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악녀 메이커 106화
심지어 그의 개 짖는 소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슬슬 지치는군. 그래도 그대가 포기할 수 없다면 서로의 타협점을 찾도록 하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나오지 않으면 독단으로 판단하겠다.]
내가 만든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뇌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혹시 얼굴에 술을 뿌리는 건 ‘널 신경 쓰이게 하려는 속셈’이라는 황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밀 신호라도 있는 건가?
나는 편지를 박박 찢어 벽난로에 던져 넣고 부지깽이로 열심히 쑤셨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날의 일을 애써 떠올리려 노력하며 이마를 짚었다.
베르너는 처음부터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던 놈이었다. 그런 그에게 빈정거리면서 얼굴에 술까지 뿌렸으니 당연히 최악의 상대로 전락하고도 남을 텐데?
‘역지사지…….’
좋아,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거다. 나는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베르너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스토커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긴커녕 증오스럽다.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강요하며 내 연애 사정에 사사건건 간섭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님 다음가는 집안의 자식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적인 철퇴도 내릴 수 없었고 쌍욕을 퍼부어 줄 수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얼굴에 술을 뿌리더니 내게 실망했단다. 미련까지 전부 사라졌단다.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단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랬다.
나는 그 끈질긴 스토커 자식이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며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연락도, 소식도 없다. 아무래도 진짜로 나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내 일상은 엉망으로 망쳐 놓고선 스토커 본인은 나라에 엄청난 공을 세워 갑자기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음, 후련하면서도 아주 화나네…….’
할 수만 있다면 피의 복수를 하거나 삼대가 망하라고 저주를 내릴 거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니 황태자가 지금 무슨 심정인지 알 것도 같았다.
……아니, 잠깐만.
‘하지만 저 예시는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고, 베르너 놈은 상황이 다른데?’
소설에서 그는 아일라가 자신을 스토킹 하든 말든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기는커녕 위협조차 되지 않으니 우습게만 여기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껏 황태자가 당해 왔던 온갖 추악한 공작에 비하면 아일라 정도는 양반이란 거다. 그녀가 다른 이들보다 유별난 점이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문’과 ‘아무리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정도였을 것이다.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서 득을 보기도 했다. 가장 강력한 가문의 아일라가 앞을 턱 하니 막고 있으면, 황족의 씨를 품기 위해 혈안이 된 다른 쟁쟁한 가문을 쳐 낼 수 있었으니까.
만약 샬럿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아일라는 무사히 황태자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사랑을 위해서가 아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결혼이겠지만.
하지만 샬럿이 등장했고, 상황은 달라졌다. 베르너는 그녀를 또 다른 심장으로 여길 만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리고 아일라가 샬럿을 해하려고 하다 실패했을 때, 베르너는 처음으로 아일라라는 존재를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베르너가 아일라를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원작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샬럿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는데?’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미친놈아.
날 도발해서 열 받게 하려는 수작이라면 제대로 먹혔다. 나는 지금 살인도 저지를 수 있을 것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니까.
하지만 왠지 베르너라면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으리란 강렬한 예감이 전두엽을 강타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10년 전에 만들어 낸 철 지난 인소 남자주인공이었으니까.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첫째, 이 자식이 ‘네 말 따윈 안 믿어’ 하면서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내가 아직도 본인에게 홀딱 빠져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 잠겨 있다.
둘째, 한참이나 제 밑이라고 생각했던 아일라 따위에게 수모를 당해 고귀하신 자존심에 와장창 금이 갔다. 그 때문에 내가 그를 얻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정신 승리하는 중이시다.
‘아……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진지하게 생각한 내가 바보지 역지사지는 개뿔이었다.
어쨌든 저놈은 진지하게 내가 아직 본인에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다.
‘진짜 따귀라도 때렸어야 했나.’
아냐, 저 정신 나간 놈이라면 ‘이렇게 해서까지 나의 뇌리에 너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냐.’고 말할 게 뻔하다.
아, 갑자기 누가 망치로 뒤통수를 강타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나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부지깽이를 든 채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자 반듯하게 서 있는 게 지루했는지 하품을 뱉고 있던 바실리가 빠르게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왜 이래?”
그가 놀라서 물었다. 고작 몇 분 사이에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존재 자체가 대재앙인 놈이 있어.”
“대재앙?”
“광기의 시대와 내 어긋난 사상이 만들어 낸 괴물이지.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바실리는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나, 살기는 기민하게 읽어 내고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죽일 거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죽이면 안 되나? 생각해 보니 안 될 이유도 없는 것 같고……. 응, 그래. 시험 삼아 한번 죽여 봐도 될 것 같아.”
“아가씨, 아까랑 말이 달라.”
나도 알아, 인마.
나는 미친 것처럼 중얼중얼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애써 누른 채 변명하듯 말했다.
“원래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지.”
“모순이 뭔데?”
“뭐든 뚫어 버리는 창과 뭐든 막을 수 있는 방패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 음…….”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을 들은 바실리의 눈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바로 모순…….”
“내가 이겨.”
“……됐다. 말을 말자.”
우문현답이로구나. 나는 역시 바실리의 모든 교육은 루이스에게 일임하기로 한 뒤, 도비엘라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내일 황태자의 일방적인 호출로 황궁까지 가게 생겼다는 말을 전했다.
“급한 일정이네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가씨의 미모를 더욱 빛낼 의상과 장신구를 찾을 수 있도록 힘낼게요!”
