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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03화 (103/131)

# 103

악녀 메이커 103화

수도에 있는 텔레포트 센터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아슬란에게 미리 지어 놓은 사정을 설명했다.

센터 내에 비치된 통신기는 문자를 주고받는 것과 비슷한 형식이었는데, 아슬란은 내 문자를 받고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그 침묵에서 어떻게 자신이 이동한 바로 다음에 포탈이 고장 날 수 있느냐고 황당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야 그렇겠지.’

곧 뒤따라가겠다는 내 메시지에 돌아오는 아슬란의 대답은 참고로 이랬다.

[알겠다.]

내게 카젠에 있을 때 보냈던 열 통에 이르는 구구절절한 편지와는 너무 온도 차가 심했다. 이건 마치 한국어로 치자면 초성으로 ‘ㅇㅇ’ 하고 답변하는 수준이잖아. 적어도 조심해서 잘 오라는 말 한마디는 해 줬으면 좋겠다…….

이미 안전한 거 확인했겠다, 이제 더는 볼일 없다 이것입니까. 목숨만 잘 붙어 있으면 상관없다 그런 것입니까.

‘메르텐시아가 그럼 그렇지.’

나는 미사여구가 깔끔하게 생략된 문자를 노려보다가 찝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슬란의 속내를 읽는 것은 이미 전부터 깔끔하게 포기한 뒤였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킬리안과 바실리, 나, 이렇게 셋이서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나는 린다한테 가야 해. 너희가 하는 말 다 믿을 수 없어…… 말이 안 되잖아. 린다가 해 준 말이랑 다 달라. 주술사들의 왕국이 있다고 하질 않나, 신의 조각이 소용없다고 하질 않나…….”

바실리는 킬리안과 내 손을 꼭 잡은 채 앵무새처럼 린다 타령을 했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그와 맞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불행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다는 걸 린다라는 놈이 의도적으로 숨겼잖니. 널 밤의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의 전부였을 린다를 부정하면 본인의 삶 또한 부정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폭력이나 위협에 노출된 이들 중에서 가끔 몇몇은 구조 시도를 거부하기도 한다고도 들었다.

‘처음 느껴 보는 사람 온기만 아니었으면 진작 손을 뿌리치고 도망갔을 거 같은데.’

나는 바실리를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저 상태여선 설득이 어렵겠다고 판단했을 때쯤이었다.

“끼우?”

그때, 잠깐 자취를 감추었던 마물이 나타났다. 나를 이곳까지 유인했던 카피 퍼펫으로 추정되는 상습적 심장 폭행범이 말이다.

그러자 바실리는 낯선 환경에서 유일하게 면식이 있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표정이 확 밝아졌다.

“뭐야, 너 어딜 갔었어…… 응?”

하지만 마물은 바실리의 손길이 걸림돌이라는 듯 아주 가뿐히 피하더니 그대로 킬리안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볼에 몸을 비비거나 어깨 위에 앉는 등 갖은 애교를 피우며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친.’

나는 필터 없이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삼키며 심장을 쥐어뜯었다. 이 세상 가장 잘생긴 것과 귀여운 것의 조합이라니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극락인가.

하지만 킬리안은 그런 깜찍하기 짝이 없는 마물을 무슨 성가신 파리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쫓을 뿐이었다.

나는 킬리안에게 맹목적으로 엉겨 붙는 마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각인당한 병아리 같은데요?”

그러자 바실리 또한 굉장히 억울한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어째서? 분명 내 마력에 반응해서 만들어진 건데……!”

킬리안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끈질기게 달라붙는 마물을 털어 낸 뒤에 말했다.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미숙한 마물은 성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력이 강한 쪽을 쫓게 되어 있지.”

아, 그런 거라면 억지로 떼어놓기 전까지는 킬리안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겠네. 세상에 그보다 마력이 강한 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아쉬운 기색을 담아 마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거라면 그냥 데려가서 키우면 안 될까요?”

킬리안이라면 계속 졸졸 달라붙는 마물이 거슬린다고 없애 버릴 것 같아 선수를 쳐서 물었다.

“이걸?”

그러자 그는 그렇게 되묻더니 귀찮은 기색이었음에도 별다른 내색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지.”

“앗싸!”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부르자, 바실리의 손이 움찔 떨리면서 바짝 힘이 들어가면서 게 느껴졌다. 그는 전보다 초조함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저런 걸 왜 키워? 길들이기 쉬운 것도 아니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력 덩어리일 뿐인데. 너희 진짜 이상해.”

나는 그 말에 바실리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면 죽는 게 낫다는 말도 했었던가. 저 정도로까지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나도 한때 비슷한 문제로 힘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남 일 같지 않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흠…….’

이런 과격한 수는 쓰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도돌이표처럼 린다 타령을 반복하니 어쩔 수가 없네. 그리고 만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실리가 벌써 알을 깨고 나오기를 바라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손자국이 날 정도로 내 손을 꽉 붙잡고 있는 바실리를 억지로 떼어 냈다. 그리고 킬리안에게 눈빛을 주자 그 또한 눈치껏 소년의 손을 놓았다.

“……어?”

바실리는 양손이 텅텅 비자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린다가 좋다면 억지로 따라올 필요는 없어. 우리는 우리 좋다는 사람…… 음, 생명체만 데려갈 거니까.”

