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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18화 (118/131)

# 118

악녀 메이커 118화

킬리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니, 킬리안만큼은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은 한편,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성스러운 새하얀 빛에 둘러싸인 나비가 손가락에 닿는 순간, 내게 이렇게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에코리르브.》

낯설지만은 않은 울림이었다.

《저는 당신의 일부입니다.》

일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의 영혼이 인간계에 떨어져 윤회하기 전, 이 세계를 관리하라 명하고 떼어 놓고 간 ‘냉정’입니다.》

이것은 레제르브의 전언이었다.

그 순간, 잊었던 기억의 파편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수많은 차원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신들의 법칙을 깨트리면서까지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인과를 뒤틀려고 하는 어리석은 신을 처단하기 위해 모였다.

‘알잖아, 에코리르브.’

그중 한 신이 내게 말을 걸었다.

‘원래 인간은 다 그래.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이고, 끝도 없이 바라고 또 바라지.’

그래, 알아. 아는데.

‘더 내어 줄 셈이야? 어디까지?’

사랑해 버렸어, 인간들을.

‘그거 알아? 너는 결국, 네 몸까지 양보하고 인간들에게 일용한 양식이 될 거야. 뼈까지 씹어 먹히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네 존재를 잊겠지.’

내 힘과 육신, 영혼을 송두리째 헌신해도 좋을 만큼 사랑해 버렸어. 이 감정이, 다른 신들은 소멸하여 다시 창조된다고 해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엄두도 내지 않을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게 희생이 아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나는.

‘미련한 에코리르브. 네 부스러기 같은 냉정은 여기 두고 가. 그때가 되면 네 영혼까지 먹히기 전에 거둬 줄게.’

그리고 어디 한번 네가 그리 좋아하는 인간이 돼서 끝도 없이 윤회해 봐. 수천 년, 수억 년, 환생하고 죽다 보면 아무리 반푼이 같은 너라도 깨닫는 게 있겠지, 하고 신은 말했다. 동시에 그녀는 내게 손을 뻗었고, 모든 것은 그대로 암전이었다.

그것이 내가 신이었던 시절의 최초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글쎄, 나는 되다 만 반푼이라서, 인간으로 수억 년의 세월을 굴러도 깨닫는 게 없었나 봐.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은 그저 킬리안이 가엾고, 내가 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외면했던 세월이 야속하고, 그를 아프게 한 게 나의 일부라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상관없다고, 다 잊었다고, 네가 곁에 있으면 다 잊을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이 너무나도 감미로워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로 포근해서.

“아일라.”

나는 천사를 쥐었던 손에 천천히 힘을 풀고 킬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차마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런 위험한 거 놓고 이리 와.”

이 모든 건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나는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무고하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

“너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레제르브가 내 일부라고 해도? 애초에 우리는 인간과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차이를 뛰어넘더라도, 성립될 수 있는 사이인 거야? 그는 나약했던 신의 죄를 대신 받았는데. 무슨 염치로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해.

《에코리르브, 그쯤하고 이리 오십시오. 당신이 힘을 자각한 이상, 인간계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원의 균형이 무너질 뿐입니다.》

내 몸에서 떼어져 나온 냉정이라더니, 부스러기만큼이라 해도 정말 칼 같구나 싶었다.

아무런 기억도 자각도 없는 나를 여기까지 유인하고, 그리고 부름을 거부할 수도 없게 철저하게 옭아매고 있잖아. 나는 거의 놓아줄 뻔했던 나비를 다시 꾹 쥐었다.

킬리안이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다급하게 손을 뻗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을 알아듣기 전 먼저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갑자기 바닥이 가까워진 줄 알았더니 내 몸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킬리안이 달려와 받아들었다.

검고 검은빛으로,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세상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 * *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냉정으로 이루어진 신이 개입하여 적어 내려간 각본대로,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살인극은 막을 내렸다.

그때의 일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조차 ‘지독한 악몽’으로 치부할 정도로, 지금은 모든 게 꿈결처럼 사라지고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바보 같군.”

빈센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침실 안쪽에 비치된 책장을 뒤적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다시 꺼내 보지 않은 지 10년은 훌쩍 넘은 요리책이었다. 하지만 사용인들이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관리한 탓인지, 종이도 변색되지 않았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다.

빈센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잠시 흔들리는 눈빛을 하다가 이내 꾹 감았다.

잠들기 전, 그 책을 잠시 뒤적여 보며 빈센트는 몇 가지 레시피를 떠올려보다가 이내 다시 책을 덮었다.

* * *

사랑.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그 단어.

사실 아슬란이 그동안 수많은 로맨스 소설을 집필하면서, 그 말에 아무런 환상도 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대가 없는 헌신이라든가, 뭐든 해주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진다든가. 사랑에 대해 떠드는 수많은 학자와 시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꿈같은 환상을 많이 부풀렸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아슬란은 누군가와 첫눈에 서로 반한다거나 하는 마법 같은, 동화 같은, 운명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청년이었다. 물론 그런 상대가 나타나기는 하는 건지 본인도 의문이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환상은 그대로 환상으로 남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사…… 랑…….”

