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악녀 메이커 100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자가 치유 능력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지 저주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일단 아일라의 몸으로는 첫 경험인데 몸살 난 것처럼 삭신도 쑤시지 않고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건 감사했다.
그런데 새벽까지 시달린 건 전혀 괜찮지 못했다. 자가 치유도 피곤한 건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더 괴로웠다. 몸은 최상의 상태로 되돌려 주면서 피로는 착실히 쌓이다니. 각성제를 다량으로 삼킨 기분이었다.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난장판…….’
온갖 잡동사니들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대체 왜 방 안이 이 모양 이 꼴인가. 허리를 굽혀 테이블 밑에 떨어진 촛대를 줍자 찰나의 장면, 장면들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어젯밤. 날 번쩍 안아 든 킬리안이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손으로 다 바닥으로 쓸어 버리고 그 위에 날 눕혔던 장면. 날 가둔 그의 양쪽 팔뚝과 날개 뼈를 거치며 기어 다니던 뱀의 비늘이 근육을 따라 꿈틀거렸던 장면.
킬리안이 거친 숨을 쏟아내며 겹쳐오는 입술을 참지 못하고 물어뜯은 기억, 그가 입으로는 괜찮아, 어르고 달래면서 그 밑에선 엉망진창으로 휘둘렸던 기억. 쾌락만을 정신없이 따라가기 급급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그만하라고 매달리며 애원했던 기억…….
‘처음이라며…….’
처음부터 이렇게 난잡하게 놀아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관방 곳곳에 서로를 거침없이 탐했던 지난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디를 봐도 시야 끝에서 계속 아른거리는 기억을 털어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푹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다가온 강인한 팔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나는 화들짝 놀라 킬리안을 올려다보다가 그가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흠…….”
그는 손가락을 그대로 미끄러트려 내 쇄골과 목덜미 언저리를 길게 쓸어 올렸다.
“이건 상처에 해당되지 않는 건가?”
나는 킬리안이 더듬는 흔적을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가 여린 피부 위에 집요하게 새겼던 자국들이 곳곳에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니, 뭘 이렇게 남겨 놨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기겁했다. 이래서야 돌아가는 내내 후드도 벗지 못하게 생겼잖아. 겨울이라 딱히 상관없기는 하지만.
“예쁘네.”
예쁘긴 뭐가 예뻐. 어쩌다 아슬란이 보기라도 하면 기겁을 할 텐데.
나는 킬리안을 흘겨보다가 단추가 풀린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의 상체가 만만찮게 얼룩덜룩한 것을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내가 지금 그한테 짐승이라 할 처지가 아니었잖아…….
‘그런데 키스 마크도 멍의 일종 아닌가? 왜 신성력으로 사라지지 않지?’
나는 뒷목을 긁적이다가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 작게 하품을 했다.
“좀 잘래?”
“새벽에 그렇게 말하고 또 했잖아요.”
“네가 자꾸 품속을 파고들었잖아.”
“먼저 입 맞춘 건 킬리안이잖아요.”
“먼저 더듬은 건 넌데.”
“아니, 두피도 더듬는 걸로 쳐요?”
“네가 어딜 만지든 민감해지니까.”
“…….”
됐어. 이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자.
나는 옷을 챙겨 입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열심히 다듬은 뒤에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문 바로 옆 벽에 기대선 누군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슬란이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길래 무슨 마네킹이라도 세워 놓은 줄 알았네. 서서 자는 나무 레녹스라도 따라 하는 줄 알았다.
“……여기서 뭐 해요?”
내가 살짝 황당함을 담고 묻자, 그는 나를 퀭하고 그늘이 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밤을 꼴딱 센 것 같은 몰골인데.
아슬란이 대체 언제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새벽 즈음부터 서 있었다면 방 안쪽에서 난 소리가 다 들리지 않았을까?
‘뭐야, 설마 진짜 들었어?’
나는 황당함을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이며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젯밤에 이어 여전히 얼음 왕국의 왕자님 같은 아슬란이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오밀조밀한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은 건가?”
왠지 뜨끔해졌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죠?”
