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악녀 메이커 119화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더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꿈의 시작처럼, 그냥 어느 순간 나는 존재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본다고 하기에도 다소 어폐가 있었다. 나는 눈이 없었고, 팔다리가 없었고, 형체가 없었으니까.
마치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허공을 헤엄쳐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천계…… 인 건가?
레제르브의 부름을 받고 왔으니 당연히 신들이 사는 어느 곳이겠지.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거나, 태양이 바로 코앞에 있다거나, 등등을 상상했으나 이렇게 보니 인간계나 천계나 딱히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그냥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건물들이 즐비해 있고. 하긴 무슨 그리스 로마도 아니고 시대가 다르긴 하지…….
모든 것을 나름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아직 이 상황이 어안 벙벙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영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나비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 쫓아갔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대답이 없다. 하긴 나비한테 말을 거는 나도 웃기지. 하지만 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에코리르브.”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며 나를 ‘에코리르브’라고 불렀다. 나는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음에도 단박에 반응했다.
“레제르브?”
나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설정한 아일라도 견주지 못할 정도로 빛나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앗, 내 눈이! 머리도 피부도 온통 성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왠지 안구가 없음에도 눈이 시린 느낌이었다. 심지어 진짜 머리 뒤로 후광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레제르브가 답했다.
“딱히 저를 뭐라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일부이니까요.”
“나의 일부…….”
그럼 내가 너를 망할 자식아, 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딱히 레제르브의 잘못이랄 게 없음에도 심사가 꼬인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분명 어디까지나 필요해서 그런 일들을 벌였겠지만 그래도 좀 더 온화한 방법일 수는 없었던 거냐고.
다행히 신이었기 때문에 수십 번은 골로 가도 트라우마는 없었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들, 특히 린다의 손에 가장 잔인하게 수도 없이 죽었어야 했던 바실리가 굉장히 걱정이었다.
이래서 냉정이란…… 냉정해.
이왕 그녀를 만난 김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과거에 ‘에코리르브’라는 신이었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내 육신이 갈가리 찢겨서 대륙 곳곳에 뿌려졌고 영혼은 끝도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으면서 윤회했다는 것을.
그런데 어떻게 다시 여기에 돌아오게 된 거지? 그리고 내가 윤하늘이었던 시절에 쓴 소설은 또 뭐고?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악녀 아일라한테 빙의했던 건데?
“그것을 제게 물으셔도 어찌 알겠습니까. 스스로 기억해 내셔야지요.”
음?
“네가 한 게 아니야?”
당연히 레제르브가 처음부터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신의 힘을 자각할 수 있도록 슬쩍 거들어 드린 것 외에는 전부 에코리르브, 당신이 스스로 하신 겁니다.”
내…… 스스로?
“소설을 쓴 것도?”
“소설이라……. 당신은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셨으니 이 세계를 추억하며 쓰셨을 법도 하군요. 소설이라면 아마 어떤 특정한 인간의 행복을 빌어 주면서 쓰시지 않았을까 싶군요.”
“아일라한테 빙의한 건?”
“신은 말 한마디에도 힘이 실려 있습니다. 언령이라고 하지요. 혹시 그 아일라라는 인간을 상대로 무슨 쓸데없는 약속을 하신 건 아닙니까?”
“……하루를 계속 되돌린 것도?”
“네. 제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
그 말은 결국 내가 스스로 빙의하고 심지어 스스로 하루를 되돌린 뒤에 그걸 내가 한 줄도 모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는 뜻 아닌가. 루프를 일으킨 신을, 그러니까 나 자신을 스스로 원망하면서.
이 무슨 멍청한.
일기장에도 창피해서 도저히 쓰지 못할 이 사실이 진정 실화란 말인가.
할 말을 잃고 그대로 멍하니 굳어 있는 날 향해 레제르브가 말했다.
“당신은 이미 훨씬 전에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세계가 당신을 유인해 불러들였을지도 모르지요.”
“세계가 나를 왜?”
“저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니까요.”
그래, 그 가설은 좀 낫다.
덕분에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견딜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당신과 그 주술사가 만난 것도 분명 우연은 아닐 겁니다. 그는 아무래도 세계의 이물질 같은 존재일 테니까요.”
킬리안의 얘기가 나오니까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문득 다시 떠올랐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레제르브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신씩이나 되어서 아직도 인간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었지만.
“왜 킬리안의 부름에 답해 주지 않았어?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몇 번 답하기는 했습니다. 천사를 보내서요.”
