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악녀 메이커 110화
샬럿은 아일라가 이미 자신의 본성이자 속마음을 훨씬 전부터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포자기 상태로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여긴 왜 왔어?”
보잘것없는 가난한 자작 영애가 공작 영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놓는데도 아일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말투로 받아쳤을 뿐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도망가는지 궁금해서.”
“하, 지금 나 약 올리러 온 거니?”
“말했잖아. 영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 그래서 행복해?”
“진짜 어이가 없네.”
샬럿은 눈물이 맺힌 눈가를 훔치며 표독스럽게 외쳤다.
심지어 아일라는 전에 봤던 집사는 어디에 뒀는지 다른 잘난 남자를 매달고 왔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듯 앳되어 보이긴 하지만 남에게 자랑하기에 충분한 번듯한 외모였다.
저런 남자가 알아서 꼬이는 모양이다. 그야 당연했다. 외모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꼴 보기 싫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보다 많은 걸 누리며 떵떵거렸던 건 언제나 샬럿이었기에 그녀는 아일라의 존재 자체가 고까웠다.
“평생 남의 비위 따윈 맞춰 본 적도 없겠지. 더 많은 관심과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을 꾸며 낸 적도 없었겠지.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잖아, 영애는.”
날카롭게 가시 돋친 말에 아일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샬럿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왜 없겠어. 인간인데.”
지금은 물론 누구보다 절실했던 전생까지 염두에 둔 말이라는 걸 샬럿이 알 리가 없었다.
샬럿이 짜증스럽게 눈을 치뜨면서 말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메르텐시아 가문의 막내딸이신 영애께서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 같은 것의 고충을 어떻게 알겠어?”
그 말에 아일라는 대뜸 물었다.
“영애는 자신을 꾸며 낸 적 있었어?”
“그럼 지금 내 모습에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
“보기 좋네.”
“……뭐?”
샬럿은 아일라가 예상치도 못한 발언으로 치고 들어오자 당황하여 잠시 주춤하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이제 전하만 있으면 되는데, 그마저 뺏어 가고서도 어떻게 이리 뻔뻔해?”
“아니, 난 진심으로 네가 황태자와 잘돼서 행복하길 바랐거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을 생각인 듯하지만, 아일라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황태자’라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칭호에 샬럿이 경악하는 사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뺏었다고 생각해?”
샬럿은 그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다.
“……또 내가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전하를 실망하게 했다고?”
샬럿은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눈을 부릅뜨면서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트란디아 공작도, 레녹스도, 베르너까지도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모두가 바라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았다. 그런데 그녀 주변을 맴돌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보였다는 이유로 쉽게 떠나가 버렸다.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일 수 있어?
멋대로 군 그들이 나쁜 거잖아.
“응, 네 잘못 맞아.”
“…….”
아일라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지만 너는 정도가 심하거든. 그래도 최소한의 배려는 했었어야지. 예를 들면 죽을 뻔한 네 목숨을 구해 줬으면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인간이 된 도리로.”
“…….”
“그리고 고백 받은 상대에게 여지를 남겨 주면서 여기저기 갈아탄 것도 좀 그렇지. 뭐, 네 맘이긴 하지만 그 책임은 스스로 책임질 각오는 했었어야지.”
“…….”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잔소리에 샬럿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딱히 틀릴 것 없는 말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샬럿은 아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반박하려던 찰나,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던 아일라가 말을 마저 이었다.
“이외에 네 잘못은 딱히 없지.”
이번에도 예상과 완벽히 엇나가는 말에 샬럿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도 잘못한 게 많지만 내가 보기엔 황태자 쪽이 더 글러 먹었어. 너는 그래도 여지를 남겼을 뿐 대놓고 고백은 안 했잖아. 그런데 그놈은 고백은 물리지도 않았으면서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니 정부로 들이겠대. 심지어 길들이겠다는 잡소리까지.”
“그, 그놈…… 잡소리? 미쳤어?”
샬럿은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괜히 제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샬럿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쉰 뒤 아일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발톱을 세우려고 해도 황궁에서 당당하게 황족을 욕하는 거침없는 기세에 살짝 기가 질렸다. 누가 엿듣거나 황궁 모독죄로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당당한 건지.
“그리고 나도 잘못한 게 있어.”
아일라는 덤덤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샬럿은 당연히 그녀가 말하는 잘못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좀 깨달은 게 있어?”
“…….”
왜 내가 뭘 깨달아야 해? 그딴 거 알 게 뭐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샬럿은 거친 말로 밀어내며 소리치려고 했지만 벌어진 입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천사 같은 널 사랑했대. 천사처럼 착한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대.”
