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108화 (108/131)

# 108

악녀 메이커 108화

“미친…… 뭐?”

계속 꾹꾹 눌러 참다가 결국 질러 버렸다. 망했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베르너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린 건 네가 처음이군.”

“…….”

대놓고 욕을 얻어먹어도 절대 멈추지 않는 저 절망의 주둥이. 네가 결국 그 전설적인 대사를 뱉었느냐.

욕을 할 의도는 아니었다고 변명할 의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귀를 막을 타이밍을 놓쳐 고통스러워하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참…… 처음이실 일 많네요.”

“그대가 워낙 특이한 거지.”

……특이?

아니, 잠깐만. 아까부터 계속 황태자 입을 통해 내가 들어서는 안 될 표현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 내가 새롭고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하긴, 황태자 얼굴에 술을 뿌린 걸로도 모자라 기묘한 옷과 화장을 한 채 다짜고짜 욕설을 뱉는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나 싶지만.

‘오만 정 다 떨어지게 하려던 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어……?’

그래서 남자 주인공이 악녀를 후궁, 그러니까 정부로 들이겠다고? 뭐 이런 제정신이 아닌 놈이 다 있지?

이미 욕도 했겠다, 나는 숨기지 않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제 더는 한 톨의 미련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제 나름의 표현이 전하께 처음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군요.”

그러자 그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 무례한 입도 이젠 재미있어.”

이야, 내가 재미있대. ……이거 빼도 박도 못하는 거 아니야? 저기요. 작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캐릭터 붕괴가 일어났는데요.

“설마, 제가 좋아졌어요?”

나는 이미 인내심을 상실했다. 상대가 황태자란 이유로 유지하고 있었던 최소한의 배려심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대뜸 직구를 던졌다.

“하, 그대야말로 미친 건가?”

그러자 계속 말 같잖은 소리로 날 밀어붙이던 베르너가 겨우 한발 물러서며 시치미를 뗐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지. 그대가 샬럿에게 무슨 수를 쓸지 알 수 없으니 곁에 두고 감시할 생각일 뿐이다.”

‘웃기고 있네.’

신선하다, 처음이다, 특이하다, 재미있다, 그 말 전부 네가 샬럿에게 반할 것 같을 때 하던 정신 나간 헛소리잖아. 빌어먹게도 내가 쓴 대사였지만.

‘대체 왜? 내 어디를 보고?’

지금까지의 내 행보로 미루어 봤을 때, 베르너의 취향과 정확히 반대를 달리고 있을 텐데.

뭐, 말마따나 지금까지 나 같은 영애는 없었을 테니 내가 색다르기야 하겠지. 그런데 세상에 얼마나 개성 넘치는 사람이 많은데 신선한 거 나타날 때마다 사랑에 빠지고 새로 갈아탈 거냐? 이놈 진짜 답이 없네.

차라리 베르너가 아주 냉철한 이성을 가졌으며 권모술수에 능한 캐릭터였다면 이해를 하겠다. 지금 아일라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패였으니까.

마침 지금의 나는 훌륭하게 이미지 세탁을 끝마친 상태였다. 아일라의 흉흉한 소문도 각 분야에서 활약한 업적으로 인해 서서히 덮이고 있었고, 이제 내게 남은 건 탐나는 뒷배와 사회적 영향력뿐이었다.

그러니 그럴 의도로 날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라면 인정하겠다.

하지만 베르너는 매번 심장을 운운하는 것처럼, 심장에 뇌를 먹혀 버린 얼간이었다. 샬럿이 나타나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그 이후로는 사랑에 눈이 뒤집혀 이성은 개뿔 감성의 지배를 당하고 있었으니.

오죽하면 아일라가 제 연인을 해칠 뻔했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아슬란을 죽여 버릴까.

그뿐만 아니라, 베르너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을 지지하던 쟁쟁한 가문을 무너트렸다. 제 입지가 위태로워지든 말든, 제 심장인 샬럿을 유일한 황태자비로 품고자 했다.

그런데 심장 세 개 선언이라니. 이대로 네 개 다섯 개 쭉쭉 늘려서 아홉 목숨의 고양이라도 될 셈이냐?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확인받지 않고서는 발 뻗고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저 주둥이는 무시하고 다짜고짜 그의 심장 위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꾹 눌러 보았다.

“뭐, 뭐하는 짓이지?”

베르너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당황한 건지 말을 더듬거렸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양 뺨에 희미하게 홍조가 돌고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영애, 도를 넘는 행동을 그저 귀엽게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그는 내 손을 ‘짝’ 소리 나게 뿌리치며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 그래 봤자, 나는 이미 확인할 것을 전부 확인한 뒤였다.

판정 결과, 나온 결론은…….

‘이 자식 심장 세 개 됐잖아.’

베르너의 유일한 장점이 좋은 연인이라는 거다.

그는 샬럿에 한해서만은 일편단심이었다. 한결같이 그녀만을 위했고, 다정했으며, 다른 여자는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유일한 장점마저 내다 버리다니, 내가 널 어디다 써야 해.

‘샬럿의 짝으로 이어 주려고 했는데 심장이 여러 개라니. 한쪽은 심장이 막 분열하고 다른 한쪽은 열심히 어장치고, 그런 남녀가 이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리 진리의 끼리끼리라지만 파탄이라는 결말 외에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데…….’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주 불쾌하고 곤란하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베르너는 심기가 상한 듯 빈정거렸다.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군. 나는 방종하고 건방진 영애를 후궁으로 들여서 내 손으로 직접 길들이고 싶을 뿐이다.”

