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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09화 (109/131)

# 109

악녀 메이커 109화

“읏……!”

샬럿은 분한 듯 이를 악물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드라마 엔딩 크레딧과 함께 구슬 같은 눈물을 흩뿌리며 뛰쳐나갔다. 동시에 어딘지 익숙한 OST가 귓가를 스쳤다.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란 말인가. 대체 샬럿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마물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는 게 늦어졌으니, 지금쯤 안젤로 영지에 머물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샬럿!”

얼음 상태로 굳어 있던 베르너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샬럿이 이 상황에서 부른다고 멈출 리가. 베르너는 나와 샬럿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꾹 깨물며 그녀를 쫓아가려 등을 돌렸다.

“잠깐.”

나는 그런 베르너의 어깨를 ‘턱’ 하고 붙잡았다.

지금 네가 샬럿을 쫓아가면 이 웃기지도 않는 촌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무엇이 되냐. 남주를 따로 만나 여주를 오해하게 해 놓고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악녀 꼴이잖아.

내가 자처해서 악녀가 되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의 판에 박힌 전형적인 악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베르너와 엮이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오해일 뿐이라도 그냥 끔찍하게 싫다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이딴 놈이랑!

“쫓아가서 뭐라고 하게요?”

“…….”

“오해라고 하시게요?”

나는 이미 사랑꾼 같은 면모에 가려져 있었던 네 쓰레기 같은 인성을 충분히 보았거든? 날카로운 눈초리로 묻자,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내 유일한 심장은 샬럿뿐이야.”

“……혹시 단기 기억 상실증 있으십니까?”

아무리 맥락 없는 기억 상실증이 한국형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라고는 하지만 방금 한 말도 기억 못하는 건 심하잖아.

“저를 정부로 들이고 싶을 정도로 끌리고 있고, 샬럿이 아니라 천사처럼 착한 샬럿을 사랑하셨다면서요?”

나는 후, 하고 무거운 한숨을 뱉어낸 뒤에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만약 샬럿, 그러니까 안젤로 영애가 전하께서 생각했던 것만큼 착하지 않다면요? 보통 사람, 그보다 더 이기적이라면요? 그녀가 천사는커녕 저보다 더한 마녀라면 어쩔 건데요?”

사실 사람을 천사 마녀로 양분해서 말하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아듣기 쉽게 이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를 섞어 물어보았다.

“그건…….”

그러자 베르너는 그래도 여전히 네 심장일 수 있느냐는 물음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날 속인 것이 아닌가?”

베르너는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몰리자 잠시 말이 없다가, 결국 본인은 잘못한 게 없다는 정신 승리를 이끌어 낸 모양이었다.

그는 나와 시선을 정확하게 맞춘 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단순히 영애의 외모에 혹한 게 아니야. 그렇게 단시간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꿈꿔 왔던 이상형과 모든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이지. 물론 거기엔 그녀의 착하고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내면 또한 포함되어 있고.”

뭐, 그래. 속았다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긴 해. 샬럿의 창조주인 나도 식겁할 정도였는데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너는 얼마나 놀랐겠니.

그런데 그게 세 개로 심장을 늘릴 명분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쓰레기야?

그녀의 본모습을 정 감당하기 힘들다면 하다못해 샬럿에게 이런 점에서 실망했으니 그만 만나자고 제대로 말이라도 해 두던가. 날 황태자비가 아닌 정부로 두겠다는 걸 보니 정리도 제대로 안 한 모양인데 네가 어장 치는 샬럿보다 더 심한 거 알아?

“전하께서도 안젤로 영애를 속이셨군요.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다음 생에서도 유일하시다더니? 절 이 바닥에서 발도 못 붙이게 하신다더니?”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응, 아니야. 내가 널 완전히 배제하기 전에 심장을 떼어 내서라도 어떻게 좀 해 봐.

“그리고 안젤로 영애가 천사가 아니라 실망한 거라면 제가 선행을 좀 베풀었다고 관심이 간다는 것과 모순되잖아요. 전 원래 악하니까요.”

“그건 길들이기 나름 아닌가?”

“…….”

‘진짜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베르너와 샬럿을 이어 주어 빨리 완결을 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하필이면 킬리안이 없을 때라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꽤 오래전부터 내게 관심을 가진 모양인데 그럼 아주 완전히 원작과 뒤틀렸잖아. 그런데 왜 루프가 일어나지 않는 거지? 황태자가 나한테 마음이 생기면 그건 신의 의도와 완벽하게 엇나가는 거 아니야?

“그럼 안젤로 영애가 전하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면 어쩌실 건가요? 내칠 건가요?”

“아니. 꼭 황태자비로 들일 거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게 된 상황이 꺼림칙하다는 건가? 자존심도 지키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거고? 그 정도로 핵폐기물인 건가, 하고 경악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황후감이니까.”

“…….”

그 말을 듣고 나자 오히려 요동치던 분노가 고요해졌다. 이것은 그래, 상종할 가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체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킬리안은 내게 이럴 때 그냥 충동을 따르라고 말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전하.”

나는 초겨울의 삭막한 정원을 등지고 활짝 웃으면서 베르너를 불렀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그러자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뭐지?”

“숨을 들이쉬세요.”

베르너는 미간을 슬쩍 구기며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웃기만 하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며 흉부를 들썩였다.

“좋아요, 거기서 더 숨을 들이쉬세요. 네, 아주 좋습니다. 더요, 더. 멈추세요. 그렇게 계속 숨을 참으세요.”

