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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22화 (122/131)

# 122

악녀 메이커 122화

맞붙은 입술이 뜨거웠다.

그의 키스는 열 마디 말보다 더욱 선명하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만 됐으니 너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속삭여 주는 듯했다.

그건 분명 용서였고 구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성인군자인 것도 아니면서. 받으면 받는 대로, 아니면 그 몇 배라도 되갚아 주는 성격이면서. 한평생 품어 왔던 원한을 지워 버리고 내게 원망의 말을 단 한마디도 쏟아 내지 않았다는 게.

‘덧없는 희생이잖아…….’

인간을 위해 희생한 신과 그런 신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 인간이라니.

꼬일 대로 꼬인 관계.

하지만.

나와 킬리안의 인연이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이어져 있었는지 몰라도, 그를 만나기 위해 지금껏 수 억년을 소멸하지 않은 채 계속 윤회하여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킬리안이 내 턱을 받치고 능숙하게 고개를 트는 모습에 눈이 감겼다. 그러자 시야를 뿌옇게 흐리던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 혀가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속눈썹을 잘게 떨었다.

“애초에 네가 용서를 구할 이유는 없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로군.

나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킬리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았지만 어딘지 허탈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 미세한 감정을 읽어 낸 나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단단한 사람이니까 킬리안이 상처 받지 않을 거라고 내심 안심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 신도 평생 품고 가는 상처를 인간인 그가 모를 리가 없잖아.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다급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벌은 받아야겠지만.”

뺨을 지분거리던 입술을 떼어 낸 킬리안이 표정을 굳히며 눈매를 나른하게 접었다. 날 따뜻하게 바라보던 잿빛 시선이 요요한 이채를 발했다.

아무래도 내가 착각했던 것처럼 상처를 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 정말 나에게 무언가 벌을 줄 기색이었다.

“무슨…… 벌이요?”

내가 받은 감동을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트리는 소리에 잠시 멍청이 같은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서, 일단 그건 그거고 벌은 또 따로 주는 거였어?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받아야지.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 벌.”

그 말과 동시에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와 수도 없이 입을 맞췄던 습관 때문에 반사적으로 입을 살짝 벌리자 킬리안은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는 갈 곳을 잃은 손길을 허공에 띄운 채 멍하니 굳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빨리 회복해. 마음껏 벌줄 수 있게.”

그제야 아, 하고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몸, 그러니까 아일라의 몸은 한 달 만에 의식을 되찾은 환자라는 것을.

나는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여전히 내 몸이 움직이는 게 마치 영혼과 따로 노는 듯 이상한 감각이 들었지만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에 비하면 나아진 상태였다. 그때는 몸이 너무 무거워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으니까.

왠지 조금만 있으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괴물 같은 회복 속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환자인 나를 배려하는듯한 킬리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담백하게 물러나면서 눈빛이나 몸의 반응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주섬주섬 흘러내린 이불자락을 그러모으다가, 왠지 민망함에 살짝 시선을 내리깔면서 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킬리안 것이라고 새겨 준다면서요.”

“자극하지 마.”

환자는 환자답게 누워 있으라며 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침대에 눕히고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아니, 좀, 인간의 성욕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하다는 걸 또 이렇게 새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시도 때도 몰라서 저도 미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날 먼저 자극한 건 킬리안 본인이 아니었어? 적반하장이잖아.

‘저쪽도 시도 때도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킬리안의 배려를 순순히 받고 눈을 감아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지만, 머리로만 알았을 뿐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킬리안, 제가 이곳에 있으면 인간계의 균형이 무너진대요.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밖에 없대요.”

그리고 다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폭탄선언을 던졌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차라리 지금 말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알게 된 것보단 낫지 않은가.

킬리안은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일주일?”

“네.”

“일주일 뒤에 영영 떠난다고?”

말없이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팔뚝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잔잔하게 누그러져 있었던 그의 살기가 폭발할 듯하자 짐승 같은 감각이 먼저 반응한 탓이었다.

성안에도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누가 ‘으악, 시발 또!’ 하고 비명을 지르듯이 대놓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일라.”

살기 때문에 괜히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인데, 정작 킬리안의 표정과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온화했다. 누가 봐도 터지기 직전, 폭풍전야 같은 자태였다.

성자 같은 너그러움에 방심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의 인내심은 현재 한계에 달해 있었던 걸까?

킬리안의 끓는 점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그답지 않게 툭 건드렸다고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게 어쩐지 짠했다. 멀쩡한 척 속은 곪아서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걸지도.

이렇게 되니 말 꺼낼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말하면 또 그런대로 후폭풍이 닥치겠지만 지금 당장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신이든 뭐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떠난다는 말은 죽어도 용납 못 하겠는데…….”

하지만 킬리안은 아파하지 않았다.

“네가 천사라면, 내가 있는 곳까지 타락해 달라고 했었던 말 기억해?”

“어…… 네…….”

왠지 불안함에 말끝을 늘였다.

