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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07화 (107/131)

# 107

악녀 메이커 107화

‘그냥 거적때기를 입을걸 그랬나.’

지금 내 모습은 지금 당장 화보 촬영을 하러 간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예뻐도 이 스타일이 황태자의 취향에 백억 광년 정도 떨어진 것 하나는 확실하니까 만족하기로 했다. 거적때기보단 이쪽이 네놈한테 관심 없다는 걸 더 강렬히 강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용인마다 아일라의 포스에 질린 듯 질겁하며 슬슬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위협적인 모양이라 뿌듯해졌다.

‘좋아, 꼴같잖은 착각 환불하고 온다.’

나는 완전히 마음을 놓은 뒤 바실리를 데리고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에게 황태자의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 하며 그의 앞에서는 절대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왜?”

“황태자는 소드 마스터야.”

“소스 마스터?”

“아냐.”

소스 마스터는 또 뭐야. 모든 소스를 통달한 달인인가. 왠지 핫도그 가게에 데려가고 싶어지는 능력자네.

“너처럼 감각이 초인이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의 기척도 읽어 낼 수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는 그냥 동상처럼 서 있도록 해.”

솔직히 황궁에 갔다 오는 동안 바실리를 잠시 저택에 두고 갈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루이스가 저택에 찾아오기 전까진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를 혼자 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짐작도 가지 않고 감당할 자신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가, 사람을 향해서 함부로 죽인다는 말하는 건 지양하도록 하자.”

“아가씨도 했잖아.”

“…….”

젠장, 할 말이 없네.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라는 건가 보다. 하여튼 베르너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도 본인 앞에서 말하면 안 돼.”

“아하.”

과연 이게 정말 올바른 훈육법이 맞는 걸까요, 루이스 선생님? 저는 이 아이를 도저히 혼자 감당하기 힘듭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말인데.

“루이스라는 주술사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킬리안의 명령을 받았으니까 그가 동대륙으로 떠나자마자 곧장 이리 올 줄 알았더니.”

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의아해 하자, 바실리는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동자를 데굴 굴리더니 말했다.

“내가 잡아 올까?”

엥?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잠깐, 잡아와야 한다고?”

어째 단어 선정이 이상하다. 마중 나간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잡아온다니? 물론, 바실리는 언제나 표현을 이상하게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자 그는 마차 안을 둥둥 배회하는 새까만 병아리 같은 카피 퍼펫을 따라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마력이 왔다 갔다 하고 있어.”

나는 말뜻을 해석하느라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주변에 어슬렁거린다는 뜻이야?”

“응. 막 돌아다녀.”

“……왜?”

“몰라? 신기한 걸 발견한 걸까?”

그럴 리가 있나. 얘기하는 걸 엿들어 보니 킬리안이 발닦개라고 지칭한 만큼 꽤 충직한 신하로 보이던데, 왕의 명령을 뒤로하고 신기한 것 때문에 여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말이 돼?

“잡아오려면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 나는 감만 느낄 뿐 정확한 위치는 잡을 수 없어서 꽤 걸릴걸.”

그렇다면 바실리가 잡아 올 때쯤엔 이미 킬리안이 돌아오고도 남지 않을까? 게다가 이 녀석은 혼자 내보내면 아무래도 사고를 칠 것 같아서 불안하다.

“습격을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 사정이 있겠지.”

어차피 지금 당장 만날 이유는 없었고 며칠 기다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바실리 때문에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그 일을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 * *

마차에서 내린 나는 송장 같은 표정으로 약속 장소까지 걸음을 옮겼다.

‘쟤야?’

바실리는 황궁 정원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무언으로 내가 살의를 품은 상대가 맞는지 물었다.

새하얀 대리석 조각을 등지고 서 있는 황태자는 뒷모습뿐인데도 대체 누가 사람이고 조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키와 비율을 자랑했다.

솔직히 외모만 따지면 유일하게 킬리안과 견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주둥이가 세기말을 살아가고 있어도 일단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었으니까 말이다.

베르너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백마 탄 왕자님 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배우의 리즈 시절을 빼다 박은 외모였으나, 구제 불능의 얼빠인 나조차 분노하게 하는 정신머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최소한의 허용 범위가 있었다. 베르너 같은 경우는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두 개의 심장을 운운했을 때부터 그 허용치를 한참 전에 훌쩍 넘었다.

하지만 나는 바실리 앞에서만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시치미를 뗐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고개를 젓자, 바실리가 불신에 가득 찬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말하는 듯하다.

이 꼬맹이는 다른 건 다섯 살과 다름없는 주제에 이럴 때만 눈치가 킬리안급이었다.

나는 부정해도 통하지 않자 소리 없는 한숨을 뱉으며 잠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가 입술을 달싹여서 최대한 입 모양으로 내 의지를 전했다.

‘아가, 알겠니? 때로 사람은 충동을 억제하고 때를 기다리며 꾹 인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란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뭐야, 어디 갔어!’

분명 앞에 있어야 할 바실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풀 더미와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만 우뚝 솟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베르너가 등지고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걷는 바실리가 그의 등 뒤로 유유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 너 아니지? 설마 아니지?’

그런데 그 설마가 맞았다.

바실리는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으며 손가락에 다닥다닥 끼고 있던 반지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트리고 손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가 반대 손으로 그리는 황금색 술식은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려 낸 것과 정확하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바실리에게 루이스를 잡아 오라고 시킬걸 그랬지. 그가 수도 한복판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해도 황태자를 냅다 죽이려 하는 지금보다 대형 사고는 아닐 테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초인적인 순발력이 튀어나왔다.