아슬란은 책상 위에 앉아 검은 잉크를 찍어 낸 뒤에 자꾸만 이물질처럼 겉도는 그 단어를 꾹꾹 눌러 적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각하,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펜촉이 종이를 뚫었다.

“…….”

아슬란은 침묵하며 엉망진창인 편지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것 위에 머리를 박았다.

“괴로워…….”

사랑이라는 두 음절이 이리도 말하기 고통스러웠던 건가.

아니, 심지어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종이에 적어서 건네주면 될 뿐인 일인데도 이렇게 죽을 것 같은 일인 건가.

자, 아슬란. 네가 소설을 쓰던 시절을 떠올려 보자. 그때는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운명론을 찬양하고 사랑을 운운하며 두 남녀의 절절하며 질척한 연애사를 적을 수 있었는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쓸데없는 결론을 얻고 다시 원점이었다.

아슬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지를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안전하게 벽난로에 안착하여 활활 타올랐다. 찌그러진 사랑이라는 글자도 불꽃과 함께 정열적으로 활활 타올랐다. 와, 잘 탄다.

친한 친구한테는 물론 한때 좋다고 쫓아다니던 영애들에게도 감정이 죽은 인형 같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그 말이 딱히 틀린 것 같지도 않아 순순히 수긍했다.

자신은 타인에게 딱히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모두가 탐내는 아름다운 영애에게 고백을 받아도 부담스러울 뿐이고, 나름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해도 분노는 없었다. 그저 불쾌했기에 그 상대와 칼같이 연을 끊었을 뿐.

‘언제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가페적인 사랑이든, 에로스적인 사랑이든, 필리아적인 사랑이든.

평생 사랑이란 걸 할 수는 있을까. 낳아 준 부모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데 사랑은 무슨.

‘일이나 하자…….’

아슬란은 사랑이라는 단어만 쏙 빼고 다시 편지를 적었다.

그러던 중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아일라가 링테의 차기작이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새로운 편지지를 꺼낸 뒤 잠시 펜을 들었다 놓으며 망설였다.

‘편지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아슬란과 링테가 서로 친구라고 했으니까 편지 정돈 전해 줄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뿐인데 어느새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편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팬레터에 대한 답장은 익숙했기에 능숙하게 적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상대가 아일라라고 생각하니 이게 또 뭔가 어렵다.

그렇게 적어 가다 보니까…….

[내년 즈음 새로운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사실 새로운 작품 같은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의무와 책임은 점점 무거워지고 일은 매일매일 쌓여만 가고 있음에도 손이 멋대로 무리한 말을 멋대로 툭툭 내뱉는다.

친필 사인 본 하나에 뛸 듯이 기뻐하던 얼굴이 생각나서. 앞으로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편지를 받으면 그게 얼마나 울상으로 변할지 상상이 가서.

그냥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흐음…….”

바실리는 콧소리를 흘리며 목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흉터 없이 매끈한 얼굴을 더듬거렸다. 괜히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쓸어 보기도 하고, 팔다리를 주물러 보기도 하고. 전부 다 멀쩡하게 잘 붙어 있음에도 괜히 따갑고 간지럽고 욱신거리고 이상하지.

“다들 이렇게 아팠던 걸까?”

바실리가 어렸을 때, 린다가 잘못 주입한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는 통각을 느끼는 것에 상당히 둔했다.

하지만 그건 꽤 쓰라렸지. 쉴 새 없이 터지고, 터지고, 잘리고, 잘리고, 갈리고, 갈리고. 어릴 때 기억이 잠시나마 생생하게 되살아날 만큼…….

“린다가 언젠가 나한테 그랬어. 이런 걸 인간응보라고 한대.”

불행히도 그건 인간응보가 아니라 인과응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줄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린다도 지금쯤 인간응보당했겠다, 그렇지?”

아무도 없는 층계 계단에 덩그러니 선 바실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는 카피 퍼펫에게 말을 건넸다.

“예전에 한 신관을 죽인 적이 있었는데…… 걔가 나한테 그랬어. 얼마나 많은 업보를 쌓아 온 거냐고.”

바실리는 그때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신자의 선망과 존경을 받는다는 그 신관은, 그를 죽이러 온 암살자가 찾아왔는데도 조금도 떨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레제르브의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지. 업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고 누굴 죽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시키는 대로 모조리 다 죽였거든. 너도 지금 죽일 거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를 마치고 성호를 긋기에 재밌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바로 죽이지 않고 가만히 들어 줬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무지도 죄라 그랬어. 모든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죄의 무게를 과연 네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냐고 내가 가엾대. 그리고 내 죄를 사해 줄 사람은 오로지 신뿐이라고 그랬어.”

뭔 헛소린가 하고 좀 웃어 주다가 죽였는데……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다.

있잖아.

“나, 지금 조금 무서워.”

빨리 아가씨가 와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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