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악녀 메이커 121화
“어서 와.”
킬리안의 싸늘해 보였던 인상이 순식간에 봄날의 눈꽃처럼 녹아들었다.
퇴폐함이 한층 더 깊어 보이긴 했지만 내가 알던 킬리안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더듬더듬 그의 움푹 팬 볼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덜덜 떨리다가 이내 뚝 떨어졌다. 그 손을 킬리안이 자연스럽게 잡아챘다.
“…….”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킬리안이 그 손을 다시 자신의 뺨에 얹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만지라는 듯이.
나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손가락 움직였다. 언제나 대리석처럼 매끈했던 피부가 살짝 까칠해져 있었다.
그냥 그 얼굴을 보자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영혼의 상태로 신계에 올라갔을 때는 잠시 잊고 있었던 슬픔이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왔다.
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사과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신인 나라도 괜찮다고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 재회가 오래갈지 모르겠다고 진실을 밝혀야 할까.
그저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나를 보고 그가 표정을 굳히며 트고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생리적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엔 아닌 것 같네요…….”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처음 보는 남자가 조금 수그러든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낯선 사람을 보고 나니 주변 공기와 풍경 또한 상당히 낯설다는 것을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은 붉은색과 금실의 비단 실로 엮인 화려한 문양의 자카드였다. 주변의 가구부터 장식장, 조각품 하나하나가 제국 황제의 침실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꿈도 꾸지 못할 사치품들의 향연이었다.
메르텐시아 저택도 충분히 웅장하고 커다란 편이었지만, 그곳은 어딘지 정적이고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고는 했다. 반면에 내가 있는 곳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람 사는 냄새와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질적인 장소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주군! 반려분께서 정신을 되찾으셨다면서요?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반려분은 대체 뭐 하는 호칭이야? 주군의 비니까 왕비님 아니야?”
“왕비…… 내 살아생전 왕비님을 볼 줄이야. 호칭에서부터 거부감이 느껴지는데. 왕비님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해서…….”
“아니,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주군이 저러는 것부터 엄청난 위화감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뭉텅이로 우르르 몰려왔다. 성별도 나이도 외모도 각양각색이었는데 대체로 젊은 편이었고 또 킬리안을 주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주군이라니. 킬리안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즉, 로툴로의 주술사들이라는 건가? 아니, 주술사가 이렇게 떼로 몰려 있어도 돼?
마력이 한곳에 몰려 있으면 마물이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를 늘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생고생을 했던 기억까지도.
“아가씨!”
그리고 그곳에는 황금색 눈동자를 글썽이며 양팔을 벌린 채 몸을 들썩이는 바실리도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 달려와 나에게 안기고 싶다는 기색이었으나, 그 옆에 서 있던 주술사들이 기겁하며 뜯어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바실리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물론 하루가 돌아가 전부 없던 일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혹시나 다친 곳이 있으면 어쩌나 해서. 그리고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도.
‘괜찮아 보이네.’
바실리의 주변에 주술사들이 있어준 덕분인 걸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며 볼을 꼬집고 꿀밤을 먹이는 모습만 봐도 그가 그들 속에서 귀여움을 받고 있다는 게 언뜻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누가 들어와도 좋다고 했지?”
그때, 킬리안이 고개를 돌리면서 음산하게 물었다. 내 쪽에서는 그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그러자 물밀 듯이 밀려오던 주술사들이 흠칫 몸을 떨면서 벽 쪽까지 뒷걸음치며 물러나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비유를 하기는 미안하긴 하지만 움직임이 조금 뭐랄까, 바퀴벌레 같았어. 사사삭 거리를 벌리는 게.
그때 한 덩치 큰 남자가 허리를 숙이더니 바실리를 툭 치며 속삭였다.
“꼬맹이. 지금 주군 상태 정상이신 거지? 눈빛이 여전히 좀 그런데? 반쯤 이성을 덜 찾으신 것 같은데?”
본인 딴에는 킬리안에게 들리지 않게 귓속말을 하려는 눈치였는데 음, 내 귀에도 다 들리는걸. 신의 영혼을 품고 있는 신체라서 그런지 전보다 청각이 확연하게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러자 바실리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는지 또랑또랑하게 답했다.
“집사님은 원래 저러잖아.”
“이 정신 나간 꼬맹이가! 내가 주군이라고 부르라고 했어, 안 했어!”
바실리가 킬리안을 버릇없이 집사라고 부르자, 남자는 기겁하며 얼른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 바실리는 버둥거리다가 겨우 그 손길에 벗어난 뒤에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정상인 주군이 뭔데.”
“그야…… 매사에 무기력하고 염세적이고 뭘 해도 지루해하시고, 별짓을 다 해도 화를 안 내고 그러시지?”
“그런 사람 몰라.”
나도 그런 사람 몰랐다.