신성력 버프를 받은 나는 잠을 설친 것을 제외하곤 적어도 겉보기에 멀쩡했다. 아슬란은 내게 별일 없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 치료 마법 외에는 아무런 능력 없는 병풍이라고 하지 않았나?”
킬리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띄우다가 킬리안을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어서 해명하지 못할까.
“아.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그러자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굉장히 유감이라는 어투였다.
“방문과 아공간을 연결해 두었습니다. 도련님께서 이 방을 찾으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제 실책입니다.”
아공간? 그게 뭔데?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그게 판타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마법의 일종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마법사들이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도라×몽의 4차원 주머니처럼 사용하는 거 말이지?
“비록 저는 능력 면에서 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으니 병풍과 다름없습니다만…….”
사설이 길다. 뒤끝도 길었다.
“아공간을 소환하는 마법 정도는 배워 뒀습니다.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말이지요.”
어제보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킬리안은 관대하게 웃으며 아슬란에게 상냥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왠지 그가 말하는 ‘침입자’라는 단어 속에 아슬란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문과 아공간을 연결해 뒀다는 건 결국 다른 차원과 연결해 뒀다는 거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는 않았다는 건가.
‘대체 언제부터 그런 준비를…….’
나는 병풍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그의 손아귀에 제대로 걸려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났으니까.
“같이 아침 식사하실래요?”
“……아니, 잘 거다.”
아슬란은 보이는 대로 잠을 설친 모양인지 뻑뻑한 눈을 꾹꾹 누르다가 몸을 일으키며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붙잡을 새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
‘음?’
그래서 대체 뭐하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물론, 갑자기 동생이 머문 방이 다른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면 걱정이 되긴 하겠지만 애초에 내 방문을 연 이유가 뭔데?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본인이 먼저 1인실을 차지한 뒤에 냉정하게 떠나 놓고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아슬란 속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킬리안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 * *
다시 수도로 향하는 지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밤이 되면 여관에서 묵고, 다시 마차를 타고 달리다가 밤이 되면 여관.
나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계속 하품을 해 대다가 결국 킬리안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잘 때는 분명 어깨였는데 깨어 보니 그의 무릎 위에서였다. 멍하니 누워 있다가 부스스 몸을 일으킨 나는 쭉 기지개를 켜며 흐린 눈을 비볐다.
턱을 괸 채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슬란이 중얼거렸다.
“다 왔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슬란의 말대로 텔레포트 센터가 코앞이었다. 드디어!
하지만 불행히도 내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아슬란이 텔레포트 센터를 이용해 수도로 이동한 뒤, 내 차례가 됐을 때 킬리안의 주술로 일시적으로 텔레포트 마법에 오류를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센터에 비치된 통신기로 아슬란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킬리안과 함께 주술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엄청나게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을 겪게 되어버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 나도 편하게 가고 싶다.’
속으로 투덜대다가 센터 앞에서 내렸다.
시골에 있어서 그런지 이곳 텔레포트 센터는 규모도 작고 사람도 별로 없어 한산했다. 대체로 돈 많은 귀족이 이용하는 곳이라 나름 꾸미려고 한 것 같긴 하지만 오래되어 낡았고 건물 곳곳에 칠이 벗겨져 있었다.
이 정도의 시설이면 앞서 간 아슬란에게 포탈이 고장 났다고 해도 납득하겠는걸. 나는 접수처에서 아슬란과 함께 가문의 패와 신분증을 건넨 뒤 얌전히 기다렸다.
포탈은 한 번 이동할 때 한 명씩만 이용하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 명은 100퍼센트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에 반해 두 명 이상부터 변수를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아주 극단적인 예지만 아주 희박한 확률로 머리 따로 몸 따로 이동될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고.
‘호러블…….’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기다리면서 멍하니 있는데 아슬란이 차례가 됐는지 먼저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곧 따라갈게요.”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말만 그랬을 뿐 우리는 이대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지만.
아슬란이 접수원의 안내를 받아 포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차례인 척, 포털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할 킬리안이 그 뒤를 쫓았다.
늘 붙어 다니던 두 남자가 나란히 사라지고 나자 적막한 건물 안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이거 진짜 간만에 혼자만의 여유 아닌가.
