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116화 (116/131)

# 116

악녀 메이커 116화

루이스는 문득 그의 주군, 킬리안이 로툴로를 떠나기 직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눈꼴사나운 레제르브의 추종자들이 예지 능력이다, 신의 계시다, 하고 떠들어 댔던 바로 그것.

‘기시감.’

그래, 그 언젠가 킬리안이 말했던 것처럼 루이스는 그 기시감이라는 걸 아주 노골적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왠지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생각 전에도 한 것 같은데?

기시감이야 사실 일반인도 흔히 느끼는 현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다음 벌어질 것 같은 일이 선명하고 생생히 느껴지는 건 처음이라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희한하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루이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뒤에 한숨을 삼켰다.

사실 그는 이 결단을 내리기까지 꽤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주군이 곁에서 보필하라고 한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수도 근처에 발을 들이자마자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수도의 전반에 걸쳐 레제르브의 기운을 짙게 풍기고 있었으니까.

킬리안은 말했다. 무례하게 군다면 저 세상으로 보내 줄 의향도 있다고.

‘그런데 도무지 무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레제르브 끄나풀이라니 보자마자 욕하며 침 뱉지 않으면 다행이지…….’

주술사치고 신전과 신관에게 유감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중 루이스는 특히나 그랬다. 그의 마력은 유전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을 바로 눈앞에서 끌고 간 게 레제르브의 광신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끌려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현재에도 알 길이 없었다.

루이스는 킬리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말하는 것이나 눈치로 보아 아무래도 그 여자와 연인으로 보이던데, 어떻게 레제르브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여자일 수 있는 거지? 왜 하필이면.

차라리 그의 주군이 신에게 직접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아마 킬리안보다 더 신에게 큰 원한을 품은 자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어떤 여자이든, 신과 관련이 되어 있단 이유 하나만으로 주군과 어울릴 수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 생각을 한 뒤에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 여자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례하게 굴면서 당신과 우리 군주님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 수만 가지를 들이댈 것이라고.

그리고 킬리안이 지금까지 살아온 수백 년의 과거 같은 것들을 술술 불어서 억지로 떨어트리는 짓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오지랖을 부렸다간 곧바로 주군의 손에 의해 가루가 될 때까지 털릴 게 뻔했다. 아니, 차라리 털리기만 하면 다행이게.

‘죽겠지…….’

킬리안이 차라리 여자 여럿과 놀아나는 카사노바라면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썩이진 않았을 거다. 그의 군주가 이러는 건 단언컨대 루이스가 그를 알게 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거다.

‘어쩌면 내가 왕비로 모시게 될지도 몰라. 높은 확률로 레제르브를 섬기고 있을 정신 나간 여자를! 맙소사, 주술사의 비가 신과 엮여 있다니 주군께서도 과연 제정신이란 말인가?’

루이스는 그날 이후로 그 생각에 사로잡혀 조금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결국 주군의 선택’이라는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결론을 내리기까지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더는 망설일 수 없어. 가야겠군.’

오늘도 충성스러운 주군의 발닦개,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그 여자가 있는 메르텐시아 가문의 저택으로 향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이 결심을 수도 없이 반복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대체……?’

그뿐만 아니라 메르텐시아 공작저로 수도 없이 향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인가? 아무리 이동하고 또 이동해도 도달할 수 없는 까마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인가? 수십 번은 더 삽질한 것 같은 기분인데?

루이스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어쨌든 겨우겨우 공작저에 도착했다.

“윽……!”

그리고 잠시 주춤하며 인상을 썼다.

‘원래 이렇게 심했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레제르브 기운에 질식할 정도였다. 대신전 근처에서도 이 정도까지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을 것 같은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맙소사, 이건 무슨…… 레제르브가 직접 이곳에 행차한 수준인데?’

설마 주군이 반한 그 여자가 사실은 레제르브 딸이라거나, 본인이라거나 하는 막장 같은 상황인 건 아니겠지?

그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공포 전개는 사양하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루이스는 공작저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째 점점 호흡하기조차 힘들어져 코를 틀어막은 채로 말이다.

루이스는 신의 기운 때문에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지만 일단 마력의 흔적을 더듬어 어린 주술사, 바실리를 찾아냈다.

“어이, 꼬맹이.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 거야? 신이라도 내려왔어?”

“……몰라. 아가씨가 이상해.”

바실리는 초조한 듯 입술을 물어뜯으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루이스에게 흘끗 시선을 준 뒤 말했다.

“왜 이제 왔어?”

말간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딘지 절박하게까지 들려오는 질문에 루이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음…… 그건……. 잠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발닦개잖아.”

“발닦…… 이 꼬맹이가…….”

