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악녀 메이커 102화
킬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였지만, 잔잔히 들끓는 기세로 봤을 때 그냥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바실리가 날 죽이려고 하긴 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라는 건가.
이 세상 혼자 사는 무법자 같았던 킬리안도 결국 주술사들의 왕이 맞는 모양이었다. 주술사들은 아무래도 제국, 아니 대륙 어느 곳에서든 철저하게 배척받고 있으니까 그들끼리의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있겠지.
“우리 쪽? 키워?”
하지만 역시나 바실리는 우려했던 대로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킬리안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지 잠시 막막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로툴로는 알고 있나?”
“그게 뭔데?”
“그래, 기대하지도 않았지.”
킬리안은 이제 대충 감이 잡히는지 바실리가 알아들을 법한 말로 정정해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널 개처럼 키운 인간의 이름.”
킬리안을 만질 생각에 온몸을 들썩이며 방방 뛰고 있던 바실리는 그 말에 몸을 움찔, 굳혔다. 그는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건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좀 만지는 조건으로 그것까지 묻는 건 수지 산타에 안 맞잖아.”
“수지 타산이겠지.”
여전히 바보였지만.
성장 과정이 평범하지 않아서 그런지 지식수준이나 사용하는 단어들의 기준도 완전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뜬금없이 산타를 찾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몇 살이 뭔지도 모르면서 용케도 그런 어려운 단어는 알고 있네.”
“린다가 자주 쓰는 말이었으니까.”
“린다?”
“아…….”
진짜 바보다.
이런 말장난 같은 유도 신문에 넘어가다니, 굳이 킬리안의 능력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잖아. 아니면 그만큼 세상 경험이 없어서 순진한 건지.
‘이 정도라면 본인을 다섯 살이라고 소개할 법도 하네…….’
나는 아주 가볍게 튀어나온 암흑가, ‘밤의 거리’의 주인의 이름을 듣고 잠시 심란해졌다. 킬리안도 내가 카지노 호텔 사건 때 대충 설명해 줘서 린다가 누군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킬리안은 쭈그려 앉아 있는 바실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그를 죽이면 네 일에 지장이 있나?”
“음, 아직 곤란하긴 하죠.”
나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지금으로썬 아일라를 대신해서 모든 악역을 도맡아 줄 만한 게 암흑가밖에 없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방패막이 삼을 만한 세력이 필요했다.
‘샬럿과 베르너가 이어진다면 린다가 죽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때, 보석처럼 반짝 빛나기만 하던 바실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죽여? 누구를? 설마 린다를?”
이런 말은 금방 알아듣네. 날 보자마자 죽이네 마네 하더니 아무래도 그쪽 일에는 익숙한 듯했다.
독방에서 갇혀 지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 했는데, 암흑가의 주인 손에서 살인 병기처럼 키워진 경우인가. 솔직히 닿기만 하면 주변에 불행을 몰고 오는 주술사를 참작하고 키울 이유가 그것 외에 더 있나?
“안 죽여.”
지금 당장은.
뒷말을 삼킨 말에 바실리는 순식간에 살기를 지워 내고 다시 얌전해졌다.
암흑가의 주인이 세뇌한 건지 충성심이 깊어 보인다. 역시 자기가 당한 게 학대라는 자각도 없는 건가.
나는 바실리에게 물었다.
“날 죽이라고 시킨 게 린다야?”
“……죽이라고 하진 않았어.”
“그럼? 데려오라고 했어?”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이쪽이 정답인 모양이군. 암흑가의 주인이 굳이 나를 데려오라고 시킨 이유야, 뭐. 아마 내가 짐작한 대로겠지.
전에도 말했다시피 암흑가는 소설에서 악의 본거지처럼 묘사한 것치고 별다른 설정을 짜지 않았다. 집필 당시 나는 샬럿과 그녀의 어장 외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니까. 내가 주술이라는 것을 단순히 악녀를 처리하기 위해 설정한 것처럼, 암흑가도 주인공들에게 위기를 주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것에 불과했다.
‘……잠깐만.’
왠지 루프를 자각하는 기준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린다도 하루가 돌아가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네가 말해 줘서 안 거니? 아니면 스스로 알아챈 거니?”
