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악녀 메이커 111화
바실리가 불이 났다고 주장하는 곳은 주방이었다.
주방이라면 화기를 다루는 곳이니 확실히 화재에 취약할 만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나는 당황해서 허둥거리며 방 밖을 나섰다.
“아니 이게 무슨 일……! 쿨럭!”
주방까지 달려 내려온 나는 풀풀 풍기는 검은 연기에 잠시 기침을 터트렸다.
그런데 불이 난 것치곤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데?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흐트러트린 나는 주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딘지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프라이팬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슬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
“…….”
저 인간의 소행이었나.
흘낏 검은 연기의 출처를 보니 불이 난 건 아니었다. 그냥 요리였을 무언가가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 있을 뿐.
나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가 신이 난 표정으로 달려온 바실리를 한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그의 볼을 쭉 꼬집어 늘리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 저 정도로 불이 났다고 하는 게 아니란다.”
“그래?”
어휴, 식겁했잖아.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 주방 안쪽으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나저나 사용인들은 다 어딜 가고 아슬란이 요리를 하는 거지? 그것도 음식을 다 태워 먹으면서 말이다. 어딘지 곤혹스러워 보이는 표정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을 보니 요리에 익숙해 보이지도 않는데.
나는 표정은 없으나, 어쩐지 비 맞은 개처럼 처량 맞아 보이는 아슬란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왠지 모르는 척해 줘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주방까지 들어와 놓고 슬슬 뒷걸음질 치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나는 그의 곁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배고프셨어요?”
지금 딱 출출해질 타이밍이기는 해.
“……아니.”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이었다.
“사용인들은 다 어디 갔어요?”
“내가 내보냈다.”
“오라버니께서 직접 요리할 필요가……?”
딱 봐도 요리를 처음 해 보는 모양새인데, 요리를 배우고 싶은 거면 사용인들에게 직접 안전하게 배워야지. 안 그러니까 다 태워 먹고 불낼 뻔한 거잖아.
여담인데 이 세계에서 요리란 과장 좀 보태서 하나의 예술로 취급 받고 있었다. 그리고 ‘끼니를 때운다’는 표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그만큼 식도락을 즐기고 요리사나 과자 장인들이 각광 받는 시대이며, 황제나 왕이 요리를 개발하여 직접 본인의 이름을 붙이거나 귀족들이 주방을 직접 드나드는 일도 잦았다.
최근엔 요리도 귀족의 기본 소양으로 넣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귀족이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진 취미의 한 요소일 뿐이니까 소질이 없으면 애당초 포기하고 주방 근처에도 가지 않는 귀족들도 없지 않았다.
아슬란은 한참을 조용히 침묵했고, 더는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드디어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곧 아버지의 생신이시니까. 무엇을 드릴까 하고 여쭤봤더니…… 물질적인 건 어차피 받아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테니 받지 않겠다 하셨다.”
그래서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에 도전했다는 거군.
“꼭 요리였어야 했나요?”
“손재주가 없어서…….”
“취미는요?”
“글 쓰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거다.”
“꽤 괜찮은 취미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역시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이야.
분명 아슬란도 최고로 아끼는 작가님을 한 번이라도 납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겠지.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그는 어쩐지 내 시선을 부담스럽다는 듯 피하며 우물거렸다.
“편지를 써 볼까 생각도 해 봤다만…….”
“아, 그거 좋네요. 물질적인 게 싫으시다면 역시 마음이 담긴 편지죠.”
“……첫 문장에 태워 버렸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안, 뭔가 문제가 있어. 가족끼리의 유대를 일하듯이 의무적으로 맺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다시 써 봤는데,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봐도 될까요?”
내 말에 아슬란은 품속에 둘둘 말아서 넣어 두었던 양피지를 꺼냈다.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훑어본 뒤에 감상을 말했다.
“보고서?”
공작 밑에서 일한다더니, 생일을 챙기는 것 또한 그것의 연장선인가.
“사랑한단 말은 없어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의 기본 멘트 아닌가?
“사랑……?”
그러자 아슬란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두 글자가 마치 혀에서 겉도는 듯했다.
이런 인간이 로맨스 소설 하드 독자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링테 작가와 친구가 된 거람.
“뭐, 아버지라면 오히려 이쪽을 마음 편히 받으실 것 같지만요.”
아슬란은 내게서 넘겨받은 양피지를 아궁이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지령을 받은 건 처음이야.”
역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혹시 메르텐시아 공작이 말하는 ‘물질적인 건 주지 말라’는 말도 정말 말 그대로 선물은 귀찮고 쓸모없으니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뜻 아니야? 그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메르텐시아 공작의 생일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지금에야 처음 알고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생일도 챙겨 주지 못할 뻔했잖아. 그래도 공작 덕분에 작위까지 생기고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는데, 그 정도의 작은 성의는 보여야 당연한 거겠지.
나는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생일이면 역시 케이크 아닐까요?”
“요리할 줄 아나? 금시초문인데.”
아슬란은 인형처럼 새까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기대에 찬 기색이었다. 그만큼 내가 오기 전까지 막막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밀가루 자루에서 밀가루를 퍼내며 말했다.
“자취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야매긴 하지만.
* * *
그리고 결과는 예상보다 처참했다.
바실리는 내가 아궁이에서 꺼낸 쇠로 된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불났어.”
아 글쎄, 이 정도는 불이 난 게 아니라니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가스레인지라든지 오븐 같은 요리 기구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불 조절을 해 가며 요리하는 것은 엄청난 난이도를 요구한다는 것을. 지금 당장 마법 상용화가 절실합니다.