애초에 황태자의 후궁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퍽이나 들어가겠다고 하겠다. 말할 때 뇌는 안 거쳐? 아니면 아직도 내가 황태자의 말 한마디라면 어떤 헛소리든 끔뻑 죽었던 소설 속 아일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제 소문을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정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정부를 들일 생각이라고요.”

“가능한 꿈을 꾸는 게 어떤가?”

“왜 불가능하죠? 이 얼굴에, 이 신분에, 이 재력에, 이 능력에?”

내가 눈가를 반쯤 접으며 오만하게 말하자 베르너가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굳은 표정으로 바실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아, 그래. 그런 소문은 익히 들었지.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미인을 괴롭히는 게 취향이라고 했던가?”

베르너는 내가 카지노 호텔 사건 때 샬럿을 사들이기 위해 했던 변명을 언급했다. 원래 그런 프라이버시는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게 귀족 사회의 예의라 배웠거늘, 황태자도 예절 교육을 판타지로 받았나.

“네 시종도 그런 부류인 모양이지? 신성함을 상징하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라. 악취미로군.”

어딘지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 바실리는 내가 마차에서 미리 시킨 대로 열심히 동상인 척 가만히 있다가 그 말에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쟤는 꽃사슴인 척하는 독사인데.’

바실리는 다행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황태자가 뭔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인식은 한 모양이었다.

나는 바실리가 또 입술을 시옷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보며, 그가 사고를 치기 전에 선수 쳐서 말했다.

“제가 능력 있다는 걸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정부가 되라는 말이라면 더는 듣고 싶지 않군요. 돌아가겠습니다.”

물론, 그가 아무리 논리적인 이유를 댄다고 해도 죽어도 저놈 정부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빠르게 뱉은 뒤에 등을 돌렸다. 지금 애써 태연한 척 응대하고 있었지만, 황태자가 생각보다 더한 똥차라는 걸 알아 버려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빨리 이곳을 벗어나 따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때, 베르너가 갑자기 급하게 내 손목을 잡아챘다. ‘탁’ 하고.

그는 본인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다가 불쾌한 표정으로 멈춰 선 나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 그래, 솔직히 말하겠다.”

베르너는 꿀꺽 목울대를 울린 뒤,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여전히 종잡을 수 없다. 악마 같다고 생각되다가도 어느 땐 천사의 탈을 썼다가…….”

중략, 중략.

“……트란디아 공작에게 카지노 호텔에서의 일을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어. 그곳에서 고통 받는 죄 없는 백성들을 구하려고 했다지? 또 이번 토벌 건도 그대의 공이 거의 전부였다고 레녹스가 말하더군.”

사설이 길다. 베르너는 도무지 세 줄 요약을 몰랐다. 나는 하품을 하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단순히 내가 베르너의 말을 일분일초라도 귀에 담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겨우 본론을 뱉었다.

“그때부터 그대가 달리 보였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가 ‘비 오는 날 양아치와 고양이 효과’에 걸려들었다는 뜻이었다.

평소에 답이 없는 개차반인 줄 알았던 아일라가 계속 선행으로 보이는 일을 하니까 다르게 보인다는 거 아니야. 내가 그가 알고 있던 그 개차반이라는 건 다름이 없을 텐데.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제 행동이 특이하고 신선해서 관심이 갔고, 알고 봤더니 착한 것 같아서 조금씩 마음이 갔다…… 그 말씀이신가요?”

“마음까지는…… 그래.”

베르너는 부정하려는가 싶더니,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카지노 호텔 건을 알고 있다면 내가 샬럿과 황태자를 이어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그들의 백년해로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을 텐데.

“샬럿은 어쩌고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 하지만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군.”

“실망? 어째서요?”

“그날 이후로 계속 그녀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 돼서 보이니까…….”

잠깐, 이거 가만 보니까 전부 킬리안이 예전에 말해 준 대로 됐잖아?

악당 중의 악당은 선행 몇 번 해 주면 달리 보이고, 선인(善人)이 착한 건 당연하니까 자신의 기대와 조금만 어긋나도 실망하게 되고.

‘샬럿은 애초부터 선인으로 만들어졌을 뿐 선인이 아닌 듯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다다른 결론은, 악당과 선인이라는 게 결국 다를 게 있나?

신의 뜻을 받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결국 본인이 가장 소중하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걸 텐데. 인간이니까.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겐 지옥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인성이 아주 심각할 정도로 어긋나 있으면 그건 문제였지만 결국 같은 사람을 두고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새삼 다시 봤다가 반했다가 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니까 샬럿이 아니라 천사처럼 착한 샬럿을 사랑했다는 건가요?”

“그런…… 거였던가.”

내가 그의 감정을 후벼 파듯 정곡을 찌르자 멍하니 굳어져 있다가 어딘지 속 시원해진 눈빛을 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복잡했던 감정이 비로소 뚜렷해진 듯 보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뭔가 부스럭하는 소리에 나와 베르너, 그리고 바실리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샬럿이 서 있었다.

“…….”

“…….”

“…….”

어쩐지 배경 밑으로 카페×네 로고가 떠 있을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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