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악녀 메이커 120화
나는 내가 다스리던 세계에 혼란만 빚어 낸 반푼이 신이었다.
지금만 해도 봐 봐. 전혀 신답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잖아. 킬리안한테는 미안한 일이 많아서 웬만하면 그의 권한을 빼앗고 싶지 않다니. 결국엔 그도 이 땅 위에 태어난 수많은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인데.
이래서야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방관하고 오로지 인간을 편애했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 버린 나는 이미 그중에서도 편애하는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킬리안이 그 처음이었고, 메르텐시아 가문의 식구들이 그 두 번째였다. 그리고 바실리도. 사실 내게 악의밖에 없어 보이는 샬럿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 그녀를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 하지만 베르너는 숨 쉬는 것조차 거슬릴 정도로 싫었다.
나처럼 이렇게 편파적인 신이 과연 신일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 킬리안이 온 우주가 용서하지 못할 큰 죄를 지어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분명 망설임 없이 무조건 킬리안을 감싸 줄 거다.
당연하잖아. 나도…….
‘나도 킬리안만 있으면 되는데.’
내가 신이기 때문에 인간계에서 머무를 수 없고, 킬리안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신의 권능, 권리, 의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
권능?
얼마나 나에게 의미가 없었으면 인간들에게 다 퍼 줬겠어.
권리?
권리를 행사하기는커녕 인간들의 억지 같은 권리 주장을 수용했었다.
의무?
수천억 년간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행한 적 없는데 의무는 무슨 의무.
애초에 나 같은 신을, 이 땅 위의 피조물들이 과연 바라기는 할까? 절대자의 자리가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 자신도 잘 알았다.
내 말에 레제르브가 답했다.
“가능합니다.”
그 말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신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당신의 일부에서 탄생한 제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냉정,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제가 온전히 신으로서 다스리는 세계가 완벽한 균형을 유지할 거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냉정이라더니,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듯 말했다.
“당신의 실패를 통해 오로지 규율로만 세계를 다스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군요. 벌써 신을 위협하는 돌연변이 같은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말하는 걸 가만히 들어 보니 레제르브는 폭주한 킬리안이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또 다른 ‘실패’라고 칭했다.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레제르브에게 신의 권한을 전부 다 넘겨주는 것은 좀 불안하다. 애초에 신들이 정해 놓은 규율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는 이유로, 인체 실험을 자행한 신전을 처벌하지 않은 것부터 말이다. 나 같으면 아주 박살을 내 버렸을 텐데.
……음? 박살을 내?
에코리르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 아닌가. 확실히 인간으로 오랫동안 살았더니 인간들은 마냥 사랑스럽다고 환상을 품고 있던 예전과는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수도 없이 윤회하며 살아온 게 효과가 있긴 있었네…….’
여전히 호구 신인 줄 알았더니. 어쩌면 이게 다 날 조금씩 변할 수 있게 도와준 킬리안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게 과연 좋은 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영 의문이지만.
음, 이 땅에 완벽한 신의 제목이란 없단 말인가. 나는 있지도 않은 턱을 쓸면서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음?
레제르브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운을 떼자, 나는 의아함을 담고 그녀를 응시했다.
“솔직히 유일신이 있는 세계는 이 근처 차원에서 우리가 유일합니다.”
“…….”
그랬어? 난 또 유일신이 당연한 건 줄 알았지.
애초에 에코리르브가 유일신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건지, 나는 소설을 쓸 당시에도 당연히 레제르브를 유일신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그 소설의 영향으로 이 세계가 레제르브 홀로 다스리는 세계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가 레제르브가 다스리는 세계라 내가 그런 소설을 쓴 것인지. 기억이 없으니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수준이군.
“에코리르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차원 전체를 다스리라니, 혼자 감당하기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미친, 이걸 저 혼자 다 해야 한단 말이에요? 일 너무 많아요. 살려 줘.
나는 어쩐지 한탄하는 듯한 레제르브의 말 속에서 짙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나도 언젠가 저 심정 절절히 느껴 본 적 있어. 아니, 분명히 꽤 많았던 것 같아. 남 일 같지가 않아.
“아무리 천사들이 일을 거든다고 해도 제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 생기거나, 한 박자 늦게 관여하게 되는 경우도 잦습니다. 솔직히 에코리르브가 떠나고 나서 최근 들어 거의 붕괴 직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본의 아니게 미안…….”
“이렇게 생각해 보니 세계가 위태롭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시고 소설이란 걸 쓰신 걸지도 모르겠군요.”
아까는 특정한 인간의 행복을 빌어 주기 위해 썼다며. 뭔가,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를.”
