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악녀 메이커 126화
대체 이 아이가 언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나. 몸만 컸지 평생 어린아이처럼 굴 줄 알았던 바실리가 처음으로 그 나이 또래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술사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곤란한 듯한 미소를 띠며 볼을 긁적였다. 바실리에게서 나온 말들의 출처는 전부 저들일 게 극명했다.
주술의 능력을 잃는 게 싫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무래도 마력이 지금까지 저지른 죄의 속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죄…….’
건들기만 해도 사람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 죽이기까지 하는 불행으로 인해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해쳐 왔겠지. 바실리의 경우는 린다의 명령에 따라 제 손으로 직접 암살까지 했으니까 죄책감이 비교도 할 수 없을 테고.
“그렇구나.”
죽음의 무게를 알아 버렸구나.
하긴, 그 참상을 떠올리면 신인 나조차 속이 불편한데 바실리는 어떻겠어.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수도 없이 신체가 터져 나간다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게 될 것이다.
바실리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죄를 사해 줄 수는 없지. 용서는 피해를 본 사람이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킬리안에게 구원 받은 것이기도 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등을 돌려 그대로 바실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냥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도, 어설픈 훈계 내지는 별로 와닿지도 않는 위로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지막 인사로 그를 안아 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 줄 게 없었다.
바실리는 놀랐는지 잠시 몸을 굳히다가 나를 꼭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서 물귀신처럼 다가온 덩치 큰 사내가 바실리의 뒷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어냈다. 덕분에 억지로 포옹을 풀 수밖에 없었다.
“꼬맹아, 어린 나이에 벌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꼴을 어른 된 도리로서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아, 나는 그제야 킬리안을 떠올리고 뒤로 슬쩍 물러섰다. 바실리는 남자의 옆머리를 꾹꾹 밀어내며 성질을 냈다.
“저리 좀 가. 방해하지 마.”
“이 콩알만 한 게 살려 줬더니 누구한테 성질이야?”
남자는 바실리가 계속 밀어내자 성질이 났는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바실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포옹이 좋은 거면 내가 해 주겠단다.
나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은근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역시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주술사들의 삶은 깊이 파고들면 아주 끔찍한 짓을 당하기도 하고 저지르기도 하고, 고뇌하고, 오열하고,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만났고 행복해 보이니까. 그렇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킬리안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술사들에게, 이 땅, 로툴로에서 자신이 더는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그렇게 단언했던 거겠지.
“아, 맞아 나 궁금한 거 있었는데.”
나는 문득 기억 저편에 묻어 놨던 일이 떠올라 마르셀린에게 물었다. 지금 대화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팔링게아의 날에 킬리안이 로툴로를 떠나기 전에 말이야. 무슨 끔찍한 일을 당한 것 같던데, 뭔지 알아?”
“끔찍한……?”
마르셀린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바실리를 괴롭히는 덩치 큰 사내를 툭, 하고 건드리면서 물었다.
“전 그때 의뢰를 나가 있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왈도, 너는 팔링게아 때 왕성에 있지 않았어? 비번이었잖아.”
“응? 아, 그때? 장난 아니었지. 아주 끔찍한 사고였어. 루이스 그 멍청이가 주군의 고간에 차를 쏟…… 아악!”
그리고 왈도는 그대로 죽었다.
나는 가늘게 경련하는 그의 팔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킬리안이 짙게 웃으면서 뻗었던 손을 소매 아래로 감췄다.
“마지막 인사는 끝냈어?”
“…….”
그가 내게 안기라는 듯이 양팔을 벌렸다.
나는 킬리안의 품 안에 자처해서 안겼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왈도가 루이스 꼴이 날 것 같아서.
팔링게아의 날, 열 번 정도 하루가 돌아간 것 같은데 그럼 킬리안은 열 번 고간에 차를 쏟은 건가. 하루가 계속 돌아갔으니 결과적으로 한 번뿐이긴 하지만…….
그가 왜 날 보자마자 다짜고짜 죽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 * *
로툴로에서 노닥거리다가 곧바로 메르텐시아 가문을 찾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을 건너 이렇게 일찍 도착하는 건 꿈도 못 꿨는데, 이제는 킬리안의 주술로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주술이라던데 진짜 순식간이더라.
우리는 수도 근처에서 마차를 빌려 그것을 타고 저택까지 이동했다. 메르텐시아 식구들에게는 내가 한동안 수도를 떠나 잠시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다고 주술로 세뇌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사교계에서는 내가 방랑벽이라는, 방구석 폐인을 지향하는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별명이 붙어 버렸다. 뭐, 메르텐시아 막내딸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잠시 영혼이 빠져나가서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인데 평범한 인간들은 중병이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아일라의 가족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다.
