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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25화 (125/131)

# 125

악녀 메이커 125화

뭘 해도 오냐오냐하는 그들을 보니 바실리의 버르장머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찾기 요원해 보였다.

사실 그동안 상처 받았을 일이 많았을 테니 바실리가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아서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글러 먹긴 마찬가지인 건가.

그렇게 바실리가 내 등 뒤에 숨자, 주술사들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나도 가만히 그들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나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애매했던 탓이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아일라이기는 한데…….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이 민망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들 중 체격이 가장 큰 남자 한 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진작 만나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침실에서 나오시질 않으셔서 계속 기다렸습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체력도 좋으시나 봅니다…… 컥!”

급소를 아주 정통으로 얻어맞고 쓰러진 남자를 등 뒤로 하고 여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것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다한다는 발언을 한 여자였다.

“마르셀린이라고 합니다. 주군을 곁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고.

하긴, 하늘 아래 나보다 높은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이미 아일라로 생활하면서 하대에 익숙해진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마르셀린에게 물었다.

“모시고 있는 거라면 왕의 호위 기사 같은 건가? 아니면 측근?”

“글쎄요. 과연 그분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요……. 하는 일은 꼬맹이 말마따나 그냥 심부름꾼이지만 그래도 측근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킬리안에게 호위 기사나 측근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전자는 진짜 필요 없을 테고 후자는 아무래도 본인이 상당히 귀찮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로툴로는 신분이라든지 계급 없이 다들 똑같습니다. 주군도 아주 옛날부터 왕이 되시길 원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모시고 떠받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뭐든,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마르셀린은 말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이미 취급이 왕비 취급이었다.

나는 그들이 동시에 꾸벅 허리를 숙이자 내심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잠깐만, 나한테 이러지 마라.

“내가 신이랑 관련 있는 건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킬리안을 신으로서 곁에 두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남겨진 주술사들을 배신하고 버리는 행위잖아.

“듣기 전에 당신에게 느껴지는 기운으로 이미 알고 있었죠. 처음에는 물론 반발도 있었지만, 전부 한 달 전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당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염려치 마시기를.”

“……협박당했어?”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요, 하하.”

마르셀린은 한 달 전을 추억하는 것인지 어딘지 공허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신이든 뭐든 됐습니다. 주군도 받아들일 만한 신이라면 우리도 받아들여야죠. 적어도 저는 단지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서 당신을 재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주술사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신에게 가장 당한 게 많은 킬리안이 받아들였으니 본인들도 별다른 이의가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덤덤한 건 아니었다. 내 말에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시선을 피하거나 불똥이 튀는 눈을 그대로 감은 주술사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였다.

“나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나는 신이야. 죽은 신.”

주술사들은 당연히 내가 레제르브인 줄 알았는지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의아함은 이내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유일신을 믿는 세계이니 이런 반응일 수밖에 없겠지.

나는 주술사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필요한 말만 간추려서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웠는지 내가 말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죽은 신, 그렇군요. 당신이 그 조각의 주인…….”

마르셀린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탓하기에는 그만큼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은혜?”

내게 무슨 은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신의 조각 때문에 주군께서 신의 형벌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힘을 얻은 덕분에 모든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었고, 이 왕국이 세워지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뭐, 죽는 게 평생 소원이었던 주군께는 안된 얘기지만요. 마르셀린은 쓸쓸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짧았지만 길었던 날 밤에 킬리안이 내게 속삭였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제 절대 죽을 생각 없대.”

이 정도는 주술사들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킬리안은 그들에게 가족 같은 존재이니까. 안심하라는 뜻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내 말에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당연한 말을 왜 하지’ 하고 말하는 듯 어딘지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제가 주군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항상 죽을 날만 세고 있는 황혼처럼 보였거든요.”

“지금은 뭐 죽는 건 고사하고 당신이 어딜 가든 따라갈 기세였죠. 인간계와 신계를 막고 있는 결계를 뜯어 버리려고 했을 때 전 정말 이대로 세상의 종말이 온 건가 싶었습니다.”

“평소 얌전하던 사람이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죠.”

“사실 따라서 신이 된다고 해도 저희는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그러고도 남지.”

“응.”

