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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13화 (113/131)

# 113

악녀 메이커 113화

“……!”

나는 격하게 헛숨을 들이쉬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며 기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마지막 순간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단박에 급소가 찔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가 한 방울, 한 방울씩, 느릿하게 시야에 잡히고 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목은 멀쩡했다. 심지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칼날이 목을 파고들고 꿰뚫렸을 때의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환지통을 겪는 환자처럼, 있지도 않은 통증을 찾아 몇 번이고 목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두근댔고 자꾸 숨이 차올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파랗게 질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어.

죽으면 하루가 돌아가는 거였어.

내 목숨을 담보로 차마 실험해 보지 못했던 가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내가 현재 살아 숨 쉬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죽기 직전, 그 일이 벌어진 건 이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을까, 하고 악몽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힘든 기억이었다.

린다, 린다. 그 개자식.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를 찾아오라고 바실리를 보냈다던 그는 대체 내가 있는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가. 그리고 아까는 이성을 상실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평범한 인간인 그가 주술사인 바실리를 어떻게 죽인 것인가.

소설 속 린다는 이름으로 잠깐 언급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자세한 설정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번 일로 그가 멍청한 캐릭터가 아님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오래 암흑가를 다스리며 정상에서 버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린다는 바실리에게 나를 잡아 오라고 명령했지. 그가 하루가 열 번 반복해서 되돌아갔던 팔링게아의 날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열두 시를 기점으로 하루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이기 전에 그 사실 또한 계산 안에 포함해 놨을 터. 만약 그렇게 가정했다면 지금 린다는 어디에 있을까.

‘저택 안.’

내가 깨어난 것은 어스름한 새벽, 즉, 이미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하루가 되돌아갔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기껏해야 네댓 시간 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애써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집어삼켰다.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지금 당장 터트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울 때 모두의 목숨과 함께 자멸을 택하는 길이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랍을 헤집듯이 전부 뒤집어엎은 뒤에야 겨우 단검 하나를 찾아내 손에 들었다.

나는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미뤘던 아까와는 다르게 단박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역시…….’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적막한 복도를 내다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환각처럼 아른거리는 붉은 것들은 이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린다가 나와 교섭하고자 한다면 아까는 하루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쇼이며, 아무도 죽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죽여도 죽지 않고 계속 하루를 돌리는 내가 배 째란 식으로 나오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을 테니까.

그는 킬리안의 변수를 모른다.

내 신성력이라는 변수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내 능력을 원하지.’

나는 내게 뭔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세 치 혀를 놀려서라도 그 자식을 처단하고 말겠다. 그렇게 이를 아득 갈면서 무작정 달렸다.

“아……!”

나는 내 방에서 가장 가까운 아슬란의 방문을 벌컥, 열면서 소리쳤다. 아슬란,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으나 괜히 목이 메어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화롯불 근처에서 무언가 빼곡하게 적힌 편지지를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슬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일라?”

그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움찔하다가 허둥지둥 편지지를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이 야심한 밤에 다짜고짜 단검을 들고 들이닥친 여동생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일라?”

“…….”

살아 있다. 다행이야, 살아 있었어.

아슬란이 살아 있다면 빈센트도, 바실리도, 도비엘라도 살아 있을 것이다.

한계까지 치솟은 긴장감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울컥하고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결에 방을 잘못 찾아왔나 봐요.”

“잠깐, 설마 우는 건가?”

아슬란은 황급히 방문을 닫고 빠져나가려는 나를 놀라 붙잡았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

“꾼 모양이군.”

악몽이 아니야. 현실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계속 끝나지 않은 현실이야.

그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입을 다문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꾹 쥐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네가 이러는 건 처음이라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따뜻한 우유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지금 사용인을 부르마.”

“아뇨, 아니에요. 계세요. 여기 계세요. 부디 이 방에 꼼짝도 하지 말고 계세요, 아셨죠?”

나는 얼굴과 음성에서 울음기를 완전히 지워 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뒤 단호하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그를 방에 있게 하는 게 안전할지 저택 밖으로 피신시키는 게 안전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이쪽이야? 우리 개가 이거 보면 섭섭해 하겠는데.”

