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악녀 메이커 99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관계는 진짜 이상했다. 나에겐 킬리안이 소중한 존재여서 그만을 원했고, 그 또한 내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 서로를 연인이 아닌 충동이라 정의 내리는 사이라니. 대체 뭐야, 이게.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배덕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을 때, 침대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킬리안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까 핏기 없는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는 입술 모양도 예쁘다. 웃지 않아도 입술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가 있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히 도톰한…….
“항상 생각하는 건데…….”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인 뒤, 그에게 한 발짝씩 다가가며 말했다.
“킬리안과 있으면 자꾸 제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거 같아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렇게 말하자 그가 답했다.
“유감이군. 나는 너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항상 최악을 달리고 있는데.”
최악이라니. 최악의 주술사에게 엄청나게 심한 말을 들어 버렸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는 다가오는 내게 손을 뻗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렸던 오디세우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냥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침대 위에 기대앉은 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킬리안은 허공에 방황하는 내 손을 자신의 목 뒤에 두르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나는 도톰해 보이는 그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난스럽게 빨갛고 탐스럽기에 과즙이라도 터질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나. 내 송곳니에 찔린 그의 입술을 혀로 훑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킬리안은 그의 위에 올라탄 나를 짙어진 눈으로 올려다보더니 맞닿은 입술 새로 속삭였다.
“전에도 깨물더니.”
몰랐는데 킬리안을 만난 뒤 처음으로 알았다. 내게 흥분하면 깨무는 버릇이 있다는 거…….
“지금 네 표정 어떤 줄 알아?”
“당신 표정은 어떤지 알겠는데.”
“어떤데?”
온몸이 지끈거릴 정도로 야한데요.
나는 몽롱하게 풀린 눈빛으로 킬리안을 내려다보다가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망설임 없이 그의 안쪽을 파고들자 그는 순순히 내 침입을 받아들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휘어 감겼다. 뒤통수를 그러쥔 그가 뜨거운 입술로 모조리 덮고 삼켰다.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댄 건 나였지만 주도권이 넘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뜨거운 덩어리가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애태우듯 훑다가도 집요하게 내부를 휘저었다. 그러자 갈증이 일었던 입안이 단숨에 축축한 숨결로 젖어 들었다.
“읏!”
그때, 갑자기 뒷머리가 팽팽하게 당겼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던 그의 손이 꽉 주먹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코끝으로 작게 신음을 흘리자 금세 힘은 풀렸지만, 그의 매끈한 눈썹이 뭔가를 참는 듯 일그러졌다.
“하아…….”
킬리안은 나른한 숨을 뱉으며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유독 피부가 투명해서 그런지 그의 목덜미에 핏줄이 불거졌다가 사라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어렵네.”
그가 중얼거렸다.
이미 능숙하게 잘하면서 어렵다는 말을 담는 그를 의아하게 마주 보며 물기 어린 눈을 깜빡였다. 그가 어렵다고 하는 게 단순히 키스만은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쾌감에 흐려진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그러자 그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다시 다급하게 입술을 붙여 왔다.
가능한 데까지 모조리 들쑤시는 침입자 때문에 턱이 뻐근해질 정도로 벌어졌다. 미처 삼키지 못해 흐르는 타액마저 그는 남김없이 핥아 올렸다.
킬리안은 나를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으며 품에 가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맡았던 위험한 냄새가 다시금 자욱하게 풍겼다. 위압감에 짓눌릴 듯하고,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친 피식자가 된 듯했던 그때의 충격이 새삼스레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맞닿은 하체 아래로 단단하고 포악한 열기가 느껴졌다. 등골부터 발끝까지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에 입안 깊숙이 찔러 오는 그의 혀를 반사적으로 빨아들였다. 그러자 그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천장이 보였다.
“그만…… 그만 자극해. 안 그래도 미칠 거 같으니까.”
내 위에 올라탄 킬리안이 머리 양옆으로 팔을 짚으며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그냥 미쳐 버리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내가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참 숨을 헐떡이다가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야 물었다.
“처음…… 이죠?”
“그래.”
처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 킬리안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딱히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지? 아무나 상관없이 자고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멋지잖아.
하지만 최소 500년간 키스도 안 해 봤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왜 그가 최고의 주술사가 됐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른 살 넘도록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던데 500살이라니. 이건 마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수준의…….
“악!”
그때, 킬리안이 손가락으로 내 코를 가볍게 튕겼다. 나는 얼얼한 코를 움켜쥐며 억울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때려!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
저 억겁의 통찰력.
나는 그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하다가 잠시 한 가지 의문이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왜 억겁이지?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수천 억 년을 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킬리안은 정확히 몇 살이에요?”
“딱히 안 세 봤는데. 600살 아래겠지.”
“진짜 성의 없는 나이네요.”
본인 생일은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운 대답이었다.
나는 그가 수천 억 살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잠시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유혹도 많이 받아 봤을 거 같은데.”
