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악녀 메이커 114화
그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야기의 교훈은 대체 뭔데? 신의 권능을 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린다에게 언제쯤 천벌이 내려오는 거야?
신의 조각을 먹고 신의 권위에 도전한 건 린다인데 왜 시련은 내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이라는 레제르브는 지금 손 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건가?
그 언젠가 린다가 신의 벌을 받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해도, 우리가 겪은 고통은 뭐가 되는 거지?
나는 킬리안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슨 일을 겪어 왔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왜 그렇게까지 신을 저주하고 증오하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레제르브란 철저한 방관자.
그는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약한 자든 강한 자든 모든 이들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 평등하게 방관당한다. 제발 도와달라 아무리 부르짖어도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는다.
무슨 절절한 사정이 있든 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똑같이 처벌한다. 그것이 신들이 말하는 평등, 질서, 인과율, 법칙, 순리.
그것이 가여웠다.
진절머리 나게도 안타까웠다.
다가가 손을 뻗어 주고 싶었다.
태초의 신은 왜 인간을 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서 이리도 편파적인 마음을 품도록 만든단 말인가.
‘……어, 누가?’
나는 잠시 내가 한 생각에 위화감을 느끼고 주춤했다.
무언가 때문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어딘가 정신이 뿌옇게 흐려져서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또 어딘가의 지옥도.
이제는 피비린내도 시체도 익숙해져서 딱히 아무런 타격조차 들지 않는다. 괜찮아, 어차피 또 죽고 억지로 시간을 돌려서 살리면 되니까.
그런데 바실리는 울고 있었다.
왜 울어, 아가.
“아가씨, 미안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의미 없는 싸움에서, 나와 린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루프를 자각하는 바실리. 그는 계속 주술을 사용해서 린다와 싸워 보려고 했지만, 신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결국, 힘겨웠던 걸까.
“뭐가…… 네가 뭐가 미안해.”
“아가씨 앞에 나타나서…….”
“…….”
“따라가서…….”
그는 매번 머리가 터지거나, 목이 잘려 나가거나, 아니면 린다의 심심풀이로 신체 일부가 하나하나 잘려 나갈 때마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죽어 갔다. 미안해, 미안해.
주술사들이 주술을 쓸 때면 손끝에서 퍼지는 황금의 빛처럼 찬란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동자.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일렁이던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야, 우리 멍멍이 많이 컸네. 그새 울 줄도 알게 됐어? 다 컸잖아?”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린다는 그 꼴을 보고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놀랐다는 듯 감탄했다.
“누가 보면 사람인 줄 알겠어.”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은 각성제라도 맞은 것처럼 또렷해졌지만, 반대로 이성은 서서히 흐려져만 갔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짐승 같은 본능만 살아남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도 원통함도 절박함도 점점 흐려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이 시각에 무슨 일이지? 그렇게 창백하게 질려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요즘 여러모로 너무 무리라도 한 건 아닌가?”
다시.
“……아일라?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다시.
“아가씨, 어쩐 일이세요? 뭐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이 도비엘라에게 말씀해 주세요!”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나는 어떻게든 린다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분노에 완전히 지배당해 있었다. 텅 빈 머리로 그저 울먹이는 바실리에게 손을 뻗다가, 또 그의 몸이 풀썩 쓰러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몇 번 죽임을 당했을까.
몇 번 나 자신을 죽였을까.
‘알잖아, ―――.’
한 시간? 아니,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길어 봤자 30분, 짧으면 수분 단위로. 나는 죽고, 죽고 또 죽고, 죽고, 또 죽다가…….
‘원래 인간은 다 그래.’
그러다가.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이고.’
정말로 미쳐 가는 건지.
‘끝도 없이 바라고 또 바라지.’
수많은 환청을 들었고.
‘더 내어 줄 셈이야? 어디까지?’
어느 순간.
‘그거 알아? 너는 결국, 네 몸까지 양보하고 인간들에게 일용한 양식이 될 거야. 뼈까지 씹어 먹히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네 존재를 잊겠지.’
깨닫고 말았다.
‘미련한 ―――. 네 부스러기 같은 냉정은 여기 두고 가. 그때가 되면 네 영혼까지 먹히기 전에 거둬 줄게.’
지금껏 끝도 없이 루프를 일으키는 근본, 근원, 신의 고유 권한,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힘의 원천.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 * *
동대륙 진원국(進原國).
설경궁 별채에 마련된 손님방 잠자리 위에서 눈을 뜬 킬리안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 닿은 목화솜 이불과 마룻바닥이 마치 타고 남은 연탄처럼 순식간에 재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킬리안은 한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득한 고뇌가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미치겠군.’
