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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15화 (115/131)

# 115

악녀 메이커 115화

다시 정각.

이번에 린다는 처음부터 다짜고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곧바로 내게 찾아왔다.

단순히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한 중간 점검일 뿐으로, 아직 이 일을 그만두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내 턱을 억지로 잡아챘다. 그리고 물건 품평하듯이 좌우로 돌려보며 내 표정과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그놈의 행동을 저지할 기운이 전혀 없었지만, 살기가 조금도 가시지 않은 흉흉한 시선으로 여우 같은 그의 얼굴을 정확히 응시했다.

린다는 내게 감탄하는 듯했다.

“이쯤 되면 슬슬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니지, 완전 정신이 나가야 정상 아니야? 나야 뭐 이쪽이 적성이니까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야.”

저 미치광이 입으로 정상 운운하는 소리까지 내가 들어야 하나.

하루가 돌아가니 린다는 지치지도 않는다. 루프가 계속 일어날 때마다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갉아 먹히는 나와 다르게 체력만을 사용하는 그는 쌩쌩해 보였다. 암흑가의 주인에게 사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할 테니까.

린다는 ‘그럼 다시 해 볼까?’ 하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내게 백날 덤벼 봤자 소용없어, 아가씨. 알잖아. 신의 권능을 손에 얻은 나는 신이나 다름없다는 걸. 솔직히 아가씨가 이러는 거 시간 끄는 것밖에 더 돼? 아니면 뭐, 고통 받는 게 취향이라거나 그런 건가?”

린다는 그 말을 남긴 뒤 다시 유유히 내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그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대체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건지, 앞으로도 죽여 갈 건지. 되돌아 사라져 버린 루프 속 시간까지 포함하면 그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한다는 자각은 있는 건지.

부디 그만해 주지 않으려는지.

“그런데 아무리 나라도 반복 노동은 좀 지루한걸. 그럼 이번은 다른 방법으로 해 볼까? 내가 누구부터 죽일지 미리 예고하는 거야, 어때?”

미리 예고하고 죽이러 갈 테니 막을 테면 막아 보라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린다는 ‘툭’ 하고 내뱉었다.

“일단 우리 개부터.”

그는 완전히 나를 얕보고 있었다.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대놓고 등을 보이면서 여유를 부렸다.

나는 다시 찾아온 위기에도 일분일초가 급한 순간에도 가만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목을 더듬었다. 어느 순간 모든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새하얗게 지워졌다.

상당히 오랫동안 이 ‘아일라 메르텐시아’라는 몸을 써왔지만, 이 몸과 내 영혼이 따로 겉도는 듯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굉장히 생소하고 동시에 억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상쾌한 기분이었다.

환청처럼 계속 귓가를 맴돌던 비명도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로 이루어진 끝없는 환영도 다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해.”

그러자 린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이 어처구니없게 들려온 모양인지 나를 비웃었다.

“그만하라고 했어.”

그런데 두 번째 뱉어진 같은 말에 린다는 웃는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의 시간이 완전히 멎었기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린다의 시간을 멈췄다.

역시.

끝도 없이 계속 루프를 일으킨 건 레제르브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나 자신이었다.

신의 기운이 온몸에 묻어 있을 정도로 관심을 받아서, 내가 죽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닌, 그냥 내가 일으키는 거였다.

킬리안은 내게 말했다.

시간을 관장하는 건 신의 고유 권한이라고.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시간의 흐름을 깨는 것은 신조차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내가 신…… 이었어.’

여전히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 아무것도, 사소한 것도 기억해 내기 힘들었지만 그래, 바로 내가 신이었다.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진 신…….’

그것 하나만큼은 알겠다. 머릿속에 덧칠하고 덧칠했던 새하얀 페인트가 지워지고 벗겨지듯이 점점 더 선명한 기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몸을 움직여서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탓일까, 린다가 갑자기 헉, 하고 숨을 토해 내며 벽을 짚고 비틀거렸다.

나는 그런 린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찢어 죽이고 싶다는 분노라든가 제발 멈춰 달라는 간절함이라든가 하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을 정도로 그냥,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

“갑자기 엄청난 힘을 얻으면 세상 모든 게 너의 발밑에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네가 가진 손톱만 한 권능으로 뭐가 그리도 자신만만한 건지.”

말 그대로 손톱이었다, 그가 먹은 내 몸의 조각은.

고작 그 정도의 권능을 가지고 신이라도 된 듯 우쭐대는 꼴이란. 아무리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지만 차마 눈 뜨고도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린다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그 권능을 회수해 갔다. 어떻게 그 방법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건 태초부터 나의 것이었으니까, 알았다. 나의 것을 돌려받았을 뿐이었다.