그러면서 주술사들은 이미 킬리안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대강 파악한 눈치였다. 유예 기간이 지난 후에 킬리안이 신이 된다고 하면 남겨진 그들은 어쩌나 고민했는데 허탈한 결과였다.

“신이 된다면 너희는 괜찮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말했잖아요. 주군의 선택이라면 존중한다고.’ 하고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개뿔 원수의 사랑까지 박살 내실 분이십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잘 알겠죠? 당신, 그러니까 에코리르브 님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주군의 판단이 그러하다면요.”

마르셀린이 말하자 명치를 얻어맞고 바닥에 엎어져 있었던 사내가 비척거리며 일어나 다가오면서 말했다.

“뭐, 그만큼 신님이 좋아 죽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시도 놓아주고 싶지 않겠다는 거겠죠. 이래서 늦바람이 무섭다고…… 악! 아, 좀 그만 때려!”

남자를 망설임 없이 퍽퍽 때리던 마르셀린은 그가 손목을 잡아채며 울분을 토하자 뚱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바실리, 물어.”

“웅.”

남자는 사색이 되어 뛰어갔다. 그 뒤를 바실리가 사냥개처럼 쫓았다. 버르장머리를 걱정하더니 어째 길들이기는 완벽하게 길들인 것 같은데.

그보다 취급이 여전히 개인데 괜찮은 걸까……. 음, 방식이 좀 과격하기는 하지만 귀염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괜찮은 것 아닐까.

나는 그들이 잔상만 남기고 번개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 복도를 아련하게 응시했다.

그때 마르셀린이 말을 마저 이었다.

“섭섭하긴 하지만 사실 진작 떠났어야 할 분을 저희가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늘어진 거였으니까요. 무슨 염치가 있어 떠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주군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천년만년 살아갈 것도 아니고. 아마 그전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아서 신이랑 담판을 지을 거라고 확신했죠. 설마 신과 연애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요.”

주술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혀를 내둘렀다. 실망하기 보단 오히려 킬리안의 범상치 않은 수완에 감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이들에게 킬리안의 존재는 뭔지 의아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는 하나같이 내 예상과 어긋나는 답변들을 들으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들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너희가 원한다면 불행을 없애 줄 수도 있어. 마력을 없애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게 해 줄 수 있어.”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겪어 왔어야 했던 불행을 어설프게 위로하고 속죄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신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내가 그런 게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레제르브에게 부탁을 하든, 방법을 찾아내든 해서 정말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주술사들은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력은 불행이 원천입니다. 불행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손에 넣은 거죠. 불행이 없으면 모든 능력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뭐,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우릴 배척하는 게 당연하죠. 가까워지면 불행해지는데 누가 그런 걸 감수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잘못인 건 아니니까요. 마력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맞춰 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뒤에서 툭, 하고 건드렸다. 시선을 내리자 날 껴안을까 말까 망설임이 가득해 보이는 손이 내 허리 언저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아가씨, 가는 거야?”

돌아보니 바실리가 어딘지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도를 한 바퀴 빙 돌아서 온 모양이었다. 바실리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사내의 모습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방황하던 손은 결국 내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돌아오기는 해?”

꼭 돌아올 거야, 하고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으로써는 아무런 확답도 줄 수 없었기에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이라면 보러 올 수 있어.”

“그렇구나.”

좀 더 매달릴 줄 알았더니 바실리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예전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된 상태라서 그런 걸까?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로서는 고작 며칠이 흘렀을 뿐인데. 자칭 다섯 살이 이렇게까지 성장해 있다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바실리는 꼭 붙들고 있던 내 옷자락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아가씨, 나는 있잖아. 내가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고 믿고 싶은데, 그렇다고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심지어 무슨 자아 성찰까지 하기 시작했어? 회한 섞인 말을 하고 있잖아.

“아가씨가 신이니까 모든 걸 다 용서해달라고, 죄를 없애 달라 하고 싶은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신이 날 용서해 주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 신관들은 역시 하나같이 바보야.”

바실리는 후회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 본 사람처럼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목이 메어 올 때 사람들이 짓곤 하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냥 평생 불행해야 할 것 같아.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겠지만, 그냥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 그러니까 아가씨한테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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