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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24화 (124/131)

# 124

악녀 메이커 124화

처음이지만 이런 것과 비슷한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킬리안이 예전에 마차에서 내게 주술로 행운을 빌어 줬을 때. 반딧불이 같은 은은한 불빛이 마차 안을 한가득 밤하늘로 채웠던 기억이었다. 그걸 떠오르니 그냥 어쩐지, 이게 축복 종류의 주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별의 조각을 손안에 가득 담아 보았다.

주술에 항상 동반되는 효과라는 걸 알고 있어도 별 무리가 손에 닿자마자 빛을 잃고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웠다.

동시에 킬리안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손을 쥐고 내 손목 위에 무언가 빼곡하게 그렸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그의 창백한 피부 위에 흐르던 선명하게 붉은 핏물이 고스란히 내 손목 위로 아로새겨졌다.

어찌 보면 기괴하다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영원히 내게 닿을 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던 그의 주술이 어쩌면 내게 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킬리안이 내게 무슨 해로운 주술을 쓸 리도 없고. 그가 바란다면 그게 뭐든 그냥 내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빛무리가 정확하게 내 손목에 스며들었다.

“어…….”

나는 얼빠진 소리를 뱉으며 내 손목에 새겨진 낙인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황금빛 화려한 문양은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찬연하게 반짝였다.

따갑지도, 간지럽지도 않아서 이게 통한 건지 그냥 문양만 새겨져서 통한 것처럼 보이는 건지 헷갈렸다.

“통한 거 맞죠?”

고개를 들어 킬리안을 올려다보니 내 예상이 정확히 맞는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주술을 사용해 자신의 손목에도 같은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게 정말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미소는 만족스러움 그 이상인 것 같았다.

킬리안을 이루는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그의 반응 하나하나 늘 유심하게 살피는 버릇 때문인지 확연하게 보였다. 권태롭고 염세적이며 때로는 초연해 보였던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 옅어졌다.

나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이게 무슨 주술인데요?”

“글쎄.”

어어? 왜 말 안 해 줘.

“수상한데?”

아까까지 뭘 하든 킬리안이니까 믿는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러니까 불안해지잖아. 날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뭐, 믿겠지만요. 믿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뚫어져라 응시하자 그가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풀과 나무를 스치며 숲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상쾌한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벌은 이걸로 하지. 때가 올 때까지 말해 주지 않는 걸로.”

그리고 정말 많이 봐줬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저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이게 벌이라고 말하면 죄가 많은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지만 말이야.

내가 쾌감에 지쳐 그만하고 싶다고 흐느낄 때마다 벌이라고 했던 어젯밤은 뭔데?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수도 없이 어르고 다독이던 말들은 뭔데? 설마 절 가지고 노셨던 겁니까?

“어제 벌 다 받은 게 아니었어요?”

그러자 킬리안이 웃는 얼굴 그대로 손길을 천천히 미끄러트렸다. 비타민처럼 상큼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질식할 것 같은, 숨이 막힐 때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질척거림으로 변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노골적인 욕정이 피어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벌을 그쪽으로 대체해 줄 수도 있고.

킬리안이 내 볼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나는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견디지 못하고 눈가를 파르르 떨다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이곳에 곧 혼란이 드리워지겠지만.”

“아?”

“진짜 벌이라면 더는 안 봐줘. 고작 며칠 안에 널 놓아줄 리가 없잖아.”

“……아니, 실언이었습니다.”

킬리안은 항상 저렇다.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결국 한 가지 선택밖에 못하게 만들어. 아니면 본인이 원하는 상황으로 아주 능숙하게 이끌어 가든지 말이다.

내 선택 하나에 이 세계의 운명이 갈리는 상황이라 경거망동할 순 없었다. 인간계가 무너지느니 차라리 이게 무슨 주술인지 모르는 편이 낫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킬리안의 발언은 내 욕망을 자극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계속 어젯밤의 상황이 머릿속에 수도 없이 반복 재생되는 바람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틀었다.

항상 그의 곁에 있으면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 수렁에 발을 담그는 어리석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그때 킬리안이 내 양 뺨을 감싸 쥐고 다시 자신 쪽을 보게 했다.

나른하게 접힌 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검은 속눈썹 사이사이로 악마가 이 땅 위에 내려온 밤처럼 요요한 달빛이 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혹하지 마요.”

“유혹은 네가 했는데.”

그러자 킬리안이 손가락으로 내 입술 위를 살살 문질러 이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빼내어 주면서 말했다.

“네? 아니, 제가 언제요? 이러다가 한숨 소리도 유혹이라고 하겠네.”

“네 숨소리도 꽤 야해.”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킬리안은 자기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성이 있었다. 얼굴은 물론 숨결 목소리 하나같이 섹스어필 같다고. 물론 지금은 실제로 날 유혹하고 있는 듯했지만 말이다.