아슬란은 사실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불 조절을 못했을 뿐인 것 아닐까? 나는 새까만 연기를 풀풀 풍기는 빵…… 이 돼야 했을 잔해를 착잡하게 내려다보다가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슬란은 나를 기대 어린 시선으로 볼 땐 언제고 이제는 뭔가 전부 내려놓은 듯한 생선 동태 같은 눈으로 마주했다. 잠깐, 체념이 너무 빠르잖아! 불 조절을 못했단 이유로 내 요리 실력이 폄하되다니, 억울하다!
왠지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밀가루를 퍼 담아 반죽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감 잡았어요. 제대로 구울게요.”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사위가 깜깜하게 물들었다.
바실리는 내가 구운 새까만 덩어리를 보다가 속삭였다.
“이건 진짜 불난 거 맞지?”
“조용히 해.”
이번에는 숯도 아니고 용암을 구워 냈다.
나는 불타는 반죽을 아궁이에 던져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불 조절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갑자기 한동안 잊고 살았던 현대 문물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굽는 건 따로 요리사에게 부탁할까요?”
“그럼 의미가 없잖아.”
아슬란은 굽는 것까지 우리가 완벽하게 해내야 그것이 진정한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성실하고 고지식하다. 그런 점이 싫지는 않지만, 세상 좀 요령 있게 삽시다, 네?
아무래도 요리는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럼 대체 무엇을 줘야 하는가. 아슬란과 머리를 맞대고 생일 선물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쿨럭, 하는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소란이지?”
헉, 본인이 등판했잖아!
이제 막 황궁에서 돌아온 듯, 공작 빈센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방을 가득 채운 연기 때문에 인상을 쓰다가 밀가루를 여기저기 묻힌 채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나와 아슬란을 보고 더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이 불쾌해 보인다기보단 대체 이게 무슨 광경인지 해석하기 힘겨워 하는 듯 보였다.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건가?”
아냐. 이 나이 먹고 소꿉장난하는 남매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나는 생일 선물로 케이크를 구우려고 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처음 이 일을 주도했던 아슬란에게 발언권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슬란을 돌아보니 그는 먼 곳에 시선을 두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웬만하면 아무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너, 내가 창피하니?
“어, 음, 요리를 해 보려고 했는데요…….”
나는 공작을 마주 보며 운을 뗐다.
그의 등 뒤에는 아슬란이 쫓아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방 식구들이 어쩐지 공작을 응원하는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우리를 쫓아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뭘 만들고 있었던 거지?”
그가 내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숯덩이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믿기진 않겠지만 케이크입니다.”
“……잠시 옷을 갈아입고 오지.”
네? 하고 되물을 새도 없이 빈센트는 빠르게 주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보다 더 편해 보이는 복장으로 나타난 그는 팔을 걷고 능숙하게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제대로 계량하지도 않고 건성건성 하는 듯하면서도 정확하게 딱딱 각이 맞아 떨어지는 동작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어딘지 엉성하고 버벅거리던 내 모습과 하늘과 땅 차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저것은 아무리 봐도 장인의 손길인데.’
내가 언젠가 킬리안에게 야식을 부탁했을 때, 그가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주방에서 공작과 마주쳤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게 바로 이 뜻이었나? 빈센트가 완벽 주의자라는 걸 진작부터 알기는 했지만 설마 요리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공작은 본인의 생일 케이크를 본인 스스로 만들게 되었다.
나는 그 경이로운 손놀림을 옆에서 멀뚱히 지켜보다가 뒤늦게 핫, 하고 정신을 되찾았다.
이대로 공작이 본인 생일을 스스로 자축하는 꼴이 되도록 두고 볼 순 없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우유에 버터, 달걀노른자를 넣고 생크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뭐 도울 게 없나?”
“그럼 이거 거품기로 저어 주세요.”
팔에 알 생기는 엄청난 노동을 아슬란에게 떠맡겼다.
그런데 현대인의 요리법에 맞춰진 내 짧은 요리 지식이 이번에도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슬란이 아무리 저어도 생크림에 폭신폭신하게 일어나지 않고 그냥 뽀글뽀글한 기포만 생길 뿐이었다. 이거 휘핑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팔에 힘이 부족한 건가? 싶어서 바실리에게 부탁했다.
“이것 좀 저어 줘.”
그리고 바실리는 거품기를 우지끈 부러트렸다.
“이거 너무 약해요. 고장 났나 봐.”
그는 허리가 꺾인 거품기를 등 뒤로 던지며 말했다. 그리고 새로운 거품기를 꺼내 혀를 빼물면서까지 열심히 젓다가 이번에는 품에 안고 있던 믹싱 볼을 우그러트렸다.
‘미세한 힘 조절이 전혀 안 되는군.’
바실리는 종잇장처럼 꾸깃꾸깃해진 그릇을 실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등 뒤로 내던지고 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편에서 우리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주방 요리사들의 뒷골 잡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해되니 나가 있어라.”
그리고 공작은 그런 우리를 향해 혀를 쯧쯧 차더니 축객령을 내렸다.
잠시 후, 메르텐시아 공작 저 식당에는 어딘지 가정적이면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생과일 수제 케이크 하나가 마법처럼 뚝딱 차려져 있었다.
케이크 만드는 법.
1. 재료를 준비합니다.
2. 재료를 활활 태웁니다.
3. 아버지,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4. 케이크 완성.
나와 아슬란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싶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잠시 타이밍을 재다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말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그러자 아슬란이 무표정하게 엇박자로 손뼉을 따라치면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