나는 바실리의 손이 황태자의 목에 살짝 툭, 하고 닿자마자 재빨리 바실리를 내 뒤로 감췄다. 그와 동시에 베르너는 고개를 돌렸고 그는 내 힙한 모습에 흠칫하고 놀라 잠시 굳어졌다.

“그 꼴은 대체…….”

베르너는 마치 장례식장에 고인을 능욕하러 찾아온 악마 같은 내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경악하는 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에 술 뿌리고 냅다 튀었을 때도 이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내 눈에 띄고 싶었나?”

내가 의도했던 것과 정확하게 상반되는 반응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대체 어떤 사고를 거치면 그런 기적의 논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울컥하긴 했으나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태자가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든 말든 내 시선은 바실리의 손이 닿았던 그의 목덜미에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맨살에 닿긴 닿았는데…….’

그것도 반지나 안대 같은 아무런 마력 억제제도 없이 무방비하게 닿았다.

‘이미 늦었나? 이제 곧 죽나?’

나는 베르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도 바실리의 마력이 킬리안 만큼은 아닐 테니 살짝 닿은 것 정도로 죽진 않겠지? 황태자에게 조만간 불행이 닥치는 건 주술사와 접촉한 이상 무조건 확정 난 것 같지만.

나는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베르너를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그와 허공에서 시선을 딱 마주쳤다. 그는 바실리의 손이 닿았던 목을 제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매끈한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무례하군. 황족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대다니. 그대는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올 정도로 내게 닿고 싶었던 건가?”

“……?”

이건 또 색다른 개소리인걸.

하도 한 사람에게 짙은 살의를 품다 보니 이제는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나는 동태처럼 죽어 버린 눈동자를 한 채 등 뒤에 감춰도 전혀 가려지지 않는 바실리를 꺼내 옆에 두며 말했다.

“이 아이가 한 일이랍니다.”

그러자 베르너는 바실리의 존재를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흠칫하고 물러서더니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암살자인가?”

……어떻게 알았대?

암살자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암흑가에서 살인 청부업을 했을걸.

하지만 나는 정곡을 찌르는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놀라 뭐라고 대꾸하려고 하는 바실리의 등을 꼬집어 뒤틀면서 말했다.

“암살자라니, 재미있는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제가 본궁 정원에 당당히 암살자를 대동하고 나타날 리가요.”

“그대라면 그러고도 남지.”

대체 아일라 이미지 왜 이러냐.

물론, 암살자 엇비슷한 게 맞긴 해!

“제 호위도 겸하는 개인 시종입니다.”

“실력이 좋은 시종인 모양이군. 그래서 영애는 시종이 감히 황태자의 몸에, 그것도 암살자라 의심이 갈 정도로 기척 없이 다가와 급소에 손을 대려 했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야, 그렇게 물으면 내가 만졌다는 대답밖에 할 말이 없잖아! 하여튼 이놈의 꼬맹이. 집에 돌아가면 아주 영혼까지 탈곡기처럼 탈탈 털릴 줄 알아라.

하지만 나는 곧 죽어도 내가 만졌다고 말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일단 박박 우겨 보았다.

“벌레가 앉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엔 마주 보고 있는 상대가 혐오스러워서 시선 처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베르너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귀엽게 굴기는.”

……뭐라고?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대낮부터 술이라도 취했어? 내가 너한테 이런 쏠리는 말 들어야 할 사이는 아니잖아.

어떻게 킬리안과 똑같은 대사를 뱉는데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있지. 나는 진심으로 속 안에 것들을 위로 올릴 뻔하다가 입을 틀어막고 겨우 진정했다.

“뭘 심하게 잘못 드신 모양이군요.”

“아니, 그동안 영애가 내 눈에 들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조금은 관대해져 볼까 해.”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써요……? 굳이 말하자면 안중에도 없는 쪽인데요.”

나는 그동안 그와의 신분의 차를 고려하여 계속 유하게 돌려 말했다. 하지만 도무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이번에는 좀 강하게 말해 보았다.

나는 네놈 안중에도 없어.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웃기지도 않아.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고선 발뺌해 봤자 이미 다 읽혔거든.”

환장하겠군.

“저는 분명 저번 일로 전하와는 끝이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어디 머리라도 잘못 맞아서 그때의 기억이 통째로 삭제되었니? 그럼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내가 있는 힘껏 때려 줄 의향은 차고 넘쳤다.

그러자 베르너는 아직도 발뺌할 게 남았느냐는 듯 나를 관대한 시선으로 보더니 분수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란 걸 안다. 내가 그대를 봐 온 세월이 얼마인데.”

“……무슨, 절 키우셨어요?”

세월 같은 소리 하네. 아일라의 친아버지도 아일라의 몸속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걸 못 알아채는데 네놈이 아일라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지껄이냐.

어처구니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데, 베르너가 ‘큭큭’ 하고 웃더니 말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많이 신선해졌군.”

“신선……?”

많이 신선해진 건 무슨 말이야. 신선도를 찾고 싶은 거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수산 시장을 가시던가.

맙소사. 베르너의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세기말 기운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완전히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만족하질 못하고 기어이 화룡점정을 찍고 말았다.

“모르는 척 구는 건 그쯤 해.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나는 이미 한 여자를 내 심장으로 주었지만, 그대를 후궁으로 맞을 의향이 없는 건 아니야.”

“있으면 안 되지, 미친놈아…….”

너무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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