……어떻게!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등을 돌렸다.

린다의 붉은 눈이 흥미로움을 가득 담고 반짝였다. 그는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서 마치 관전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관찰하고 있었어.’

저 개자식은 지금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듯하다. 나를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두 눈을 후벼 파고 싶었다.

나는 아슬란을 내 등 뒤에 감추려고 노력하며 가리고 섰다.

“누구냐. 어디서 들어온 거지?”

아슬란은 갑자기 내 뒤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외부인이, 심지어 이상한 말을 하자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뒤늦게 경계하며 물었다.

하지만 린다는 아슬란을 없는 사람인 양 완전히 무시하고는 내게 말했다.

“아가씨가 신의 가호라도 받고 있는 것 같단 말이 사실이었어. 그래, 이제야 느낄 수 있게 됐지만 내가 봐도 그래.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어째서 신같이 전지전능한 분이 이런 여자 하나 때문에 하루를 되돌리지?”

너야말로 어떻게 조금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있지? 게다가 신의 기운을 느낀다니.

킬리안이나 바실리야 같은 주술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린다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설정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린다는 자신이 더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했다.

“신의 조각을 먹은 나도 받지 못하는 그분의 가호를 그 볼품없는 몸으로 어떻게 받고 하루를 돌리느냔 말이야.”

“뭐……?”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심 품었던 의문을 단박에 해결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가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는지, 바실리를 어떻게 죽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등 뒤로 뜨거운 액체를 뒤집어썼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털썩하고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목 뒤를 더듬거렸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액체와 살점이 묻어나왔다.

“…….”

차마 뒤돌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슬란이 죽었다. 아마도 바실리를 죽였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래서 이젠 어쩔 거지, 아가씨?”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거지. 내 개를 포함한 모두를 살려 줄 테니 순순히 나를 따라오든지, 아니면 아가씨의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부리든지.”

“…….”

“하지만 그 전에 아가씨 기 좀 죽여 놔야 할 것 같아. 난 꼬리 말고 빌빌거리는 개 쪽이 취향이거든.”

“누가 이기나…….”

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빼냈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 봐.”

나는 린다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 * *

신의 조각.

그게 대체 뭔지 궁금했던 나는, 킬리안이 없는 사이 제국 신화를 찾아보았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읽히는 신화가 아니라, 고대부터 항간에 떠돌던 야화를 짜깁기해서 소설처럼 엮어 놓은 책에 쓰여 있던 내용이었다.

책에 따르면 이 세상은 수도 없이 많은 차원과 그 차원을 다스리는 신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전에 살던 행성을 지구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 세계 사람들은 이 행성을 ‘란드리아’라고 칭했다.

아마도 수천억 년 전, 란드리아의 신은 자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인간을 가장 사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랑이 지나친 것에 있었다. 마치 자식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처럼, 란드리아의 신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차원 전체의 혼란을 일으켰다.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힘, 그다음은 부, 그다음은 권력. 모든 것을 얻고 나자 그들은 슬슬 신의 힘을 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란드리아의 신은 그들을 섬기는 신관들에게 ‘신성력’을 허락했다. 하지만 인간은 고작 신의 힘을 빌리는 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신들에게 ‘권능’을 요구했다. 오만한 인간들은 신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했던 미련한 란드리아의 신은 그러겠노라 했다.

그러자 사태를 관망하던 다른 차원의 신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신들은 인간과 달리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오로지 세상의 질서와 인과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당연히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질서에 크게 위반되는 일. 결국, 지금으로부터 수억 년 전, 이곳 란드리아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발발한다.

결과는 뻔했다.

전 차원을 상대로 란드리아의 신이 이길 리는 만무했다. 말이 전쟁이지 사실은 일방적인 대학살극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신은 죽었고, 신의 육체는 수천 개의 조각이 되어 대륙 곳곳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은 차원의 법칙에 의해 그 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죽은 신’이라고 불렀다.

그 후 ‘레제르브’가 그 죽은 신을 대신하여 이곳 란드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레제르브는 죽은 신의 조각을 수습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시련을 주고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교훈 삼아 인간들은 절대 신의 권능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게 바로 신화가 주는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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