아무리 그가 악의 주술사니 뭐니 해도 어떻게 저렇게 생긴 남자를, 그것도 가만히 숨만 쉬어도 색기가 풀풀 풍기는 남자를 가만히 놔둘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와 같은 주술사라면 불행도 안 통하겠다, 나 같은 얼빠가 막무가내로 들이댄 적이 없을 리가 없는데.
“자고 일어났는데 옆에 처음 보는 여자가 누워서 ‘자기, 일어났어?’ 하고 품속을 파고든 경험, 솔직히 있죠?”
그러자 그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천국으로 보내 달라기에 원하는 곳을 보여 주긴 했지. 아마도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겠지만.”
“……죽였어요?”
“철없을 때 얘기야.”
그래서 죽였다는 거야, 안 죽였다는 거야. 나는 과거의 언젠가 킬리안을 유혹했던 사람을 질투해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명복을 빌어 줘야 할 때로군. 어쩐지 숙연해졌다.
사실 킬리안은 500년간 성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성욕을 느낄 새도 없이 다른 식으로 이미 욕구를 충족시켰기에 이성에 별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넌 능숙해 보이던데.”
“…….”
화살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경험이 꽤 되는 모양이지?”
“아뇨 이쪽은 전혀…….”
“전혀?”
전혀 일 리가? 하는 어투였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사실 먼저 물은 건 나였다. 나는 잠시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우물쭈물하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하, 한 번…….”
멋모르던 20대 초반에 아무런 준비나 지식도 없이 한 번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아프고 쓰라렸던 기억밖에 없어서 트라우마 비슷한 게 생겼던 걸까,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해 봤다.
“흠, 네 영혼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하니 누군지 물어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킬리안은 잠시 눈에 이채를 띠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전남친은 지구에 존재해서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앞으로 평생 지구에 감사하고 환경 보호에 힘쓰며 살아가길 바란다, 이 핵폐기물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킬리안이 내 손을 입에 넣고 잘근 깨물다가 내가 손가락 끝을 움찔거리자 혀로 살살 굴렸다.
서로의 시선이 뒤얽혔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매혹적인 달빛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질척한 소리가 침묵만 내려앉은 어둠 속을 간간이 울렸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눈가를 살짝 일그러트리자 그가 젖은 음성으로 내게 속삭였다.
“그래서…….”
“…….”
“이번에도 가르쳐 줄 건가?”
아니, 딱 한 번 경험이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경력이라고. 마음 같아선 능수능란하게 그를 이끌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방법이 없네.
“서로 터득해야겠죠?”
“그럼 처음부터 나로 물들이던가.”
“…….”
“많이 거칠지도 모르지만.”
자제하기 힘들어서, 하고 그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타고 남은 재를 닮았던 그의 잿빛은 불꽃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흥분인지 광기인지 모를 짙은 욕구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내 입안으로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나로 물들여지는 게 아니라?”
우리는 서로가 서로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길 바랐다. 한쪽은 신을 증오하고, 한쪽은 신과 연관되어 있기에 그렇게밖에 성립될 수밖에 없는 관계니까.
네가 망가지거나, 내가 망가지거나.
내 세계를 품어 줘. 억지로 삼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 철저하게 내 일부가 되어 줘.
시간을 거듭하고 욕심이 쌓일수록 그런 음습하고 질척한 감정들이 난무하는 그런 관계.
내 말에 킬리안은 한쪽 입술을 삐딱하게 끌어 올렸다.
“해 보던가.”
그는 배부른 짐승처럼 웃더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여린 살갗을 혀로 긁어내리는 감각에, 나는 얼굴을 간질이는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한가득 그러쥐었다.
열락에 들뜬 밤이었다.
* * *
여동생과 그녀의 집사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아슬란은 매우 화가 났다. 토라진 게 아니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씩씩거리며 쿵짝이 잘 맞는 둘이 지지고 볶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생각에 둘을 2인실을 밀어 넣고 뒤늦게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됐다. 아일라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결국 자신이 링테 작가라는 것을 숨기고 얼버무린 아슬란 본인의 자업자득이었으니까.
그는 여관방이 들어온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무리 여동생과 시종일관 붙어있는 집사라지만 외간 남자와 같은 방을 쓰게 하다니. 하지만 이 여관, 치안이 안 좋아 보였으니까 1인실에 홀로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잠깐, 그 집사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대체 뭘 믿고 맡겨?
집사 세바스티안의 이력은 대대로 집사를 배출한 집안에서 정석대로 탄탄대로를 밟아 온 엘리트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등 교육을 배웠고 똑똑하다 해서 제정신 박혔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한번 불안의 씨를 품자, 그것은 싹을 틔워 꽃을 피웠다. 그게 아슬란이 아일라와 집사가 묵게 된 2인실 방문을 두들기게 된 배경이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일라?”
너무 쥐 죽은 듯이 조용한데.
잠시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망설이던 아슬란은 결국 각오를 다시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안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아공간(亞空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