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악녀 메이커 123화
걸어 다니는 돈? 돈을 다 뜯어?
멍하니 굳어져 있던 샬럿이 소피아의 말에 반응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갑자기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샬럿은 살짝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살갑게 웃으며 호의를 표하기에 바쁘더니 갑자기 자신의 최고 가치는 돈이라느니, 사실은 본인은 이기적인 사람이라느니 고백하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저 말은 그동안 살살거리며 샬럿의 비위를 맞춰 왔다는 뜻이지 않은가.
“일 그만둘 생각이야?”
마지막이라고 쌓아 뒀던 것 다 털어놓으려고 온 건가? 샬럿은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뇨,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전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답니다.”
그러자 소피아는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샬럿은 충격을 받아 동요하기는 했지만 이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자신 밑에서 일하는 시녀까지 본성을 드러내나 싶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이 모든 건 사실 연극일 뿐이었다고, 넌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런 허탈한 기분이었다.
“넌 또 내 어디에 실망했는데?”
이 모든 것에 지친 샬럿은 자신의 깨어진 가면을 고쳐 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자 소피아가 거침없이 봉인을 해제한 입과는 상반된 정중한 태도로 조아리며 답했다.
“실망은 기대가 있어야 하죠.”
“뭐?”
“제가 기대가 없었다는 뜻은 아가씨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녀이고 천사든 아니든 제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는 뜻이에요. 중요한 건 제게 돈을 안겨 주느냐 마느냐죠.”
……제정신인 건가.
“내가 이 일을 전하께 고하려면 어쩌려고 이렇게 경거망동인 거지?”
샬럿은 나무라기보다 네가 진정 미쳤느냐는 듯, 소피아의 정신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그리고 그때, 소피아는 아일라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받고 나서도 ‘설마 진심인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던.
“절 어디에 쓰시려나 했더니…… 설마 이런 일에 쓰실 줄이야.”
“무슨 말이야?”
“아가씨 기운 좀 북돋아 주려고요.”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샬럿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뭐야. 누가 여기 앉으래?”
“에이, 뭐 어때서요.”
샬럿은 소피아의 뻔뻔함에 하도 어이가 없는 나머지 무기력함에 잠겨 있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리고 말았다.
소피아는 샬럿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면서 운을 뗐다.
“가문에 빚이 많으시다면서요? 아가씨를 보면 제 어릴 적이 떠올라요. 아가씨나 저나 같은 자작가 출신이기도 하고.”
“…….”
“늘 가난이란 이름을 달고 살았잖아요. 그리고 저렇게 아가씨의 마음을 얻고자 헛수고를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보석을 선물을 달라고 해 보세요. 좋은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그런 건 이미 많이 받았어.”
“별로 안 좋아하세요? 보석.”
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그건데, 하고 소피아는 괜한 사족을 붙였다.
“보석 같은 건 이미 많이 받았어.”
“그런데 기쁘지 않으세요?”
뭘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샬럿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상대의 말에 항상 성의 있게 답하던 평소의 버릇 때문에 또 꼬박꼬박 대꾸했다.
“뭐, 처음에는 기뻤는데 이제는 별로 아무런 감흥도 없어…….”
뭐든 달라고 하면 준다. 원하면 이 방에 산처럼 쌓아 둘 수도 있다.
그러니 샬럿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흥미가 시들해지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런 것인가 했더니, 자신의 힘으로 얻어 낸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일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하긴, 그런 건 처음부터 그랬다. 내가 무엇 하나 내 손으로 얻어 낸 적이 있었나…….
“가난이 지긋지긋하지 않으세요?”
“가난하지 않으면 좋지. 하지만 별로 가난해도 상관없었던 거 같아.”
샬럿은 턱을 괴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고향에서 행복하던 한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가난해도 행복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수도로 올라와 황태자를 포함한 남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이후로 팔자 피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가족 중 누구도 샬럿에게 남자 하나 골라잡아서 가문의 빚을 갚으라는 강요를 하지 않았음에도.
‘물론 결국 여러 남자를 재고 저울질한 것은 내 선택이고 실수였지만.’
하지만 애초에 가난이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은 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대체 난 뭐 그리 필사적이었지.
“빼앗길 것 같아서…….”
“그만큼 가치가 있어요?”
“모두가 그렇게 말했어.”
“아가씨한테는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샬럿은 애초에 가족들을 향한 애정은 느껴 본 적 있어도,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잘 몰랐다. 주변에서 하도 널 사랑한다고 고백 받으니 그러려니 했지.
“그럼 뭘 하고 싶으세요?”
뭘 하고 싶으냐고?
샬럿은 아일라에게 있는 그대로 너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고민했던 문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뭔가 나 스스로…….”
그냥 뭔가 나 스스로 이루고 싶었다.
스스로 바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간에. 지금 이대로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이런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려면 메르텐시아 영애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라는 것부터 찾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니 샬럿은 황태자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아일라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녀를 만나면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제가 도와드릴게요.”