그런데 내가 깊이 파고들려고 하자 바실리는 괜히 바닥에 풀을 쥐어뜯으며 시선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바실리는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었다.
“어……?”
어, 어떻게, 하고 더듬거리는 바실리를 향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화할 땐 상대방을 쳐다봐야지.”
“으응…….”
바실리는 넋 놓은 채 대꾸하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 겪은 게 현실인 건지 확인해 보려는 움직임에 나는 매정하게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애가 닳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질문을 받았으면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 대답해 줘야 해.”
바실리는 우물쭈물하다가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나름 합리화를 한 건지 순순히 답을 들려주었다.
“……하루가 돌아가는 거, 내가 말하기 전부터 린다도 알고 있었어.”
역시 그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한 루프를 자각한 건 킬리안, 바실리, 그리고 린다.
그들의 공통점은 엑스트라도 되지 못할 수준으로 소설 내에 비중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대사 한 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작가인 내가 자세한 설정을 따로 짜 놓지 않을 정도로 대강 만들었지만, 그에 비하면 소설 내에서 역할은 꽤 컸다.
‘악역으로 말이지.’
주술은 아일라를 악녀로서 돋보이게 했고, 암흑가는 말하자면 악의 축 중에서 최종 보스인 격이었다.
이들이 루프를 자각한 이유는…….
‘……전혀 모르겠군.’
악역이 내게 다 몰려들게 하려고? 아일라가 소설에서 가장 비중이 큰 악역이니까 루프로 이 세상의 악역들아 여기 여기 붙어라, 하는 거냐.
속으로 황망해 하고 있을 때, 주변을 알짱거리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던 바실리가 물었다.
“너도 주술사야?”
“아니.”
“그럼 대체 뭔데?”
그냥 마력이 안 통한단다. 하지만 네게 신의 기운 어쩌고 하는 것들을 열심히 설명해 봤자 알아듣겠니.
나는 열 마디를 하는 대신 말없이 오른손 손바닥을 쭉 펴서 바실리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화들짝 놀라더니 내 손바닥 위에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겹쳤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응, 전혀.”
바실리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고 꾹 움켜쥐었다. 어려도 남자라는 건지 훌쩍 큰 키만큼이나 내 손을 덮고도 남았다.
‘이게 손이야, 사포야.’
물론, 나는 다른 이유로 놀랐다. 고운 얼굴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거칠기 짝이 없는 손바닥 때문에. 바실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 왔는지, 그의 삶이 아주 노골적으로 녹아 있는 손이었다.
“따뜻해…….”
그는 태어나 온기를 처음 느껴 본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흔들리는 눈빛을 따라 일렁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경이로운 빛을 담고 반짝거렸다.
“부드러워. 부러질 것 같아.”
그건 네가 전혀 힘 조절 안 하고 으스러질 듯이 꽉 쥐었으니까 그렇지, 이 자식아. 내가 신성력 없는 일반인이었으면 벌써 손가락 부러졌다.
아파서 뭐라고 한 소리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킬리안이 서로 맞잡은 나와 바실리의 손을 떼어 내며 상냥한 음성으로 물었다.
“팔, 다시 잘라 줄까?”
“…….”
너무 상냥해서 지릴 뻔.
나는 손을 얌전히 거둬 냈다. 정황상 바실리가 날 다치게 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어째 그것보다 손을 잡은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이는걸.
사실 킬리안이 이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감정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때까지만 해도 영문을 몰라 왜 저러지 싶었지만, 이제는 모를 리가 없지.
바실리는 손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다가 이번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아일라는 모두가 마녀라고 부른다고 들었어. 그래서 불행이 안 통해?”
물론, 내가 악명 높긴 하다만 대체 저런 사회성으로 날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바실리가 내 이름을 허락 없이 멋대로 불러도 그러려니 했다. 그는 대인 관계에서 통용되는 기본 상식조차 없었으니까.
“뭐, 그런 걸로 쳐 두자.”
“안아 봐도 돼?”
그런데 이렇게까지 없을 줄이야.
그 말을 들은 킬리안이 입매를 칼날처럼 비틀었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아마도 다른 곳도 잘리고 싶으냐고 묻고 있는듯한데, 불행히도 눈치라는 게 사망한 바실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서 ‘왜 감당해야 하는데?’ 하고 되묻고나 있었으니까.
