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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17화 (117/131)

# 117

악녀 메이커 117화

꿈 같은 건 이미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라고 말했지만, 가장 오래된 욕구라면 사실 기억하고 있었다.

끝에 대한 갈망.

태어난 지 일곱 해 되는 어린 노예가 가장 바란 것은 부디 이 고통의 마지막 한계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신이시여, 부디 이대로 숨이 끊어져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기를.

킬리안의 유년 시절은 제국력 142년, 레테 제국이 찬란한 태양의 땅이라고 불리기로부터 4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테의 태양이 밤을 걷어 내고 영원을 비추기까지, 얼마나 셀 수 없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겠지.

병사, 노예, 부녀자,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유괴되어 억지로 마약을 먹여 전쟁에 동원되고 물건을 운반하고, 화살 받이가 되고, 성 노예로 끌려가고, 폭약을 몸에 단 채 적군을 향해 달려들고, 불순분자가 숨어들었단 이유로 마을을 불태우고, 그런 시대였다.

킬리안은 의미 없이 짓밟혀 사라졌어야 했을 수많은 노예 중 하나였다.

대제국을 꿈꾸는 레테의 속국이었던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

엘도라도는 제국의 은밀한 지시를 받고 신이 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실험체로 쓰기 위해 끌려온 수많은 아이 중에서 신성력에 반하는 마력을 비정상적으로 보유한 사내아이가 섞여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태어나길 노예로 태어나 자라나길 실험체로 자랐다. 그 시절 그의 삶을 정의 내리자면 그저 고통만이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레제르브의 신관들은 밀폐된 공간에 집어넣어 독가스를 뿌리고, 직접 투여하고, 전기를 흘려 보내고, 태우고, 익사 직전까지 물에 빠트리고, 쇳물을 붓고, 사지를 얼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면 신성력을 쏟아붓고 찢고, 자르고, 뜯고, 끝없이 계속…….

대단해. 어쩌면 신성력보다 마력이 더 유용한 능력일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그저 이 실험체의 마력이 엄청나기 때문인 걸까? 이게 신성력이었다면 대신관의 자격을 얻고도 남았겠군. 대체 누가 어디서 이런 보석을 주워온 건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한계는 어디까지지? 먹먹해진 귓가에 수도 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레제르브를 광적으로 섬기는 그들 입에서 얼마나 많은 신의 교리들이 언급되었는지. 오고 가며 오늘도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들을 뇌리에 새겨지도록 듣고, 또 듣고 들었다.

듣고 계십니까, 신이시여.

레제르브 님, 제발 저를 죽여 주세요.

절 당장 당신 곁에 데려가 주세요.

이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세상의 구원을 상징한다는 레제르브의 동상 앞에서 사지가 결박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영문도 모른 채 받아들이며 빌고 또 빌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할 리도 없는 숨겨진 신전 그 지하에서.

그렇게 천년 같은 하루를 수도 없이 보내다가, 어느 순간, 그냥 알게 됐다. 신은 피를 토하며 중얼거린 그의 말을 들을 수도 들을 생각도 없다는 것을. 보잘것없는 노예 출신 실험체까지 신경 쓰기에 신께서는 빌어먹게도 다망하다는 것을.

이 잔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수도 없이 부러지고 잘렸던 다리로 버티고, 뼈가 조각난 팔로 짚고 일어나 스스로 헤쳐나갈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했다. 족쇄를 부수고 신관들을 죽이고 뒤틀린 다리로 걷고 기어 신전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신의 조각을 먹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신의 조각을 남겨 둔 이유는 인간에게 시련을 주고 시험하기 위해서라지. 만약 이것이 시련이라면 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신의 권능을 탐해 버린 어리석은 인간이 되는가.

그제야 레제르브는 킬리안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의 답을 들려주었다.

《신의 육신을 먹어 능욕하고 나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구나, 아이야. 너는 이제 명부에 이름이 지워져 영원히 인간계에 묶인 채 윤회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끝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잖은 소리십니까, 신이시여.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먹었습니다. 시련을 견디지 못했다고 벌을 주시는 거라니 여기서 얼마다 더 버텼어야 했던 겁니까. 제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안식과 광명을 비춰 주셨을 겁니까. 제게 왜 이리 잔혹하십니까.

울부짖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레제르브에겐 킬리안의 절박한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고 그저 금기를 어겼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을 뿐이었던 거다. 모든 절실함과 간절함 따윈 순식간에 사라지고 공허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레제르브께선 아주 합리적이기도 하시지.

그 사실을 깨달은 킬리안은 광기로 점철된 웃음을 터트린 뒤 그 자리에서 보란 듯이 천사를 죽였다. 그래 봤자 씻을 수 없는 죄의 무게는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다.

일방적이었던 전언 이후, 레제르브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인지 궁금하여 신의 조각이란 조각은 닥치는 대로 찾아 먹고 신전을 무너트렸다. 왕국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역사, 문화, 인종까지 모조리 다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광적인 부름에도 레제르브는 답하지 않았다. 신의 침묵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넌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 땅 위에 족쇄가 채워진 노예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으며 실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이 의미 없고 신물 나는 세상을 향한 권태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한때 방황도 많이 했고 죄도 끝없이 쌓았다. 킬리안은 충동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접고 멸망한 왕국 위에 주술사들을 위한 나라를 세웠다.