소피아가 여상하게 말했다.
“저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자각은 있지만요, 그래도 제가 누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나 자신을 속이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소피아는 처음에 본인이 주장했던 대로 한몫 단단히 챙길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이미 다 불어 버린 마당에 내숭 따위는 사치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 지금까지 몰랐나 싶었을 정도로 탐욕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샬럿은 그 뻔뻔함에 어처구니없어하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럼 도와줘.”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 * *
나는 킬리안의 몸 곳곳을 유영하는 뱀을 손가락으로 쭉 따라갔다. 그의 근육이 움찔 떨릴 때마다 뱀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면서 기어갔다.
팔뚝에서 시작한 뱀 문양의 주술이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가로질러 복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뱀의 움직임을 따라 손으로 덧그리던 나는 하던 것을 그대로 멈췄다. 뱀은 끝도 없이 밑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하지 그래?”
아랫배 언저리에서 움직임을 뚝, 하고 멈춘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킬리안이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흘렸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그가 그 전에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멈췄던 내 움직임을 그가 멋대로 이어 나갔다.
내가 만져지는 게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저릿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킬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삼 부끄러워하는군. 어젯밤부터 수도 없이 네 안을 채웠던 건데.”
아, 좀. 갈수록 더 능글맞아져.
물론 경험이 없을 때도 상당히 뻔뻔한 편이긴 했지만,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능숙해지고 나니 완전히 물 만난 물고기였다.
온종일 시달렸으면 충분하잖아. 나는 반대 손으로 킬리안의 입을 틀어막은 뒤에 그대로 침대 밖을 빠져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법도 하건만 아일라의 회복력은 실로 놀라웠다.
“헉, 이게 뭐야.”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본 순간 나는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온몸에 빼곡하게 채워진 자국의 상태가 심각했다. 누가 보면 맞은 건 줄 알겠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돼요?”
킬리안이 집요하게 굴면서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는데…….
나는 울긋불긋하다 못해 시꺼메진 목덜미를 더듬었다.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온 킬리안이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끌어당겼다.
“많이 인내한 거야. 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것이라고 새겨 준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몰랐는데 저번에는 양호한 편에 속했던 거다.
이 남자 과연 아일라의 몸으로 감당할 수나 있을까. 나는 이번에는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빤히 거울 너머를 응시했다. 이건 마치 짐승에게 호되게 물린 자국 같은데.
그런데 그때, 거울에 비친 멍 자국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어느새 완전히 사라졌다.
“……어?”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흔적 하나 없이 새하얀 목덜미를 더듬었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킬리안이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였다.
“키스 마크는 신성력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줄 알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저번에는 꽤 오랫동안 자국이 남아 있어서 숨기느라 고생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대체 신성력이 발동하는 조건이 뭐란 말인가.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서 그런가?
“흠, 혹시 상처라고 인식해야 사라지는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킬리안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내 몸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꽤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토끼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런 건가?”
내가 맞은 자국 같다, 짐승에게 물린 자국 같다, 하고 생각하자마자 마크가 완벽하게 지워졌으니까.
“그렇다면 마법이나 주술이 통하지 않는 것도 네 생각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는데…….”
“네? 아닐걸요? 처음에 킬리안이 살인 주술 걸었을 때 나 죽을 거라고 속으로 온갖 오두방정을 다 떨었는데요?”
그리고 불꽃 마법을 쓸 때도 당연히 불에 델 거라고 믿어서 순간 화들짝 놀랐고 말이다.
그러자 내 말에 킬리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신의 힘을 자각했잖아.”
아니,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해서 이게 뚝딱하고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루프를 일으킬 때 내 힘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내 목을 수십 번 찌른 것 아닌가.
나는 그 순간 아공간에 갇혔다는 린다를 떠올렸다. 아공간은 그냥 위아래 왼쪽 오른쪽 구분 없이 온통 새까만 곳으로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는 우주 같은 공간이라고 들었다.
루이스는 킬리안의 명을 어기고 입을 함부로 놀린 죄로 그곳에 린다와 함께 갇혀 한 달 내내 린다를 고문해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킬리안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에코.”
잠시 앞으로도 데굴데굴 구를 예정인 발닦개를 향한 명복을 빌어 주고 있는 사이 킬리안이 벨벳같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정말이지 낯설고, 낯간지럽고, 어젯밤 수십, 수백 번도 더 넘게 들어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이름. 아직 애틋한 감정보다 야릇한 기억이 생생하게 아로새겨진 그 이름.
저도 모르게 낯을 붉히며 부르는 대로 빤히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밀어 넣더니 피가 흐를 때까지 망설임 없이 깨어 물었다.
“간절히 빌어 봐. 내 주술이 너에게 닿을 때까지.”
그와 동시에 그의 손가락 끝에서 성스러운 황금의 빛이 넘실거렸다.
밤하늘에 새겨진 수만 개의 은하수처럼 펼쳐진 빛의 오로라를 나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주술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