그러고는 킬리안 옆에 바짝 붙어 팔짱을 낀 다음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마물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며 말했다.

“네가 뭐든 괜찮아. 마력 같은 건 우리에게 조금도 통하지 않으니까.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랐으니 위화감을 느낀 오리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로툴로로 가면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전부 바실리를 지칭하는 말들이면서, 마치 마물에게 말하는 것처럼 굴어 보았다. 그러자 킬리안이 알 만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유치하기 짝이 없어 이런 방법에 낚이는 게 더 신기할 것 같지만, 뭐, 자칭 다섯 살이시니까 통하지 않을까.

그러자 너흰 믿을 수 없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던 바실리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저것보단 훨씬 쓸모 있어!”

역시나 효과는 대단했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바실리가 달려와 나와 킬리안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으니까.

바실리는 우리가 외면하는 척 굴자 힘을 써서 억지로 내 손을 잡으려다가 킬리안에게 제재를 당했다. 그러자 눈가를 일그러트리더니 킬리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꼭 끌어안는 게 아닌가.

‘……아니, 나도 못해 본 백허그를?’

나는 순간 멈칫했으나,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킬리안의 너른 등에 고개를 파묻은 채 뭐라 웅얼거리는 바실리에게 말했다.

“네 쓸모는 관심 없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네가 함께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킬리안은 깍지를 끼고 버티는 바실리의 포옹을 가뿐히 풀어 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 옆엔 내가 있었고, 바실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 * *

네, 돌아온 탕아입니다.

나는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보고를 하기 위해 공작을 찾았다. 그런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이 삭막한 집안은 그냥 ‘왔군.’ 하는 안부 몇 마디로 끝이었다.

내가 돌아온단 소식을 듣고 응접실을 찾은 아슬란이 절제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각하, 왜 아일라가 카젠에 오래 머물게 될 거라고 제게 따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묻지 않았으니까.”

“그렇군요.”

뭐가 또 그렇다는 거야. 나는 공작의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아슬란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하여튼 이놈의 집구석. 숨길 게 많은 나로서는 이토록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에게 간섭이 없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가끔 답답함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이러니까 아일라가 삐뚤어졌지.’

바실리는 대충 킬리안의 능력을 이용하여 ‘카젠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여러모로 쓸모 있어 보여서 개인 시종으로 쓰려고 데려왔다.’ 는 정도로 설정했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테니 그 정도로 넘겨도 충분할 듯했다.

물론,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어딜 봐도 눈에 띄잖아.”

나는 그가 눈에 칭칭 감고 있는 예의 검은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이 보이기는 해?”

“사람마다 느껴지는 기운 같은 게 있으니까. 대충 피할 수는 있어. 물론 가끔 벽에 부딪히기는 하지만…….”

날 단박에 찾아낸 것도 그런 기운으로 파악한 건가. 킬리안도 기운 타령을 하던데 둘이 어쩌면 주술사 중에서도 비슷한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킬리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이 좋은’ 타입?

“그래서 그 붕대는 대체 뭐야?”

“안대? 이거 구속구.”

구속구라면…….

“마물용 아니야?”

“응.”

그 말에 킬리안은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더니 품속에 있던 반지 몇 개를 꺼내 바실리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넌 이 정도로 충분할 거다.”

전에 킬리안이 저 반지들을 끼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전혀 소용이 없어서 귀걸이와 피어싱으로 갈아탄 듯했지만.

반지는 구속구를 개조한 만큼 안대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인지 바실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고마워! 불편했는데. 너 착하구나!”

“…….”

나는 재빨리 바실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멋모르고 날뛰는 무지한 꼬맹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킬리안을 또 너라고 부르면 장담하건대 이번엔 팔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거란다.”

“그럼 뭐라고 불러?”

그, 글쎄? 킬리안이 일단은 로툴로라는 주술사들의 왕국의 왕이니까, 앞으로 로툴로에서 살게 될 바실리는…….

“……전하?”

“전하가 뭔데?”

속닥거리면서 얘기했지만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뛰어난 킬리안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가 한숨인지 대답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로툴로 밖에서까지 그렇게 불릴 생각은 없어. 그냥 집사님으로 충분해.”

하긴, 생각해 보니 바실리한테 뭘 잘못 가르치면 분명 어디선가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은 철저하게 내 개인 시종처럼 교육하는 편이 좋겠지.

킬리안은 일단 이렇게 물었다.

“존댓말은 할 줄 아나?”

“뭔진 알아. 해 본 적은 없지만. 말끝마다 ‘요’를 붙이면 되는 거 아니야?”

“아가, 그냥 입을 열지 말자.”

“…….”

아무리 가르치는 것에 도가 튼 킬리안이라고 해도 자칭 다섯 살의 말투를 지금 당장 뜯어고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깔끔하게 포기하며 생긋 웃자 바실리는 헤, 하고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웃는다면 나도 웃어, 하는 얼빠진 표정이었다.

“시종이라면 간단한 호칭과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기본적인 대답만 익히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킬리안은 나를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르칠 게 한둘이 아닌 수준이었다면 바실리는 수만 가지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잠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루이스를 부를 테니 꼬맹이는 그때 동안만 여기 머물도록 해.”

“루이스가 누군데요?”

“……발닦개?”

오……. 취급 한번 대단한 사람이 튀어나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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