대체 이게 몇 번째 루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림잡아 70에서 80, 그 즈음 되었을 것이다.
킬리안은 루프가 일어난 시점에서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아일라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기지 않는 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의뢰 같은 건 뒷전으로 돌리고 곧바로 레테 제국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처음부터 불발이었다. 5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자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직감으로 느꼈다. 팔링게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아무리 킬리안이라도 몇분 만에 대륙을 건널 재간은 없었다. 그래도 한계까지 힘을 쥐어짜 어떻게든 건넌다고 해도 건너는 것으로 한계였다. 눈을 뜨면 다시 자정, 동대륙.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권태와 체념의 사이, 그 어딘가를 유영하며 살아가던 세월이 수백 년. 초조함에 속이 온통 타오르고 무력감에 잠겨들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오면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킬리안 것이라고 새겨 줄 거예요?
그 말에 무슨 대답을 들려줬더라.
나비의 날갯짓처럼 하늘거리던 붉은 속눈썹이 자꾸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아일라, 그 세 글자는 수백 년의 세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그의 온몸에 새겨진 각인이었다.
동한다면 기꺼이 망가져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잘난 듯이 그 말을 뱉기 훨씬 이전부터 망가져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킬리안은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아일라로 가득 새겨져 있었다.
신이든 뭐든.
그녀가 사실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레제르브라고 해도 조금도 관계없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안 것인지.
그러나 깨달음은 언제나 늦었다.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품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루프가 끝도 없이 일어난다는 건 적어도 아일라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킬리안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노여워하고 있군요.]
망자의 강을 건너기 전, 킬리안의 이끌림을 받고 잠시 이승에 머물게 된 왕비, 은영이 말했다.
킬리안은 잠시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속에는 이성을 완전히 배제한 광염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분노는 은빛 불꽃처럼 그의 눈에 잠겨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마주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문을 동원해 숨통을 끊어 놓을 것처럼 음습한 분노였다.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영혼은 시간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지.”
[저는 망령입니다, 카일룸.]
“그대는 분명 내게 은혜를 입었어. 그렇지?”
[카일룸.]
“레테 제국으로 가.”
[저는 바다를 건널 수 없어요.]
“할 수 있어. 왜 거짓말을 하지?”
[카일룸, 저는 당신처럼 윤회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싶지 않아요.]
“아, 그런 문제라면 육체를 구해 주지. 그대가 원하는 몸이 무엇이든.”
[완전히 미쳤군요.]
킬리안은 유령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굳어 있던 입매를 비틀었다. 그건 웃음이라기보다 곧 한계를 앞둔 싸늘한 광기에 더 가까웠다.
[인체 연성이라니, 그건 소멸로도 씻을 수 없는 죄라는 걸 모르지 않으실 텐데. 저는 괴물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킬리안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절대 그 말에 수긍했기 때문이 아니라, 또 등골을 스치는 불쾌한 감각 때문이었다. 루프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시, 자정.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킬리안은 제국과는 달리 나무와 종이로 이루어진 문짝을 뜯어 버리듯 젖혔다.
조금도 절제되지 않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여린 별채가 끼익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아 같은 자리에 못 박힌 듯 떠 있는 영혼을 향해 말했다.
“뭐든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제국으로 가, 제발.”
[싫습니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소멸시켜 줄까?”
[무슨 말을 하시든 전 듣지 않아요.]
은영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 살아 있는 인간과 다르게 협박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했다. 이미 죽은 채로 상태가 멈춰 버린 영혼은 그대로 사고가 고정되어 유연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정해진 답만 내뱉는 기계처럼 킬리안이 아무리 몇십 번을, 몇백 번을 묻든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킬리안은 루프가 돌아오는 몇분 안에 주변에서 윤회를 감수하고 제국까지 다녀올 수 있는 유령을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차라리 킬리안 본인이 스스로 죽어 유령이 되어 가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애초에 킬리안은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져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존재였지만 말이다.
“하…….”
또다시, 12시 정각.
킬리안은 한숨을 짓씹었다.
아무리 전지전능함에 가까운 힘이라 추앙받고 배척받아도 신 앞에서 인간은 이렇듯 한없이 약하고 무력하다. 그리고 대체 몇백 년 만인지 모를 이 감각은, 수면 밑에 잠겨 있던 그의 기억을 끌어올려 주었다.
수없이 많은 신의 조각을 먹어 억겁의 통찰을 얻고, 신의 권능을 얻었기에 기억력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고 생생히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는 까마득한 어린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