레제르브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주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던 나비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새하얀 빛무리는 서서히 거대해져서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날개 달린 사람이 되었다. 딱 봐도 천사 같았다.
‘네가 천사였니…….’
킬리안이 천사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사는 상당히 일방적이고 융통성이 없으므로 상대하다 보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고.
그런데 나도 직접 겪어 보니까 알 것 같았다. 딱 전달 받은 말만 전해 주고 그 외엔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는 듯했다.
“저는 완전한 신이 아니라 당신의 냉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세계가 정해준 규율대로 일을 처리할 뿐입니다. 이 세계, 란드리아의 관리인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완전한 신이 아니라고 했을 때는 ‘그래도 그렇지’라고 생각했는데, 세계의 관리인이라고 말하니까 그녀가 이 세계에서 얼마나 미미한 권한을 쥐고 있는지 확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 주술사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전언을 계속 남겼습니다. 제게 아무리 하소연해 봤자 저는 관리인일 뿐이니까요.”
“…….”
“사실을 전했을 뿐이었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 듯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그랬겠지. 제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간청하는데 네가 뭔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대답이 수도 없이 돌아오면 누구라도 더 열 받겠지 않겠나.
하지만 이렇게 되니 레제르브의 입장도 어쩐지 이해가 갔다. 아무리 고객이 컴플레인을 걸어 봤자 사장님은 해외 출장 중이고 연락도 안 되고,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어서 나서서 해결해 줄 수도 없고, 고객의 불평불만을 다 들어 줘야 하고. 뭐 비유하자면 그런 상황 아니었나…….
그렇다고 인간한테 사실 진짜 신은 부재중이고 전 허울뿐입니다, 하고 쉽게 밝힐 수 있을 리도 없을 테고.
그러니까 킬리안이 고통 받게 된 건 결국 신인 주제에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수 없이 환생을 반복하며 살아간 내 탓이라는 결론이잖아.
있지도 않은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레제르브가 어딘지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주술사는 조금…….”
조금?
나는 레제르브가 처음으로 보인 표정에 의아함을 느끼며 집중했다.
“무섭습니다.”
“…….”
“그자에게 제가 허울뿐인 신이라는 꼬투리라도 잡히면 소멸당할 것 같았습니다.”
“…….”
킬리안에 대한 냉정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킬리안이 어떻게 신의 일부를 소멸시킬 수 있겠어. 너무 과장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레제르브는 나와 정확하게 시선을 맞춘 뒤 아주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어서 내려가 그 주술사의 신의 권능을 거둬 주세요.”
“……내가 내려가도 되는 거야?”
아까는 인간계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원의 균형이 무너질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 말만 믿고 킬리안의 애절한 부탁도 무시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더니 설마 나한테 사기를 친 것인가. 냉정 주제에?
“잠깐이라면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뻔뻔하게 답했다.
“권능을 거둔다면 에코리르브의 잃어버린 기억과 통찰력 같은 많은 것들을 되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무서워서 킬리안을 영원히 죽지 못하게 한 건 아니지? 나중에 혹시라도 만날까 봐?”
“그건 아닙니다. 저는 규율대로 처리했을 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반응을 보니 내 말이 완전히 틀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칼 같이 답하던 전과 달리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어!
신의 일부조차 무섭게 느낄 정도로 킬리안이 대단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세계가 그를 ‘이물질’처럼 생각한다고 한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킬리안한테는 미안한 일이 많아서 웬만하면 그 권한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마저 잃게 된다면 대체 그에게 남는 게 뭔가 싶어서. 사실 내게는 필요도 없고.
“신의 권능을 거두면 킬리안은 어떻게 되는 건데?”
“세계의 멸망은 피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멸망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상황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지 모르겠다. 그 말인즉 킬리안이 계속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리인 건가?
“아직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신 듯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신계와 인간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릅니다.”
뭐?
“당신이 이곳에 와 있는 동안 인간계에서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주술사가 곧 일을 치를 것 같으니 속히 권능을 거둬 주십시오.”
레제르브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지금 킬리안이 밑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오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인 이상 절대 신계의 문을 넘을 수는 없지만, 계속 막기만 하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간 멸망이라고.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꾸준히 인식시켰더니 나라 하나를 완전히 지워 버린 인간입니다. 그때보다 더 극단적이고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데 더한 것도 못할까요.”
“…….”
아니, 설마 킬리안이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짓게 될 테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애써 그에 관한 것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그가 보고 싶었다. 달려가서 괜찮다고 안아 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내가, 신이기를 포기할 방법은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