“당신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지구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만 사공이 하나뿐이면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갈 뿐입니다.”
사장님, 제발 직원 좀 더 고용해 주세요, 하고 레제르브가 말했다.
그것참, 대단한 해결 방안이기는 한데,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한 내게는 너무 허황되고 막막하게 들려오는걸.
“신을 내가 만들 수가 있어?”
“왜 못하시겠습니까. 이 세계의 창조신이신데.”
우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 대단해…….
하긴 원래 소설 속이라고 생각했던 이 세계가 인물 하나하나 정확히 구현된 것으로 봐서 내가 진짜 창조신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다면 말이지.
“고용도 가능?”
“예?”
아니, 킬리안도 신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말인데. 이거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를 낙하산으로 꽂아 넣는 몹쓸 사장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서 차마 선뜻 물어보지 못하겠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말뜻을 귀신같이 눈치챈 레제르브가 처음으로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냈다.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전례는 들어 본 적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자는 신을 혐오하지 않습니까.”
나만 곁에 있으면 신이든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게다가 주술사로 한평생 배척 받고 살아온 자입니다. 그런 그가 과연 이 땅을 공정히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너도 나도 딱히 공정한 신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킬리안에게는 상당히 잔인한 제안이 될 거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확실히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일단 내려가 볼게.”
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얻어 혼란스러웠다. 물론 그 하루가 수십 번도 넘게 반복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렇게 말했다. 레제르브는 어딘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으나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일주일, 그 이상 머무르시면 이젠 정말 위험할 겁니다. 그 안엔 결정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응.”
내가 순순히 대꾸하자 동시에 시야가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몸도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 * *
메르텐시아 저택에 있는 내 방에서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뜰 줄 알았는데,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다.
일단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무겁다’였다. 영혼의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묵직한 무게감에 짓눌릴 것 같았다. 덕분에 서서히 감각이 깨어나고 있음에도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우으…….”
사, 살려 줘.
대체 뭐야. 인간의 육신이란 게 이렇게까지 묵직했던가? 가위에 눌린 것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지에 바위를 매단 것 같잖아. 심지어 눈꺼풀도 무겁게 느껴졌다.
“헉, 아가씨가 울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진 모양인지 묵직함은 금세 가셨다.
대신에 끊어질 듯한 허리의 통증과 제대로 뜰 수 없는 눈 때문에 억,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하, 깨어나는 것부터 이렇게 고난이라니.
음? 그보다 방금 무슨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문득 그렇게 생각했을 때 우다다, 하는 뜀박질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발걸음 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등장한 뜨거운 손이 내 눈가를 쓸었다.
살결이 거칠어 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손길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는 것처럼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가슴께가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늦었잖아, 아일라.”
어쩐지 먹먹한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묵직하고 바닥을 긁는 듯 섬뜩하기도 했지만,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상냥한, 킬리안의 음성.
“누가 널 속 상하게 한 건가?”
“…….”
“말해 봐. 신이라도 죽여 줄 테니.”
킬리안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서 신으로서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동시에 킬리안의 근처에 서 있었던 누군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완전히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니, 이거 그냥 생리적인 눈물이거든요!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인간이라면 그러고도 남거든요! 제국을 무너트리려고 하지를 않나 이제는 신을 죽이다니 대체 어디까지 광인처럼 구실 겁니까?!”
“쉿, 아일라가 들을라.”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이미 다 들켰는데. 레제르브한테 들었어. 조금만 더 늦게 내려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머리가 아찔해졌다.
“왜 이렇게 울지? 이러다가 탈진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건 생리적인 거라니까요. 주군의 괴물 같은 신체로는 한 번도 느껴 보신 적이 없겠지만요.”
“레제르브의 부름을 받고 가서 이렇게 울다니…….”
울다니,에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 기묘한 침묵에 나는 더는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번쩍 떴다. 동시에 눈가에 눈부신 빛이 스며들어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지만.
“모, 몸이 무거워서 눈물이…….”
그리고 엉망으로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대체 감동의 재회는 어디에 있는 거야? 애절하고 절절했던 그때의 분위기를 이어 나갈 수는 없었던 거야?
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난 뒤에도 킬리안 앞에 서면 이렇게까지 위엄이 살지 않는다니, 신조차 쫄게 만들다니.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남자가 아닐 수가 없었다.
킬리안이 어르듯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다시 눈물을 닦아 내 주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겨우 진정한 나는 겨우겨우 다시 실눈을 뜰 수가 있었다.
동시에 킬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얼굴. 그는 전보다 마른 것인지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고 눈가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