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악녀 메이커 112화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다.”
앗, 그랬지. 참. 아슬란은 빈센트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고는 했지만 그게 오늘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야 진짜 아일라가 아니니까 날짜를 자세히 몰랐다고 쳐도 아슬란 너는 왜 날 따라 박수 소리를 내고 그래?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그를 속으로 타박하며 돌아보았다. 별 반응이 없는 무덤덤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분위기 타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슬란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생신날까지 완벽하게 숙달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신 겁니까?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애매한 지령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필요 없대도.”
진짜 필요 없어 보이는데?
아슬란은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불편함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빈센트가 찬바람 쌩쌩 부는 서릿발 같은 포커페이스로 마주했다.
‘하여튼 저 부자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용인에게 칼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하여 케이크를 잘랐다.
공작의 생일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내가 마다할 리가 없지. 조각씩 잘라 접시에 담아서 내밀자, 누가 누가 더 정색하나 싸우고 있던 두 부자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나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볼 의도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러자 빈센트가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얌전히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우아하게 포크로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어디 요리 장인의 솜씨 좀 봅시다.
나와 아슬란 또한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맛봤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공작을 마주 보았다. 메르텐시아가의 실력 좋은 요리사 덕분에 입맛이 까다로울 대로 까다로워진 내 입에도 잘 맞는 탓이었다.
“와…… 진짜 맛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뭐랄까, 가정의 맛이었다. 갓 구운 촉촉한 시트와 신선한 과일, 그리고 고소한 우유 크림이 조화를 이룬 따듯한 애정과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맛.
‘정작 이걸 만들어 낸 당사자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반전의 맛…….’
나는 뒷말을 케이크와 함께 꿀꺽 삼키며 공작에게 맛있다고 연신 칭찬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맛있는 음식에 대한 칭찬은 인색하지 않지.
“이런 건 오랜만에 먹어 봐요. 파티시에가 철저하게 각 재고 만든 디저트 말고 이런 맛이 그리워질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한때 일부러 가맹점 말고 작은 빵집을 찾아다닐 때가 있었지.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못 만들어 줄 것도 없다.”
그러자 빈센트는 그런 무뚝뚝한 대답을 들려준 뒤, 자신의 몫으로 나온 케이크를 뚝딱 해치워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공작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아슬란에게 물었다.
“내심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아요?”
“전혀.”
내가 은밀하게 속삭인 질문에 아슬란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냐, 미세하고 세심하게 관찰해 보라고. 입꼬리가 나노 단위로 꿈틀거렸다고.
“하지만 역시 요리는 안 되겠죠?”
요리 장인의 생일에 케이크를 구워 줘 봤자 오늘처럼 타박만 듣고 큰 감동은 없을 것 같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또한 크게 동의하는 눈치였다.
“역시 편지를 쓰죠.”
“…….”
“그 보고서 같은 편지 말고요. 생신이시니 마음과 사랑을 담아서.”
“그런 건 무의미해.”
아슬란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은 뒤 인상을 와락 썼다. 지금에서야 오라버니로서의 위엄 같은 것을 보이면서 위기를 벗어나려는 수작인 모양인데, 당신은 이미 글러 먹었어.
“부끄러워하지 말고요.”
“부끄러운 건…….”
“사실은 오라버니도 내심 느끼잖아요? 우리 집안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요. 서로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잖아요.”
“자, 잘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건 힘들 테니, 일단은 편지로 시작하자는 거죠.”
나는 온몸으로 거부하는 아슬란을 씨알도 먹히지 않는 단호함으로 대응했다
아슬란은 첫 문장을 쓰고 찢어 버렸다는 그 편지를 떠올렸는지 창백하게 질리더니 세상 근심 다 짊어진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과 사랑은 모르겠고, 네가 제안하는 의도는 알겠어. 고려해 보지.”
“네, 잘 생각하셨어요.”
나는 말 잘 듣는 아슬란의 새까만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일라에게 화목한 가정을 되찾아 주는 것도 이젠 그렇게 막막하고 요원한 일이 아니었다.
조만간, 이제 곧 그렇게 되겠지.
* * *
불행은 행복의 그림자라는 말이 있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고 오래갈 거라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름 모를 새소리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지는 새벽,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흐르는 기묘하고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니고, 무언가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불현듯, 눈이 번쩍 떠졌다. 이유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
뭐지. 나는 흉부를 들썩이며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거칠고 가쁜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아, 알겠다. 이 위화감.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치 무덤처럼.
‘……킬리안.’
없다. 그는 잠시 제국을 떠났어.
‘바실리는?’
매일 새벽부터 똑똑 문을 두들긴 뒤 문틈 사이로 빠끔 고개를 내밀었던, 밝지만 상처 많은 소년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소식이 늦다.
너무 조용한 탓에 물속에 잠겨 있는 듯 귓가가 먹먹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바닥에 비친 어슴푸레한 빛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날카로운 새벽바람에 몸을 뒤트는 것도 시야 끝에 걸렸다.