킬리안은 나를 자연스럽게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잠을 자지 못해 좀 피곤하긴 했지만, 신체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는 나는 못 이기는 척 결국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 체력도 회복시켜 주고 성욕도 회복시켜 주는 신성력이란 참으로 놀라웠다.

“에코, 나의 신.”

킬리안은 나를 침대 위에 앉힌 뒤 그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이렇게 고개를 한껏 젖히며 나를 올려다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듯했다.

아니, 사실 킬리안에게 있어서는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에 걸쳐 까마득한 아래에서, 밑바닥 중 밑바닥에서, 닿지 않을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이제 그의 손에 닿는 거리에, 그가 원한다면 세상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내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평생 빌었던 소원이 있어.”

“뭔데요?”

“나를 죽여 줘.”

순간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렸다.

“죽기 위해 온갖 발악은 다했지만.”

하지만 나를 멀거니 올려다보는 킬리안의 눈빛에는 삶을 포기한 사람들 특유의 체념과 초탈의 빛은 없었다. 그냥 덤덤하게 옛날이야기를 풀어놓듯이 자신을 고백하는 것뿐이었다.

“죽었다면 널 만나지 못했을 테지.”

“…….”

“이제 절대 죽을 생각 없어. 너와 대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지 짐작조차 안 되니까. 널 끌어안을 수 있다면 신이 되는 게 뭐 대수일까.”

킬리안은 내 발을 들어 올려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기사의 맹세를 떠올리게 하는 경건한 행위임에도 그가 하니까 왠지 숨이 막히고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습하고 질척거리는 소유욕이 발등에 닿는 그의 입술 끝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너도…….”

킬리안은 나를 올려다보며 붉은 입매를 매혹적으로 휘었다. 이어지는 말을 듣기 위해 모든 청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발등에서 시작한 그의 손길이 서서히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마치 그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뱀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기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과연 대체 누가 악마의 유혹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야. 킬리안은 그중에서도 더욱 악질이었다. 감히 마왕조차 감당하지 못할 거야, 저건.

“날 위해 기꺼이 타락해 줄 거잖아.”

정말 누가 킬리안의 유혹을 감당해.

* * *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 내의 주술사들이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관찰하고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쁘네.”

“그러게 누가 봐도 예쁘네.”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타입.”

“주군 취향이 그랬구나.”

“주군도 그러잖아.”

“아니, 주군은 화려하지만 섬뜩하게 번뜩거리는 타입이지.”

“아, 그거 인정. 완벽한 비유였다.”

그런데 대화들이 왜 이래.

어째 신이 본인들의 영역을 침입한 것에 대한 경계라기 보단,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더 가까운 시선이었다. 처음 보는 것을 발견하고 ‘이게 뭘까?’ 하고 다가와서 괜히 쿡쿡 찔러 보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곤두서지 않고 지나치게 온화한 분위기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내가 킬리안과 연인 비슷한 사이라고 해도 이곳은 주술사들의 영역이니까 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적의를 내비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대체 누구야?”

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바실리에게 속삭였다.

바실리는 이곳은 킬리안의 영역이라 차마 나를 대놓고 껴안거나 내게 치대지는 못하고 그냥 껌딱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나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주술사래.”

그건 나도 보면 알아.

음, 하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바실리는 주술사들 한 명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소개해 주었다.

“발닦개 1, 2, 3, 4, 5…….”

“이눔 시키!”

그러다가 단체로 붙들려서 헤드록을 당했다. 진짜 발닦개인지 아닌지 몰라도 맞을만한 말을 하긴 했기에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걸 킬리안이 아니라 바실리가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애초에 진짜 화내면서 호되게 혼내는 게 아니라 장난스러움이 섞여 있었으니까. 오히려 주술사들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엄청나게 귀염 받는 걸로 추정된다.

바실리의 머리를 콩, 하고 때린 젊은 여자가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바실리야, 실리야. 왜 네 버르장머리는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 않니.”

“미안해?”

“그래, 애가 그럴 수도 있지.”

바실리가 얻어맞은 머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여자는 순식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꼬맹이 넌 귀엽지라도 않았으면 진작 나한테 죽었을 거야, 하하.”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남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너 때문인 것 같은데.”

“야, 좀 버릇없으면 어때? 원래 귀여운 건 귀여운 것만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다 하는 거다.”

“뭐, 그건 그래.”

남자는 여자의 말에 순식간에 수긍하며 바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바실리가 커다란 황금색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손길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나른하게 접었다. 마치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 같았다.

그러자 주술사들은 너도나도 쓰다듬겠다면서 손을 뻗었다. 바실리는 성가셨는지 언제 골골 거렸느냐는 듯 민첩한 움직임으로 피한 뒤에 후다닥 뛰어와서 내 등 뒤에 숨었다.

주술사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가 보기엔 그냥 너희 다 문제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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