그렇게 빈정거린 아일라는 새까맣게 칠한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모든 걸 다 잃었다고 믿고 있어? 그렇다면 널 더는 꾸밀 수도 그럴 필요도 없어졌네. 지금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는 수밖에 없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
아일라가 지금 하는 말은 하나같이 이미 샬럿이 레녹스에게 직접 들어 본 적 있는 말들이었다.
그는 그랬다. ‘내가 네 진짜 얼굴을 알고는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고. 그리고 그 자신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
저거 봐. 그것에 대한 해답은 이미 들었다고. 감당 못한다잖아. 실제로도 샬럿 주변의 모두가 그랬다.
샬럿의 본모습 같은 건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란 건 진짜 샬럿 같은 게 아니라 천사처럼 착하고, 성녀처럼 인자한 샬럿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기대에 충족했기에 그 대가로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거다. 그러니 포장하고 꾸미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걸 누가 좋아해.”
“안 좋아할 이유 있어?”
“실제로 모두가 떠났잖아.”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일라가 흠, 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망설임 없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적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금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보고 있는데 말이야.”
“…….”
대수롭지도 않다는 말에 샬럿은 뒤통수라도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멍하니 굳어진 채 연신 눈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렇게까지 편하게 타인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샬럿은 지금 입가에 경련이 일 정도로 웃지도 않았고, 가녀린 척 어깨를 떨지도 않았으며, 상처 받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지도 않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내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이지?’
알 수가 없어진 그녀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건 분명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이게 나야……?’
샬럿은 알 생각도 없었고, 평생 알게 될 일도 없다고 굳게 믿었던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엔 더없이 혼란스러웠으나, 글쎄.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뻥 뚫린 듯 더 후련하지 않았나 싶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잖아. 비록 그때는 황태자와 널 이어 주겠다는 뜻이었는데, 그게 네가 진정 행복해지는 길인지 알 수 없어졌으니…….”
아일라는 주저앉아 버린 샬럿을 따라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나 말고도 네가 어떤 모습이든 아무렇지 않아 할 사람이 언젠가 네 곁에 나타나겠지. 하지만 누군가 널 좋아하고 사랑해 주길 기다리기 전에 네가 먼저 자신을 사랑하면 어때?”
아일라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가 아닌 이웃이고 나발이고 네 몸을 우선으로 사랑하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사실 킬리안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그녀가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이타심을 강조할 리가 없었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선 타인을 이용할 수도 있지.”
“…….”
천사인 척 위장하는 것이 몸에 배 있는 샬럿은 뭔가 이상한데, 하고 생각했으나 사실 내심 더한 것들도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건 당연한걸. 그리고 세상에 타인을 위해 모든 걸 바쳐 헌신하는 사람은 드물어. 있더라도 언젠가 지쳐 떨어질 테지. 그러니 남한테 온전히 의지하면 너도 같이 지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아일라는 침묵을 지키는 샬럿을 향해 짙은 미소를 보이며 결론지었다.
* * *
결국, 질렀다.
여자 주인공한테 남자 주인공은 답이 없으니 네 모습을 그대로 받아 줄 다른 사람이나 찾으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기 전에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나고 타인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자신을 먼저 갈고 닦으라는 소리도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푹푹 하고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자정을 맞이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고, 결국 루프가 일어나지 않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나와 킬리안이 추측한 모든 가설이 완벽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소설 속 세부적인 내용이 틀어지는 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저지른 행동은 지금 당장 신이 내려와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다가 하루를 수백 번 돌려도 모자랄 짓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주인공의 대외적인 모습은 물론 남자 주인공을 갈아 치우려고 했잖아?
“……젠장,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 볼까.
나는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상념에 잠겨 있다가 서랍을 뒤적여 양피지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편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피아, 그간 안부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했구나. 황궁 시녀는 할 만하니? 전에 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고 했지? 다름이 아니라…….]
소피아는 용건만 간단히 전하는 걸 좋아할 것 같아서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정신 사납게 알짱거리며 내가 편지 쓰는 모습을 구경하던 바실리가 갑자기 책상 위에 널브러졌다. 그리고는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고양이처럼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귀여워서 화를 못 내겠다.’
내가 꺼내 둔 물건들이 그의 등 밑에 무참히 깔리고 짓뭉개졌다. 나는 사고뭉치의 볼을 꾹 꼬집어 잡아당겼다.
“뭐 해, 인마.”
“날 쳐다볼 때까지 기다려.”
그럼 그냥 평범하게 말을 걸어.
나는 바실리를 옆으로 데굴데굴 굴려서 치워 낸 뒤에 구겨진 양피지를 열심히 눌러 펴면서 물었다.
“할 말 있어?”
“응, 밑에 불났어.”
불이 났구나. 너무 태연한 말투에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가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