사실 난 천사가 아니라 신이었지만 어느 쪽이든 인간계가 아닌 천상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건 다를 바가 없지.

그러자 킬리안이 붉은 입매를 곱게 휘면서 말했다. 아파하기는 무슨, 그의 일렁이는 은빛 눈동자에 케케묵은 녹슨 광기 같은 것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여기까지 끌어내릴게.”

“…….”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을 거야.”

“…….”

내가 일주일 뒤에 또 말없이 떠났다면 아마, 레제르브는 죽지 않았을까? 강렬한 촉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킬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잠시 그의 손등을 어르듯이 토닥여 주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킬리안도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스스로 어처구니없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무르지는 않았다.

“저도 떠날 생각 없어요.”

이 세계가 무너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일주일 뒤에는 다시 신계로 올라가긴 해야겠지만, 그 뒤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미 해결 방안은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대신 의견이 상충하는 한 신과 한 인간의 타협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킬리안을 대놓고 무섭다고 언급한 레제르브를 잠시 떠올렸다.

“좀 오래 기다리게 할지도 모르고, 그 방식이 킬리안을 또 상처입히게 될지도 몰라요.”

“계속 말해야 안심할 수 있다면 만족할 때까지 해 줄게. ‘상관없다’고.”

킬리안은 살기를 갈무리하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그래, 내가 당신의 그 말에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

나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내 손을 꽉 움켜쥔 킬리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신이 되라고 해도?”

그러자 그가 잠시 멈칫하고 몸을 굳히더니 눈을 굴려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설마 신이 되라고 제안할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그 때문에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그건 좀 놀라운데.”

신이 되라는 말은 결국 나를 위해서 당신이 또 희생해 달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이었다.

“그냥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고요.”

레제르브만으로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또 다른 신을 만들어 신의 권리를 전부 위임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나의 ‘냉정’을 떼어 내서 레제르브를 만들었는데 다른 신이라고 해서 뚝딱 만들어질까? 나라는 존재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또 나누어지는 과정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수천 억 년 전의 까마득한 기억을 내가 대체 언제 되찾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차피 킬리안이나 나나 절대 죽을 수 없는 몸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제가 앞으로 내길 결정에 수많은 인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겠죠. 어쩌면 킬리안 같은 피해자가 또 생겨날지도 모르고…….”

잠시 망설이다가 내 모든 고민을 전부 털어놓자 킬리안이 물었다.

“죽은 신…… 모두에게 잊힌 신. 네 원래 이름이 뭐지?”

내 이름?

나는 머뭇거리다가 레제르브에게 들었던 내 원래 이름을 떠올렸다. 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이상한 이름이었다.

“에코리르브.”

“그래, 에코.”

킬리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그렇게 부르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줬다.

내 몸이 의식 불명인 사이에 누가 씻겨주기라도 한 건지, 아일라의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한 풀냄새가 풍겼다. 킬리안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향내였다.

“인간에게 갈가리 찢겨 수도 없이 네 권능을 토해 내고 희생했으니 이제 그대도 사랑 받을 때가 됐잖아.”

희생? 아니 그건 내가 자의로…….

그러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에코리르브는,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인간에게 헌신적이었나.

단 한 번도 아무런 보답도 원하지 않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일라, 아니, 윤하늘은 왜 그토록 사랑받기를 갈구했던 걸까. 왜 늘 애정에 굶주리고 결핍을 느꼈던 걸까. 왜 모두에게 사랑 받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그것에 자신을 대입해서 생각했던 것일까.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킬리안이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헤어지기 싫어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즉시 이기적인 답을 했다.

대체 신 같은 게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신답든 신답지 않든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오로지 킬리안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팔을 벌렸다.

“죗값을 치르게 해주세요.”

“원한다면.”

그리고 이번에는 킬리안이 망설임 없이 나를 안았다.

* * *

아일라를 만난 직후, 샬럿은 그대로 방에 틀어박혀 완전히 칩거하고 있었다. 베르너든 레녹스든 누가 찾아와도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베르너만 손에 얻으면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샬럿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모든 일에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저 영애는 또 누구야.’

황태자가 황실 정원에서 새로운 여자를 끼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샬럿이 머무는 궁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건지 뭔지.

그런데 불행히도 샬럿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분노는커녕 그저 아일라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심란할 뿐이었다.

그런데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샬럿에게 말은 건 건 소피아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샬럿은 자신의 개인 시녀이면서 새삼스럽게 인사하는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저렇게 운을 떼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제 의견을 감히 고하자면, 저분을 저는 걸어 다니는 돈이라 칭하겠습니다.”

“……뭐?”

다짜고짜 나타나서 미친 발언을 하는 소피아를 샬럿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제 최고의 가치는 돈이거든요. 제가 만약 아가씨였다면 있는 돈 없는 돈 다 뜯어내게 해서 살 거예요.”

“…….”

“물론 제 가치관을 아가씨께서 보고 배우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고요. 그렇게 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돈을 펑펑 쓰고 누리면서 살아남아 왔죠.”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소피아의 노골적인 욕망에 샬럿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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