“아니, 가능한 한 내 얼굴을 칙칙하게 죽일 만한 의상과 장신구로 부탁해.”
“하지만 아가씨는 거적때기를 입어도 아름다울걸요?”
“그것참 곤란하네.”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하는 소리였다. 베르너 그 또라이에게 쌀알 한 톨만큼의 관심도 있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안경 낀 민얼굴에 추리닝, 그리고 슬리퍼라도 질질 끌면서 다가가 ‘여, 히사시부리―’ 하는 인사말이라도 날려 주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반대로 관심 종자 취급을 받겠지.
‘안타까운지고…….’
속으로 탄식한 나는 드레스 룸을 열심히 뒤지다가 장례식장에서나 입을 법한 새까만 드레스를 찾아냈다.
아일라가 소피아의 추천으로 주문한 옷인지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이거라면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면서 네가 안중에도 없다는 티 팍팍 낼 수 있지 않을까?
샬럿을 보면 황태자 취향이야 뭐 알 만했다. 지금 내 취향이랑 정확히 반대겠지. 티 안 나는 투명 화장, 청순가련, 레이스 샤랄라…….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좋아, 의상과 장신구는 물론 화장까지 시크 한 블랙으로 통일하면 되겠네.
“눈 화장은 스모키.”
“네?”
“립은 블랙으로 간다.”
“……스모키? 검정 입술이요?”
그게 뭐여, 하는 표정을 짓는 도비엘라를 뒤로하고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전부터 힘 빡, 하고 준 서양 언니들 화장은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으니까.
“환불 화장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초기의 목적 따위는 잊어버리고 어떻게 해야 발색이 선명한 검은색을 화장품을 구할 수 있을까를 모색했다.
* * *
‘겁나 예쁘잖아.’
너무 힘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맞추는 건 조금 과한 조합인데도 아일라는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이 잘난 얼굴에 뭔들 어울리지 않겠나 싶었지만, 그중에서도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당장 킬리안에게 달려가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건 현대인인 내 기준에서만 예쁜 거겠지?
‘황태자가 질겁해야 하건만.’
나는 나름 심각하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내 모습을 굳이 비유하자면 매일 거울을 붙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누군지 묻는 백설공주의 계모 같은 비주얼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못된 새엄마라고 인식하고 있는 계모 또한 백설공주가 자라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지.
여기 사람 기준으로는 아마 마녀 소리를 들을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치장을 도와준 도비엘라에게 물었다.
“어때?”
“그…… 죄, 죄송해요. 도비엘라는 그만 불경한 생각을 하고 말았어요.”
그녀는 어쩐지 두 뺨을 붉히며 호흡 곤란 증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탓하지 않을 테니 말해 봐.”
“……아, 악마, 아, 아니 나쁜 뜻이 아니라 뭔가 치명적인 느낌의…… 역시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이죠! 제 입은 너무 방정맞아요! 꿰매 버려야겠어요!”
그만둬. 네 옆에 있는 바실리가 방금 그 말에 눈을 흥미로 반짝 빛냈으니까. 나는 도비엘라의 입술의 안위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 그런데 사실 내 생각도 도비엘라와 정확하게 같았다. 하지만 내가 거적때기를 입어도 예쁠 거라고 장담하는 도비엘라도 나도 이쪽 세계 기준으로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니까 패스.
나는 나를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는 바실리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어때?”
“눈이랑 입술이 검은색이야.”
아니,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음, 그러니까 예뻐?”
그러자 바실리는 품속에서 검은 안대, 그러니까 구속구를 꺼내며 말했다.
“응, 나 검은색 좋아해.”
그걸 물어본 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래도 물어볼 상대가 잘못된 듯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바실리는 안대를 눈 위에 덮어쓰며 내 눈도 검은색, 네 눈도 검은색,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비엘라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 맙소사. 바실리, 지금 아가씨 앞에서 말을 반 토막 낸 건가요?”
“아냐…… 요?”
“도비엘라는 방금 똑똑히 들었어요.”
“네가 잘못 들었어요.”
나는 도비엘라 앞이라고 어색하게 존댓말 비슷한 걸 쓰려고 하는 바실리의 노력이 가상하여 작게 웃고 말았다.
“바실리는 음…… 제국 대륙 밖 출신이라 공용어가 어색하니까 이해해 줘.”
졸지에 외국인이 된 바실리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비엘라는 아가씨의 말이니 믿겠지만, 어딘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발음은 꽤 정확하지 않나요?”
“존경어가 없는 왕국에서 와서 그래.”
내가 변명을 덧붙이자 바실리는 잠시 입술을 이상한 시옷 모양으로 일그러트리더니, 굉장히 성가시다는 시선으로 도비엘라 쪽을 돌아보았다. 전부터 은연중 느낀 건데, 아무래도 저 두 사람 상당히 상극으로 보인다.
“이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죄송해요. 도비엘라가 생각이 깊지 못했어요.”
“응, 나도 네 잘못이라 생각해요.”
“……하, 하지만 바실리, 아가씨 앞에서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걸 도비엘라는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요. 공용어에 하루빨리 익숙해지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겁쟁이 도비엘라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단호한 눈빛과 다르게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여전히 치와와 같아서 귀여웠다. 흐뭇하게 웃고 있자니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리고 샛노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데 또 귀찮게 굴면 너 죽어요.”
“……네?”
도비엘라는 목에서 쇳소리를 내며 그대로 굳은 채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사고뭉치 바실리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방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