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악녀 메이커 104화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왕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타국을 방랑해도 괜찮은 건가?
물론 킬리안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로툴로 쪽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라면 적어도 보고 정도는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지금껏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은 걸까.
나는 혼잣말하듯 물었다.
“주술사끼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술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텔레파시 같은…….”
“그런 주술이 없는 건 아니다만, 기껏해야 수백 미터 정도에서나 가능하지 대륙 단위로 사용할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발닦개…… 아니, 그 루이스란 사람을 불러요?”
“날 애타게 찾고 있을 테니까.”
“네……?”
설마 가출이었어?
킬리안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추적을 방해하는 주술을 걸어 두었는데 이제 풀어야겠군.”
나는 권태로운 기색으로 허공에 황금빛 술식을 줄줄 적어 내려가는 그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제가 로툴로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보통 왕의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 둬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말은 하고 왔을 줄 알았는데,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오래 비워 둔 거면 굉장히 위험한 거 아닌가? 내가 일반적인 왕위를 기준으로 생각하며 걱정스럽게 묻자 킬리안이 답했다.
“로툴로를 건드릴 간 큰 존재는 없을 뿐더러 있더라도 내게 의지만 해선 좋을 게 하나 없지. 독립할 때도 됐잖아.”
“왕이 아니라 아버지였어요……?”
생각해 보니 킬리안은 주변에 불행을 불러와서 버림받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왕국으로 데려다가 키워 주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로툴로의 주술사들은 전부 그의 양자 같은 느낌이려나. 그럼, 결국 왕이라는 건 상징적인 명칭일 뿐이고 주술사들의 아버지인 거잖아.
내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충격 받은 표정을 짓자,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왕이라 해도 이젠 상징일 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상징이 자리를 비우는 것도 곤란하지 않나? 이를테면 정신적인 지주 같은 거잖아. 하지만 킬리안이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가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아가들 챙겨 주는 것도 수백 년이면 충분했지. 나 없이도 잘해 내고 있을 테니 딱히 걱정은 없어.”
“음, 육아에 지치셨군요.”
하긴 그가 언제부터 로툴로의 왕이었는지 몰라도 수백 년은 다스렸다고 말했으니까. 이제 자유로워질 때도 됐지.
“음, 자유가 되신 것을 축하해요?”
“말로만?”
킬리안이 눈가를 접으며 되묻자, 나는 말없이 바실리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입을 열지 말라는 킬리안의 지시대로 카피 퍼펫과 티격태격하며 놀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아가가 있는데요.”
자칭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말만 유창할 뿐, 하는 행동이 다섯 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만.
그러자, 킬리안은 입매를 매혹적으로 휘더니 말했다.
“쫓아내.”
앗, 가차 없어…….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게 두면 절대 안 될 것 같은데요. 무슨 짓을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어떤 점에선 바실리가 다섯 살 아이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겉으론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일지 몰라도 잘못 교육 받은 탓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하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 정돈 괜찮겠지 싶어 킬리안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러자 바실리는 금빛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이더니 그런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이건 대체 무슨 자세야. 두 남자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나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겁다, 아가야…….”
참고로 바실리는 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컸다. 내 신체 조건으로는 도저히 몸만 큰 다섯 살 꼬맹이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킬리안은 가공할 힘으로 내 위에 앉은 바실리를 번쩍 들어 내 옆에 내려놓은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보내 버려야겠군.”
아무래도 킬리안은 나를 특별히 해치려고 들지 않는 한 주술사 한정으로 약해지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이나 행동은 대놓고 거슬려 해도, 그는 우리 사이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바실리를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 * *
“하…….”
때는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킬리안은 나를 깨운 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차리고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했다. 그러다가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한숨을 뱉으며 하녀들을 내보냈다. 나는 아침으로 나온 크랜베리 스콘을 먹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시끄럽게 굴어서.”
“누가요?”
“발닦개.”
“오, 인기쟁이잖아요.”
나는 스콘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추적을 방해하는 주술을 푼 그 다음 날부터 바로 시달리다니. 역시 본인이 왕이라고 해도 이젠 상징일 뿐이라는 건 킬리안 혼자만의 착각임이 틀림없었다.
“그거 맛있어?”
그때, 바실리는 차려입은 의복이 영 불편한지 킬리안의 옆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대뜸 물었다. 나는 배가 고팠는지 스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바실리의 입 앞에 남은 스콘을 내밀었다.
“아― 해 봐.”
“아~”
킬리안은 내가 주는 것을 망설임 없이 받아먹으려고 하는 바실리의 동그란 머리통을 턱, 하고 잡았다.
“버릇 나빠진다.”
“아, 집사님 치사해!”
그리고 그는 끙끙거리며 버둥대는 바실리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다른 손으로 허공에 술식을 그렸다. 음, 마치 인형 뽑기 기계한테 꼼짝없이 붙들린 사슴 인형 같군.
나는 속으로 태평한 감상을 뱉으며 바실리에게 내밀던 스콘을 내 입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소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군주님!]
그때였다.
킬리안이 원을 따라 허공에 새겨 넣은 술식 사이로 한 청년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깨 하품을 내뱉던 나는 흠칫 놀라 몸을 굳히고, 바닥에 앉아 있던 바실리 또한 화들짝 놀라 탁자 아래 몸을 숨긴 채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니, 주군. 제가 그동안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그는 킬리안을 향해 버럭 하고 언성을 높이고 싶은 눈치였으나, 차마 그럴 수 없는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작정하고 숨으시면 저희가 절대 찾을 수 없다는 거 아주 잘 알고 계시면서!]
