손에 2인실 열쇠를 떨어트렸다.

“다른 여관…….”

“사정은 다 비슷할걸요? 마물이 사라진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정되었던 일이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예정된 일이었어? 아니, 난 모르지. 이쪽 세계 사정 같은 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이미 벌어지고 나서야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하고 한 박자 늦게 깨닫는 게 최선이라니까.

하지만 킬리안은 알고 있었겠지. 그는 멍하니 굳어진 내 손 위에 열쇠를 자연스럽게 가져가더니 가볍게 흔들어 보이곤 입매를 비틀었다.

“그럼 가실까요?”

“…….”

세상에, 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 좀 봐. 마차 안에서 보여 줬던 다정함과 상냥함은 다 어디에 버린 거야?

사실 이건 고전 소설 뺨치는 엄청난 우연성이 아니라 킬리안의 계획 일부가 아니었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마차에서 잘래.”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방음이 전혀 안 될 텐데요.”

아니, 방음은 왜 찾습니까?

“나 혼자 잘 건데…….”

“그건 안 됩니다. 위험하니까요.”

나는 그 말에 후드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근처에 의뢰가 있었는지 험악한 말투를 사용하는 용병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어째 다들 질이 나빠 보였다.

음…….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지만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은 나를 기분 나쁘게 흘끔대는 게 여기 치안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

망설이고 있을 때, 킬리안이 말했다.

“제가 곁에서 재워 드리지요. 아가씨께서 그리는 어머니의 품이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포근하게.”

“…….”

그 말,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나는 내 말을 우려먹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함께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지은 죄가 있기도 했고, 킬리안은 내가 어딜 간다고 해도 쫓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에서 겨우 한 발짝 들였을 때였다.

찰칵―

앞서 방에 들어온 그는 내 등 너머로 손을 짚어 문을 닫은 뒤, 그대로 양팔 사이에 날 가둬 버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병풍?”

역시 화난 게 맞잖아!

나는 먹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몸을 칭칭 감아 숨통을 조인 뒤 한입에 집어삼키는 보아뱀의 환상을 보았다.

“……실언했습니다.”

“내가 많은 걸 방관한 건 사실이지. 나름 너를 위한 행동이었다만, 그렇게 느꼈다면 더욱 힘을 내야겠군.”

“제, 제국 파멸 반대…….”

“그런 과격한 방법은 쓰지 않아.”

나는 약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데?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악의 주술사님. 뒤끝 작렬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용서해 줄 건데요?”

그래도 어쨌든 내가 잘못이니까. 한숨을 내쉰 뒤에 체념한 표정으로 묻자, 킬리안이 양옆으로 짚고 있던 손을 순순히 떼어 냈다. 그리고 내 볼을 손가락으로 닿을 듯 말듯 쓸면서 속삭였다.

“아일라.”

감미로운 그의 음성이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나는 간지러운 손길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지.”

“……그렇죠.”

“신의 계시가 아님에도 네가 알고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을 알고 있는 이유를 내게 말할 생각 없을 테고…… 나는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캐묻지 않아.”

하지만 킬리안은 일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 거짓말이 쌓이는 만큼,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닿는 만큼 뒷감당은 내가 해야 할 거라고.

그리고 그건 킬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악의 주술사라는 것 외에 아무런 진실도 밝히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캐묻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평화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이며, 어차피 비밀에 대한 뒷감당은 서로의 몫일 테니까.

“그럼, 내가 네게 바라는 게 뭘까?”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내게 이미 간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었다.

―내가 있는 곳까지 타락해 줘.

킬리안은 피식 웃더니 나를 그 자리에 놔둔 채 등을 돌렸다. 나는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 침대 위에 걸터앉는 일련의 과정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는 내게 뭘 바라지?”

아마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가 나 때문에 망가졌으면.

나 없이는 못살게.

그 일로 나를 증오하게 된다고 해도 결국 용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 원하는 걸 하는데 용서를 구하지는 않잖아.”

그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리 와. 벌 받는 것처럼 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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