친구 없다고 개똥벌레 노래를 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슬프게도 여전히 친구는 없는 것 같지만, 전보다 주변에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킬리안 덕분이지. 아일라가 된 이후로 사회성이라는 걸 포기한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줬으니.
상념에 잠긴 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노곤해져서 나른한 한숨을 뱉어내려다가 전혀 다른 의문사를 터트렸다.
“엥?”
뭔가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이 내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넋을 놓고 있느라 알아차리는 게 늦은 것이다.
아니 이게 뭐야.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쿡 찔러 보았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보던 형체인데.
“카피 퍼펫……?”
나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사람 덩치만 했던 내 기억보다 훨씬 작아지긴 했지만 왠지 카피 퍼펫일 것 같았다. 만약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마물이란 건 확실했다.
왜 마물이 산맥 밖에 있어?
나는 분명 핵을 깨트려 버렸을 텐데 왜 이게 아직도 멀쩡하게 움직이는지, 살아있는지, 왜 지금 여기 있는 것인지 의아해 하고 있는데…….
“……귀여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만화에서 마스코트로 나왔다가 인기를 끌게 되어 캐릭터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릴 것같이 생겼잖아. 뭐지. 왜 마물이 귀엽고 난리지.
“끼우.”
“윽.”
울음소리가 ‘뀨’인 거 실화냐.
나는 귀여움으로 폭행당한 심장을 잠시 움켜쥐었다. 발크 산맥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최종 보스보다 내게 더 효과적인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타 징그러운 마물들은 사정없이 베어 넘겼으면서 좀 귀엽다고 번뇌에 휩싸인 간사한 인간 같으니.
나는 겉모습에 쉽게 현혹되는 어처구니없는 자신에게 잠시 3초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3초가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마물을 졸졸 쫓아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공에 떠 있는 마물을 손안에 가둬 보았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는데 당연히 흩어질 줄 알았더니 손에 꼭 쥐어졌다.
그것은 솜처럼 푹신푹신하고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촉감이었다. 대체 이 잔망스럽고 폭력적인 생명체는 뭐란 말인가. 이 정도면 마물이라 해도 감안하고 키울 수 있을지도.
내가 꾹꾹 누를 때마다 깜찍한 울음소리를 터트린 마물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날 약 올리듯 손가락 사이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뭐야, 시간차 농락이었어?
나는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린 마물을 내려다보며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 앞에 검은 붕대로 눈을 칭칭 감은 은발 머리의 남자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혼자가 됐네.”
얜 또 뭐야.
남자…… 라기보다는 소년인가? 많이 쳐줘도 10대 후반일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 보여도 인기척 없기가 킬리안이라 그가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범한 인물은 아닌 건가?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다가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검이 꽂혀 있는 허리춤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누구세요?”
“응? 별거 아냐.”
대뜸 반말을 찍, 하고 뱉은 소년은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더니 망설임 없이 물어뜯어 피를 내는 것 아닌가. 잠깐만, 나 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는 황금색 식을 허공 위에 그려 낸 뒤에 붕대를 푸르고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확인차 널 한번 죽여 보려고.”
“꺄아악!”
“응? 아냐, 겁먹지 마. 넌 하루를 돌릴 줄 아니까 아마 안 죽을걸.”
나를 죽이려고 들었던 놈이 내가 비명을 지르자 갑자기 당황해서 날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일라가 된 이후로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 온 내가 고작 살해 협박 한번 들었다고 비명을 지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놈이 주술사라면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란 걸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
“너 팔…….”
그제야 소년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 자신의 손, 아니 손이 있었던 위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띠용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내 팔 어디 갔어?”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는 본인 신체 부위가 잘렸는데 반응 참 얼빠졌다 생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왠지 속이 메슥거렸다.
“눈치가 없는 모양이야. 분명 꾸준히 경고했을 텐데…….”
그때 그런 소년의 등 뒤로 킬리안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는 물고 있던 장갑을 바닥에 떨어트려 버린 뒤 새로운 장갑을 끼며 말했다.
“남의 걸 넘보면 손모가지가 잘려도 할 말이 없는 거란다,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