“너희의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킬리안은 잠시 귀찮다는 표정을 짓다가 아무 말이나 대꾸하는 듯했다.
그러자 발닦개…… 아니, 루이스로 추정되는 남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거친 숨을 색색거리며 말했다.
[옷차림은 대체 왜…… 그건 일단 됐습니다. 주군, 안 그래도 지금 완전 비상사태였는데 마침 잘됐군요. 최근 동대륙에서 의뢰가 하나 들어왔는데…….]
정말 급한 일이었는지 루이스는 킬리안과 연락이 되자마자 간절한 음성으로 일방적인 용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동대륙 진원이란 왕국의 왕이 죽은 왕비와 잠시라도 좋으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뢰를 했다는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아무리 전지전능해 보이는 주술이라도 설마 거기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다. 나는 아침을 먹는 것도 잊은 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대화에 경청했다.
킬리안은 잠자코 루이스의 얘기를 듣다가 간절한 음성으로 SOS를 외치는 그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간만에 마왕님의 미소를 보인 그는 다정하고 더없이 상냥하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루이스.”
그 말에 루이스가 입을 꾹 다물고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누가 보면 굉장한 위협이라도 당했으리라 착각할 정도로.
킬리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자릴 비운 새 밥버러지 같은 소리를 다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그 정도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는 거지?”
그러자 루이스는 억울해 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건 주군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이라고요…….]
“그럼 거절했었어야지.”
대책 없이 의뢰를 받고 수습하기 힘드니 내게 의지하겠다는 건가? 킬리안이 웃으면서 살벌하게 덧붙여 말하자, 루이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저흰 당연히 주군께서 왕비의 기일로부터 49일 안에 돌아오실 줄 알았죠. 그런데 이젠 닷새도 채 안 남았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49일이 지나면 그 영혼은 새롭게 환생을 하므로 망자와 대화를 나누는 게 불가능하다는 모양이었다.
[저희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신뢰와 직결되어 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주군이 꼭 필요합니다. 살려 주세요.]
처음에는 그저 재밌게 지켜봤을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나는 어깨에 두른 숄을 더욱 단단히 여미고 킬리안 옆으로 다가가 그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마치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무해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가는 편이 좋지 않아요?”
내 권유에 킬리안은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어디 가?”
그리고 그때 눈만 가만히 말똥거리고 있던 바실리가 탁자 밑에서 기어 나오면서 물었다.
루이스는 잠옷 차림의 나를 보고, 시종 의복을 입고 있는 바실리를 보더니, 마지막으로 의문 가득한 시선을 킬리안에게 고정하며 설명을 요구했다.
[대체 뭘 하고 다니셨던 겁니까?]
킬리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풀어내는 대신에 모든 설명을 깔끔하게 생략했다. 그리고 바실리의 뒷덜미를 잡아 앞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십수 년 전에 놓쳤던 아이다. 진원국 의뢰는 내 선에서 처리할 테니 넌 그동안 이 꼬맹이 책임지고 가르쳐.”
[세상에, 진짭니까?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달려가야죠. 대체 어떻게 찾으셨대. 역시 군주님은 대단하시다니까.]
“그리고 네가 멋대로 일을 벌인 책임은 따로 져야 할 거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는 주지.”
멋대로 일방적인 명령을 끝마친 킬리안이 그대로 통신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루이스는 잠시만요! 하고 다급하게 외치더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은 누군데요? 주술사?]
루이스가 내 정체를 물었다.
내가 누구인가. 상대가 킬리안의 신하인 거라면 안녕하세요, 저는 킬리안의 누구입니다, 하고 답해야 할 텐데.
‘연인…… 은 아니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충동이라고 정의 내리고 일단 몸부터 나눈 사이…… 잠깐만, 어째 머릿속으로 건전하지 못한 단어들이 무작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킬리안은 그런 나를 잠시 빤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내 것이라 새기고 싶은 존재.”
그 말을 들은 나는 내심 감탄했다.
‘언어의 천재……?’
내가 떠올린 단어랑 결국 같은 뜻인데 훨씬 시적이고 세련되게 들리네. 머릿속이 음란 마귀에게 잠식당했는지 상당히 야하게 들리긴 했지만. 나는 그를 향해 칭찬의 박수를 짝짝 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루이스에게 잘 부탁한단 의미로 방긋 웃어 보였다.
[허억…….]
그런데 루이스는 왠지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왠지 취급 주의 마크가 찍힌 무언가를 보는 시선인데.
“와서 보필해. 무례하게 군다면 그대로 저세상으로 보내 줄 의향도 있어.”
[살려는 주신다면서…….]
그의 말에 루이스는 기겁으로 답했고 통신은 그대로 끊어졌다. 킬리안이 일방적으로 끊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뭔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제대로 인사할 타이밍도 놓친 채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동대륙에 다녀온다고 하면 어쩐지 까마득한 기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킬리안이라면 순식간에 끝내고 올 수 있을 테니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길어야 일주일. 그동안 루이스가 곁을 지켜 줄 거다. 저래 보여도 실력은 쓸 만하니까 맘대로 부려 먹어도 좋아.”
“네. 그 정도야, 뭐.”
킬리안 전용 발닦개를 내 맘대로 부려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눈매를 곱게 접어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다.”
“킬리안.”
나는 문득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살짝 시선을 비켜 떴다.
잠시 볼을 붉히며 망설이던 나는 속눈썹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돌아오면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킬리안 것이라고 새겨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