발걸음을 한 발짝씩 떼어 내는 것도, 천천히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리는 동작 하나에도 온 신경이 곤두섰다.
부디 별일 아니기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지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확신이 있었다.
찰나의 순간, 수만 가지의 번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결심이 선 끝에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우욱…….”
바닥에 피가 낭자했다.
짙은 피비린내가 내 모든 감각을 순식간에 확 깨웠다.
시야에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피의 바다요, 시체의 산이었다. 어제까지 식사를 챙겨 주고 방을 정리 정돈해 주던 내 하녀들이었다.
“도, 도비엘…….”
나는 눈에 익은 갈색 머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이름을 더듬거리다가 결국 벽을 짚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다. 빈속이라 신물밖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구역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검은 마력이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는 마물의 시체와 현저하게 달랐다.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 그들 주위로 원한까지 떠돌 듯 처절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곳에 누군가의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환청이었다.
대체 이건 무슨 악몽인 거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어?
현실은 늘 상상을 초월하고는 하지만 이런 현실이라면, 나는 대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이성을 되찾고 침착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뿐이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차라리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현실을 외면하고 방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기어가듯 천천히 벽을 더듬으며 걸음을 떼던 나는, 어느새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찰박거리며 온 사방에 튀겼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그들이 제발 무사하기만을 저주하기 바빴던 신의 이름을 대고 끊임없이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인간이란 참 간사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바닥에 쌓인 시체들을 의자 삼아 걸터앉은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무료한 얼굴로 한 손에 들린 나이프를 빙빙 돌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하곤, 길게 찢어진 여우 같은 눈을 둥글게 휘었다.
“아가씨 타이밍 좋네. 기다리다 지쳐서 직접 찾아갈까 생각했는데…….”
“…….”
“아무래도 내가 너무 조용하게 처리했어. 그렇지?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었어. 아가씨가 이해해.”
“미친 새끼…… 너 누구야.”
“욕을 할 겨를도 있어? 실신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정신력 강하네. 이래서 우리 개가 한눈에 반했나 봐?”
우리 개.
그렇게 말한 남자는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를 발로 톡톡 건드렸다. 머리가 폭사한 듯 끔찍한 형체의 시체의 손가락에는 킬리안이 건네주었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바실리.
순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뒤늦게 곤두박질치듯 돌아왔다.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는 심장을 움켜쥐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뒤늦게 무릎을 꿇고 소년의 손을 꼭 쥐었지만, 차가워진 손을 열심히 주물렀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은 온기는 돌아올 리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밤의 거리의 주인 린다.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눈동자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악귀 같은 사내.
“……죽였어?”
이미 확인한 것을 굳이 되묻는 넋 빠진 내 질문에 여상스럽게 답한다.
“머리가 터지면 못 살지?”
린다는 정신이 나갔다, 정도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인간인 척 흉내 내는 괴물이었다. 네 개라면서. 한순간에 쳐 낼 정도로 이용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리 배신감을 느꼈다지만 살려 둬야 할 거 아니야. 차라리 편히 보내 주지, 이렇게까지 아프고 비참하게 죽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창백하게 질려 중얼거렸다.
“가족…… 가족은……? 내 가족…….”
“살려 두면 의미가 없지.”
살려 두면 의미가 없어?
나는 가슴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일그러트리던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촘촘하게 엮여 내 정신을 붙잡고 있던 수많은 연결 고리가 뚝 끊겼다. 나를 밑바닥까지 끌어 앉힌 새까만 절망은 순식간에 독기로 끓어올랐다.
내가.
저 새끼는 내가 죽이고 말 거야.
그들이 이유 없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몇 배는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열어 심장을 갉아 내어 죽이고 또 죽이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어도 또 죽이고 죽일 거야.
나는 빠르게 손을 뻗어 놈의 멱살을 붙잡고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다고 린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반쯤 미쳐 버린 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리가.
“어이쿠.”
여유롭게 피하던 린다는 내 손톱이 그의 살을 할퀴고 피가 튀었을 즈음에야 놀랍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가로지른 생채기를 쓱, 훑더니 피 묻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가씨, 성깔 보통이 아닌데? 보통은 살려 달라고 비는 게 먼저잖아.”
그딴 거 알 게 뭐야. 네놈이 모두를 죽여 버렸는데. 죽일 테면 죽여 보든가.
“……아니? 네가 빌게 될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될 거야.
신성력이든 뭐든. 나를 둘러싼 신의 가호든 뭐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닥까지 긁어내서, 토해 내서라도 널 여기까지 끌어내릴 거야. 이보다 더 깊은 진창에 처박아 버릴 거야.
“그래? 보람차네, 이거.”
그러자 린다는 내 말이 우스웠는지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옥에서 인간을 농락하기 위해 올라온 악귀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럼 지금 아가씨부터 스스로 살려 봐. 나 진짜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와 동시에 목에 칼날이 꽂혔다.
* * *
깊은 밤, 복도의 괘종소리가 댕댕하고 열두 번 울리는 자정 열두 시.
나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