어쩐지 입이 근질거렸다.
“설마, 아가한테 질투해요……?”
물론 바실리를 안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깐죽거리고 싶은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처음부터 그를 아가라고 칭한 건 킬리안 본인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그리고 의외의 부정이 돌아왔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들어 보지.”
한번 좀 놀렸다고 어째 그를 감당해야 할 대상이 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매끈한 미소를 보니 어쩐지 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도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만 나대기로 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쩔까요?”
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은발의 소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킬리안이 주술사들의 왕이니 바실리의 처분은 나보다 그가 내리는 게 맞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 킬리안은 바실리의 뒷덜미를 붙잡고 쭉 들어 올리며 말했다.
“로툴로로 보내야지.”
“응?”
바실리는 풀밭을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사냥꾼에게 붙들린 야생의 사슴처럼 온몸을 경직시키며 굳었다. 보낸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하지만 상당히 버릇이 잘못 든 모양이야. 이 상태로는 힘들 테니 아무래도 보내기 전에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저택으로 데려가야겠네요. 아슬란한테 빨리 연락도 해야 하고.”
“뭐, 뭐야. 뭔데?”
바실리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뒤늦게 팔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사로잡힌 뒤에 발버둥 쳐봤자 조금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싫어! 나는 린다한테 가야 해!”
아니, 나름 구조해 준 건데 왠지 이쪽이 납치범처럼 되어 버렸잖아. 나는 설명이 부족한 킬리안을 대신해서 바실리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잠시 같이 지내다가 널 주술사들이 모여 사는 왕국으로 보낼 거야.”
“거, 거짓말하지 마. 평생 불행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주술사를 위한 왕국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가엾은 바실리는 그런 꿈 같은 곳이 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없다고 박박 우겨도 널 붙들고 있는 남자가 바로 그곳의 왕인데요.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는데? 그럼 세상에 주술사가 너와 킬리안 단둘뿐이겠어? 어둠이 있어야 빛도 있는 법이야. 주술사가 씨가 마르면 신전도 폭삭 망해 버릴걸.”
“나, 난 처음 들어…….”
“그럼 의도적으로 숨긴 모양이네.”
“린다가?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봤자 내가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왜 그랬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너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겠지. 자신의 곁 아니면 갈 곳 없다는 식으로 세뇌하지 않았어?”
“…….”
바실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본인 나이도 모를 아주 어릴 때부터 계속 학대를 받아 왔다. 그러니 낮아진 자존감을 가해자에 대한 애착과 동일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암흑가의 주인이 원래는 로툴로에서 다른 주술사들과 함께 자랐어야 할 너를 멋대로 납치해서 키운 거다, 하고 지금 백날 설득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고.
나는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시 가서 뭐 하게?”
“몰라. 내가 있을 곳이니까…….”
“나를 눈앞에서 놓쳤다고 하면 린다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명색이 암흑가의 주인씩이나 돼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개를 가만히 둘 리가 없지. 내 말에 바실리는 정곡을 찔린 듯 한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며 무언가를 각오한 듯 형형한 살기를 내비쳤다. 황금색 눈동자는 순수한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널 죽여서라도 데려가야 해.”
바실리는 내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니 왜 또 사고가 그쪽으로 튀어.’
나는 킬리안이 먼저 그의 팔을 잘라 버리기 전에, 날 향해 뻗어 오는 손을 맞잡으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죽일 수는 있고?”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바실리는 어깨까지 움찔 떨다가 울상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온기를 갈구하듯 절박하게 내 손을 꼭 붙잡고 늘어졌다.
“나, 나는 린다의 말을 들어야 해. 린다가 신의 조각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준댔어. 그러면 나도 더는 숨어 살지 않아도 되고 평범하게…….”
“하…….”
그 말에 킬리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일갈했다.
“백날 먹어 봤자 소용없어.”
신의 조각.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냥 명칭부터 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팍팍 풍겨서, 따로 조사하지 않은 내가 모를 법도 하구나 싶긴 하지만…….
킬리안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깊게 뱉어 냈다. 초겨울의 한기에 젖은 입김이 그의 잇새로 담배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는 나와 바실리가 맞잡은 손을 뜯어내는 대신에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소년의 반대쪽 손을 붙잡고 이끌면서 말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 더한 나락에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