로툴로, 망자들의 땅이라 조롱받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느 대륙 땅에서도 맘 편이 살 수 없는 주술사들을 위한 울타리를 세웠다. 그들이 맘 놓고 숨 쉴 수 있게. 아무도 굶주리지 않고, 아무도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는 평등한 왕국을.

그리고 대륙 곳곳에서 마력 때문에 핍박 받는 아이들을 데려와 키웠다. 아이들이 자라, 또 후손을 낳고 그 후손이 죽어 그 땅에 묻히고 나서도 계속 살아갔다. 끝없이 계속.

사실 킬리안의 최초의 갈망은 이뤄지지 못한 채 평생 이어져 내려왔다. 그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끝없는 바람이기도 했다.

날 죽여 줘.

유일했던 갈망이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것은 신을 능멸한 죗값이겠지.

죽지 못해 살아가던 세월이 수세기. 그리고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던 수개월. 내가 그 수개월을 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세월을 견뎌 온 것 같다고 한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루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킬리안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공간을 찢어 동대륙을 빠져나왔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일단 아일라의 곁으로 가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는 제국 땅을 밟자마자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누가 신의 조각을 먹었군.’

신의 조각.

웬만한 조각은 다 킬리안의 입속으로 들어갔지만, 남은 조각의 행방 중 가장 최근에 들은 것이라면 바실리의 원래 주인 린다가 신의 조각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운운했던 것.

장담할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 신의 조각을 먹은 게 암흑가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그가 가장 먼저 향할 곳, 노릴 사람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실리의 곁, 아일라일 것이다.

그리고 메르텐시아 저택에서 폭발적일 정도로 흘러나오는 레제르브의 기운. 확실했다. 아일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확신한 킬리안은 저택 내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집사님!”

그리고 그는 화색을 띠며 달려온 바실리에게 붙들려 횡설수설 두서없는 말을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통찰력을 써서 대강의 기억을 읽었다.

처음 신의 조각을 먹고 레제르브의 전언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분노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광인의 눈을 한 킬리안은 이를 갈며 아일라의 방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집사님, 또 이상한 게 왔어. 이거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바실리는 허공을 부산하게 날아다니는 카피 퍼펫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불길에 휩싸였던 킬리안의 은회색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천사.”

욕지거리를 짓씹은 킬리안은 아일라의 방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신을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만약 신이 이 땅 위에 내려온다면 지금의 아일라 같은 기운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진 채 기절한 사내. 신의 조각을 먹었던 흔적이 느껴지지만 그 외에는 텅텅 비었다. 권능을 얻었다가 타의에 의해 도로 빼앗겼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 건 신밖에 없겠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주군께서는 신이라면 아주 학을 떼신다니까요. 사실 그럴 수밖에 없잖습니까. 세상 어느 성인군자라도…… 헉!”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루이스.

루이스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다가 입을 꾹 다물고 놀란 토끼처럼 킬리안을 돌아보는 것까지 말이다.

킬리안은 모든 상황 파악을 빠르게 마쳤다. 그는 루이스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일라.”

킬리안은 사색이 되어 벽에 찰싹 붙어 버린 루이스를 철저히 무시하고 오롯이 한 사람만 눈에 담으며 손을 뻗었다. 겁을 집어먹고 도망갈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갔다.

아일라는 울고 있었다.

녹음을 담은 듯한 청명한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루이스에 대한 살의 때문에 눈에 불똥이 튀었지만,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착하지, 이리 와.”

사실 아일라가 신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타락 천사 같은 것도 아니라, 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전부터 해 왔다.

단지 아니길 바랐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신이라면 결국 원망밖에 남지 않을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오로지 신에 대한 증오로 점철된 삶이었으니까.

사랑,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신이라는 진실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게 과연 내 평생을, 내 존재의 가치를 까맣게 덧칠해 지워 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의 감정일까. 나는 그녀 하나 때문에 내 삶을 송두리째 포기할 수 있을까.

“미안해요.”

“네가, 뭐가.”

“아무래도 내 탓인 것 같아.”

“네 잘못은 어디에도 없어.”

“난 신이고…….”

“상관없어.”

“……이 세상에 혼란만 야기하고.”

“상관없다고 했어, 아일라.”

포기?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은 이미 생기기도 전에 뿌옇게 흐려졌다. 지나가 사라진 과거 같은 게 대수인가. 바란다면 없던 일로 할게. 다 잊을게. 지워 버릴게. 그냥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옆에 남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신만 아니면 된다는 말을 지껄인 자신을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박해졌다.

팔랑―

그때, 빛에 둘러싸인 나비의 형상을 한 레제르브의 종이 아일라의 손가락 위에 앉았다. 한때 그의 속을 수도 없이 뒤집어 놓았던 천사였다.

킬리안은 무슨 짓을 해도 신의 의지를 반할 수 없다. 지난 삶 동안 뼈저리게 느꼈던 암담함이 다시 코앞에 닥치는 듯했다.

“신이라는 건 왜 존재하는 걸까.”

아일라는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왜 감정이 있는 반푼이 신이었을까요. ……아프게 해서 미안.”

“다 잊었어.”

“거짓말.”

첫 대면부터 신에 대한 온갖 악의와 증오를 다 드러냈으면서 발뺌하기엔 한참 늦었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해서 킬리안은 그녀를 붙잡듯이 다급하게 말했다.

“네가 곁에 있으면 잊을 수 있어.”

“……달콤한 말이네.”

아일라는 자신의 손가락에 앉은 나비를 꼭 쥐면서 흐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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