나는 사진 장인처럼 숨 참기를 요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숨을 멈춘 베르너가 결국 참다못해 입을 달싹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입을 열지 않은 채로 평생 그 상태로 서 계시면 됩니다.”

“…….”

그러자 한결같이 동상을 흉내 내며 말똥말똥 서 있던 바실리가 물었다.

“숨 안 쉬면 죽지 않아요?”

바로 그거야.

“그럼 용건도 끝났으니, 전 이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잠깐, 무슨 뜻이지? 먼저 날 붙잡아 놓고 멋대로 떠나는 건가? ……윽!”

그때 갑자기 휭 하고 바람이 불더니 베르너의 머리 위에 있던 나무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대체 저렇게 많은 잎이 어디서 떨어지나 싶을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잎에 파묻혔다.

“……젠장.”

제대로 이미지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머리에 달라붙은 잎을 탁탁 털어 냈다. 그러자 찬란한 금발 위에 붙어 있던 녹색 애벌레가 그의 손에 옮겨 탔다.

‘친구를 만났잖아.’

아니지, 저거에 비유하면 애벌레가 가엾어지는 수준.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손을 탈탈 털어 내는 베르너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바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바실 리가 내 손길대로 머리를 기울이며 골골거리기에 턱도 긁어 주었다.

“하, 역시 그런 사이였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베르너의 두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거렸다. 아, 뭔진 모르겠는데 기분 더럽고 엄청나게 찌질해 보인다.

“제가 키우고 있죠. 문제라도?”

애처럼 키우고 있는 건 사실이지. 그는 다른 뜻으로 이해한 듯했지만. 어느 쪽이든 소문으로 익히 들으셨을 텐데 새삼 그런 반응이십니까.

그러자 베르너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를 곁에 두는 건 그대나 샬럿이나 마찬가지로군. 그대들은 그런 점이 문제야.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

지금 나와 샬럿과 한데 묶어서 어장 친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뭐래, 심장 분열하는 미생물이.’

똥 묻은 개가 나한테 멍멍 짖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어장을 친 적도 없었다. 싫다고 계속 말했는데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면서 들을 생각을 안 하는 건 너잖아.

나는 세상의 모든 황당함은 전부 다 짊어진 표정을 짓다가 대꾸했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를 곁에 두는 것과 마음이 여러 개인 것 중 어느 쪽이 더 질이 나쁜지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겠지요.”

“…….”

“제가 악마인지 천사인지 궁금하다고 하셨지요. 유감스럽지만 어느 쪽도 제가 맞습니다. 어떨 때는 악랄하게 굴고 싶기도, 또 어떨 때는 선행을 베풀고 싶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사람을 틀에 좀 가두지 마라. 나는 말을 이어 가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비록 소설 속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응당 자유롭고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충동적이고…….

“……샬럿도요.”

그래, 샬럿도.

‘샬럿을 틀에 가둔 건 나인가?’

고의가 아니었지만, 샬럿이라는 캐릭터를 착하고 선의로 가득 찬 인물로 설정한 건 나였다. 성녀라는 틀에 가둔 채 모두가 그녀를 떠받들게 한 것도 나였고, 실패를 맛볼 일 없이 오냐오냐 자라게 한 것도 나였다.

‘분명 제대로 충격받은 표정이었지.’

나는 샬럿이 내게 못되게 군다거나 나를 끔찍하게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편에 치우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달라졌다고 해도 그녀는 학창 시절의 나의 분신이었고, 이 소설은 오로지 샬럿을 빛내기 위해 존재했던 거니까.

물론 그녀가 대놓고 나를 해치려고 들면 당연히 반격하겠지만, 베르너와 샬럿 중 양자택일이라면 당연히 후자였다.

‘내 새끼는 까도 내가 까.’

베르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나는 빠르게 샬럿을 뒤따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등을 돌린 순간 ‘잠깐!’ 하는 짧은 외침이 들리더니 뒤에서 쿠당탕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베르너가 나를 뒤쫓아 오려다가 발을 헛디뎌 엎어져 있었다.

“저런.”

아무리 그래도 소드 마스터가 발이 꼬여 넘어지는 바보짓을 하진 않을 테니, 불행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네.

꼴사납기로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황태자는 미동조차 없는 게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구완 다르게 배려심이 매우 깊었기에 바실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은 뒤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샬럿은 예정과 다르게 고향에 다다르기 전, 다시 수도로 방향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한가롭게 가족들과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황태자를 사로잡아야 해.’

샬럿은 손톱을 아득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면에서 출중한 각양각색의 남자들을 누리고 있을 시절의 자신감과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가족들을 만나 같이 수도로 올 수 없었다. 그들은 샬럿이 수도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황태자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실상을 알게 되면 속상해할 게 뻔했다.

아니, 사실 속이 상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파산 직전인 가문의 재정 상태로 봐도 그랬다.

‘내가 가문의 유일한 희망인데…….’

다디단 꿈에서 깨어나 이제야 쓰라린 현실을 자각한 샬럿은 불안함에 덜덜 떨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갑자기 온 신경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음성이 끼어들었다.

샬럿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낯설지만 지독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화려한 여자가 서 있었다.

오늘도 세상을 혼자 살고 계시는군.

“위대하신 영웅께서 오셨네요.”

아일라와 샬럿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나른하게 감긴 짙은 녹색 눈동자와 파도처럼 격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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