킬리안의 평소 모습을 묘사한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라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군. 하지만 이곳의 주술사들은 다들 말없이 동의하는 눈치였다.
‘우리 주군 성격이 나빠졌어.’ 하고. 바실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냥 이게 원래 모습인 것 아냐?”
그 말에 주술사들은 ‘주군의 원래 모습?’ 하는 표정으로 킬리안과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마치 지금 당장 질식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여전히 광기 어린 저 눈을 봐. 다시 터트리시는 거 아니지? 저 광기가 또 하늘까지 닿으면 이번엔 진짜 감당할 자신 없다…….”
“음, 집사님은 원래 아가씨만 보면 저래. 3일 밤낮 굶은 눈빛…… 웁!”
그렇게 바실리는 주술사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킬리안은 속을 조금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힘들어?”
“…….”
“좀 더 자도 돼.”
그는 내 눈물을 닦아 준 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면서 말했다.
나는 다정함에 취해 잠시 눈을 나른하게 깜빡였다가, 이내 낮아지고 쩍쩍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여긴 어디예요?”
“로툴로.”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숲이라면서요?”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
“……거긴 마물들이 살고요?”
“잘 아네.”
왠지 이곳에 몰려있는 마력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묻자 킬리안은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마물 최대의 서식지라고 했다. 왕국 하나를 통째로 없애고 만든 숲인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마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은 절대 발도 디디지 못하는 곳이라고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오지 않는 이상에는.
“마물의 숲, 죽음만 품고 있는 숲이라고 해서 무덤의 숲, 끝을 향하는 숲이라고 하지. 타인의 시선을 피해 묫자리를 찾는 이들이 찾는 곳이다.”
유토피아라면서요.
어린아이들이 돌 대신 황금을 가지고 논다기에 멋대로 천국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던 나는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에 있는 곳이 바로 이 로툴로라는 왕국이라고.
그런 살벌한 바깥 풍경 묘사와 비교하면 내가 있는 곳은 여느 황궁 못지 않게 화려했다. 주술사들이 그간 벌어들인 돈이 썩어 넘치게 많다는 게 이곳만 봐도 바로 알 것 같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워낙 경황이 없어서 지나칠 뻔했지만 아까 분명 누가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내가 신계로 넘어간 그 찰나의 시간이 여기서는 한 달이라는 세월과 같다는 뜻.
왜 레제르브가 그렇게 인간의 부름에 재깍 반응하지 못했는지 어쩐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킬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은빛 눈동자에 선명한 광채를 띄우고 있다가 나와 눈빛이 얽히자마자 그 기색을 지워 내며 빙긋 웃었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않으면?
“지금은 상관없는 얘기지.”
아닌데요. 상관있을 것 같은데.
“할 말은 그게 다인가?”
킬리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하필이면 지금 나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화제라서 방금 나눴던 대화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할 말이 없어, 정말로.
너무 죄가 깊어서 용서조차 구하기 힘들어 말문이 막힌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인 걸까.
“자기소개부터 하는 건 어때.”
그러자 킬리안이 내게 제안했다.
내가 신과 관련이 깊은 무언가라는 것까지는 알아도, 내 정확한 정체를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레제르브의 부름을 받고 도망쳤으니까.
게다가 킬리안은 거기서 한 달이라는 세월을 더 애태우며 가만히 흘려보내야만 했다. 내가 레제르브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실 레제르브 본인일 확률이 가장 높은 그 상황에서 버려진 아일라의 육체만 끌어안은 채 홀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는…….”
저는 모두에게 잊혀진 죽은 신, 에코리르브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킬리안이 그토록 증오하던 레제르브라는 유일신은 사실 제게서 떨어져 나온 ‘냉정’이라는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이 모든 불행은요.
당신이 겪은 모든 고통은요.
“저로부터 기인한 거였어요.”
때 아닌 고해 성사의 시간이었다.
인간이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닌, 어리석은 신이 인간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그리고 부디 그에게 용서 받고 구원 받아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
“당신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냥…… 말을 하면 할수록 죄만 깊어지는 기분이라서 대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목이 메어 내 말은 거기서 뚝 하고 끊겼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심장을 난도질하듯 아프게 찌르고 목을 타고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부디 이 책임감 없고 뒷일을 조금도 보지 못했던 어리석은 신을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죄를 사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런 말을 어떻게 해. 태어나길 인간으로 태어나 수백 년의 세월을 죽지도 못하고 살아 있는 채로 끊임없이 죽음을 갈구하면서 살아왔을 킬리안에게, 감히.
나는 전전긍긍하면서 대체 어떻게 해야 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홀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제게 벌을 내려 주세요. 시간이 얼마 없긴 하지만 킬리안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부디 마음대로 하세요.”
킬리안은 그런 내 고해 앞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웃으면서.
“그래.”
내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