“네가 너무 늦게 와서 아가씨가 맛이 간 것 같아. 아, 너 가까이서 보니까 약하구나? 네가 일찍 왔다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그 말에 루이스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확실히 바실리가 가진 마력은 실화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아직 하룻강아지일 뿐이었다. 주술은 마력뿐만 아니라 능력과 노력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하, 주군께서는 대체 어디서 이런 싹수가 노란 걸 주워 오셔서…… 아무튼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 주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루이스가 설명을 요구하자 바실리가 말했다.

“린다가 다 죽이고 죽였어. 다 머리가 터졌는데 정확히 안 세 봐서 잘 모르겠어. 나도 터졌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린다가 터졌어. 신의 조각을 먹은 건 린다인데 왜 갑자기 약해지고 아가씨가 강해진 건지 모르겠어.”

루이스는 두서없는 설명을 듣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터졌다는 건 뭔데?

“주술은 무슨, 그전에 너는 문장 구성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그런데 잠깐, 뭐? 신의 조각?

“신의 조각에 손을 대서 지금 여기 이렇게 신의 기운이 넘쳐나는 건가? 뭐 신의 심장이라도 먹었대? 미쳤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자멸하겠군.”

루이스는 끌끌 혀를 차며 린다인지 아가씨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나섰다. 바실리는 백날 얘기해 봤자 대화가 통하지 않을 상대임을 눈치껏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루이스가 계단을 밟고 아일라의 방까지 올라갔을 때쯤이었다.

끼이이익―

경첩이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살갗이 지끈거릴 정도로 신의 기운이 가득 풍겼다.

루이스는 ‘아직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문이 열리는군. 흠, 좀 무섭……’ 같은 생각을 하며 주춤거리다가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이 열리자 바닥에 피가 새어나와 웅덩이를 이루는 모습에 절로 뒷걸음이 쳐질 것 같았지만 꿋꿋하게 걸어갔다.

‘아…… 이런 거 약한데…….’

차라리 적과 정면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게 낫지 이런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는…….

끼이이익― 탁!

그런데 방문 안에서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탁, 하고 피에 절은 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루이스의 심장도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아씨, 깜짝이야!”

그는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너덜너덜해서 도저히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시체 같은 것이 방문 안쪽에서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으악! 시체! 언데드! 언데드다!

“끄윽…… 끅…….”

아, 아니네. 사람이구나.

루이스는 뻘쭘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방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허리까지 넘실거리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살짝 멍한 표정으로 루이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굉장한 미색이긴 하지만.

‘눈빛이 좀 맛이 간 것 같은데.’

루이스가 5일간 방황하면서 수집한 정보로는 그녀를 ‘아일라 메르텐시아’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메르텐시아 가문의 막내딸로 마녀라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최근 여러모로 활약하고 있다는 영애. 하지만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레, 레제르브?”

그토록 증오하던 이로 추정되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루이스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그간 멋대로 머릿속에서 그려 왔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만하고 고고하고 인간을 벌레 보듯이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긴 하지만, 한없이 위의 존재가 밑에 것을 깔아보는 듯한 시선은 아니었다. 그냥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뿐.

그런데 그때, 루이스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일라가 대답했다.

“나, 레제르브 아닌데.”

아, 아니야?

“레제르브가 아니고서야 신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그럼 누굽니까?”

나는 대체 왜 정중한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신과 연관되었거나 가까운 존재를 보면 원망스럽게 보면서 울분을 토해 낼 줄 알았는데. 루이스는 자신의 반응이 더없이 혼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저절로 반응하게 되었다.

“네가 발닦개야?”

루이스는 속으로 ‘주군 대체 절 뭐라고 소개하신 겁니까…….’ 하고 투덜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왜 늦은 거지?”

아일라는 방 밖을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사내의 발목을 붙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아무래도 대놓고 고문을 하는 모양새라, 루이스는 덤덤하게 넘기며 모르는 척했다. 어차피 그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환영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어째서?”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신과 가까운 존재,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루이스는 너무도 허탈한 나머지 잠시 넋을 놓을 것 같았다.

루이스는 살짝 눈썹 사이를 좁히며 불편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술사에게 신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던 아일라의 연녹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가 만난 이래 처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킬리안은?”

“주군 말씀이십니까? 아마 가장 신을 혐오하고 계시겠죠. ……잠깐, 굳이 제게 묻는 건 주군께 당신은 정체를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겁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도 이제야 알아 버렸는걸.

아일라는 네가 신만 아니면 된다고 말했던 그 언젠가의 킬리안을 떠올리며 손에 쥐고 있던 린다의 발목을 천천히 놓았다. 린다는 어느새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일라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신을 그토록 혐오하게 될 때까지 대체 킬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