“죽어. 너 같은 인간은 주변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아까울 정도니까.”

나는 뭘 먼저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아까의 분노를 떠올리며 그의 주변의 흐르고 있는 시간을 그대로 멈춰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러자 린다의 얼굴이 피가 맺힌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제 목을 움켜쥐고 온몸에 핏줄이란 핏줄을 다 세우다가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잠깐만, 조금 전에는 분명 이렇게 쉽게 죽일 생각은 없지 않았어?

나는 아일라의 가족들이, 그리고 린다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몇 배는 더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죽일 생각이었다.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열어 심장을 갉아 내어 죽이고 또 죽이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어도 죽이고 죽일 거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지.

“아니야, 역시 살아나.”

그러자 린다가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기 직전에 다시 살아났다. 멈춘 시간을 다시 원상태로 돌렸기 때문이었다.

“너……! 허억! 컥……!”

나는 제대로 된 문장조차 구사하지 못한 채 헐떡거리는 그의 턱을 거칠게 잡아챘다.

더러워서 딱히 만지고 싶진 않았지만 아까 그가 내게 이렇게 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냥 받은 대로 돌려줘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아까의 여유를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지저분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자각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을 텐데.”

“…….”

“고맙다고 해야 할지.”

“…….”

“아니면 이 또한 레제르브의 계산 하에 농락당한 건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네가 신의 조각을 얻은 게, 그 모든 과정이 정말 네가 운이 좋다거나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거야.”

자세한 사정은 지금의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정말 그게 다 우연이었을까. 나에게 바실리가 찾아온 것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에게 킬리안이 찾아온 것도.

하필이면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들이 루프를 자각한 게.

‘우연일 리가 없지.’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용당했구나, 너. 처음부터.”

린다는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지금의 내 분위기가 그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렸던 아까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아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사실 알 수밖에 없겠지. 그는 짐승 같은 감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힘을 자각하고 말았으니까.

“그럼 다시 해 볼까?”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가 아까 린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대로 돌려주었더니, 창백하게 질린 사내의 매끄러운 턱선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내가 너를 전부터 계속 찢어 죽이고 싶었었지. 그러니까 일단 그렇게 한번 죽어 볼래?”

내 상냥한 제의에 린다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세 치 혀를 놀리려고 하기에.

“아, 아가씨, 잠시만…….”

방금 그에게 받아 낸 권능을 사용해 보았다. 폭죽처럼 터트릴 수 있는 곳은 다 터트렸다. ‘찢어 죽이겠다’고 이를 갈았던 것과 가장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보기 많이 안 좋다.”

나는 죽어 버린 린다를 내려다보다가 시간을 몇분 전으로 되돌리면서 말했다.

상당히 역겨웠다. 역시 신의 힘을 자각했다고 해서 내 몸이 인간이라는 의식까지 단번에 변하는 건 아닌 모양이지.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언젠가 신이었던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수천 억 년 전이었으니.

사실 그 시절의 나를 진정 ‘나’라고 칭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신들의 심판을 받고 그렇게 오랫동안 이 땅을 떠나 신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살아왔는데, 대체 어떻게 아직도 고유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건지.

레제르브는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왜 다시 이 추방당했던 세계에 있는 건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제쳐 놓고서라도 눈앞의 인간을 치워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먼저 자리를 차지했다.

아무래도 내가 힘을 자각하기 직전에 품고 있었던 감정이라 그런가. 문득 갑자기 심장을 치듯 킬리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애써 그 충동을 밀어 넣었다.

“역시 너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게 가장 정당할 것 같아. 그렇지?”

나는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벌벌 떨어 대는 린다에게 가까워졌다.

그가 입꼬리를 싹 쪼개듯이 웃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시발, 좆 됐네, 같은 조만간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비관하는 상스러운 말들이었다.

“엄살 부리지 마.”

내가 고작 몇 번 괴롭혔을 뿐인데 이렇게 떨어 대면 어떡한단 말인가. 지금껏 본인이 해 온 짓은 생각도 못하고. 그러니까 뭔가 일을 벌이기 전에는 그 후환까지도 각오했었어야지. 나는 겨우 시작일 뿐인데.

린다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볼을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긴 뒤, 눈을 반쯤 내리깔며 읊조렸다.

“너한테 소중한 사람 같은 건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 같거든. 그래서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길 법한 것을 철저하게 무너트릴 생각이야.”

이를테면, 암흑가이거나.

너 자신 같은.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온 거지?”

나는 나름대로 발악하는 듯 보이는 린다를 다시 한번 죽인 뒤에 시간을 되돌리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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