“빨리도 오는군.”
이 모든 게 최선이었거늘. 불행히도 나는 단단히 토라진 아슬란을 감당해야만 했다.
“전에도 내가 분명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이번엔 어딜 가는지조차 얘기하지 않고…….”
나를 지긋이 응시하는 아슬란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음, 그런데요. 앞으로는 더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건지 억울했지만, 동공을 덜덜 떨면서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아슬란의 대놓고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견디다가 킬리안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집사로 돌아가 연미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날 향해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도와줄 생각은 딱히 없어 보였다.
왠지 내가 천하의 나쁜 무뢰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아슬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나 받아.”
그는 내게 편지를 쥐어 주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아슬란과 손에 들린 편지를 번갈아 응시하다가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친애하는 메르텐시아 영애에게’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링테 작가의 친필 편지가…… 뭣!
나는 눈을 부릅뜨며 편지의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허억, 거기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링테 작가님이 차기작 낸다는데?!”
뭐지? 내가 신이 되어 간절히 바라니 온 우주가 감명했나?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킬리안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푸들푸들 떨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웃음기를 채 지우지 못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으시겠습니다.”
그렇게 웃을 거면 그냥 대놓고 비웃어.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 천계 못 갈 것 같아.”
“소설 때문에 말입니까?”
“링테 작가님이 차기작 낸대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꼭 읽어야 한다. 덕심에 이성을 상실한 내가 흥분하자 킬리안이 내 손에서 편지지를 빼어 간 뒤에 지나가듯 말했다.
“흠, 잠시 위에 갔다가 내려오면 링테 작가의 새 소설이 수도 없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요.”
앗, 듣고 보니 그것도 혹하는데…….
나는 킬리안의 말에 한해서 심한 팔랑귀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잠시 턱을 쓸며 심각하게 고민하자 킬리안이 어쩐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보다 이 글씨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음? 딱히?”
링테 작가 글씨체는 상당히 특색이 있는 편이었다. 정갈하면서 살짝 과하게 힘이 들어간 느낌이라고 할까. 꾸미려고 하는 의도가 느껴져서 겉멋 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난 캘리그라피 같아서 좋아했다.
“왜? 이 글씨체 쓰는 사람 알아?”
“뭐, 제 눈엔 보이는군요.”
누구인지 가르쳐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킬리안을 흘겨보다가 편지지를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달려가 아슬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리, 저녁 같이 먹어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생각보다 더 단단히 토라진 듯했다.
“오라버니랑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
“가끔 이런 것도 좋잖아요.”
아슬란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니 어째 살짝만 더 건드리면 넘어올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쉬워?
“싫어.”
하지만 그 머뭇거림이 착각이었다는 듯 아슬란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다니. 생각보다 노골적인 단어로 칼같이 끊어 내길래 잠시 눈을 깜빡이며 망설였다. 하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전 오라버니가 좋은데?”
“……난 분명 싫다고…….”
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제가 싫어요?”
“…….”
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듣고 아슬란은 잠시 침묵했다. 내가 언제 네가 싫다고 했어.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그 침묵 속에서 어쩐지 그의 억울함이 읽혔다.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온 킬리안이 내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깜짝이야. 나는 그의 장갑을 더듬거리다가 손을 밑으로 쭉 내린 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킬리안이 말없이 눈가를 곱게 접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뜩거렸다.
‘뭐, 뭐.’
뭔데. 설마 질투? 아니, 언제는 가족이랑 친해지라고 먼저 밀어 넣더니.
나는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두면 뒷감당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뒷짐을 지고 있는 킬리안의 반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까딱이더니 입꼬리를 내렸다. 미소는 사라졌지만 아까보단 한결 나아진 분위기였다.
“……아니.”
아슬란은 결국 고개를 틀며 기어가듯 중얼거렸다. 나는 이때다, 하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주방으로 이끌었다. 그는 별 반항 없이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 * *
“이번엔 난도를 낮춰 오믈렛으로 해봅시다.”
역시 처음부터 오븐도 없이 케이크는 고난도였지. 하지만 자취 요리로 실력을 다진 나에게 오믈렛쯤이야 껌이었다.
나는 아슬란에게 달걀을 풀어 달라고 한 뒤 소스를 만들기 위해 주방을 뒤져 재료를 찾아냈다. 열심히 발돋움하면서 찬장을 뒤적이고 있자니 킬리안이 내 등 너머로 손을 뻗어 후추 통을 꺼내 손에 들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요리 실습에는 킬리안이 있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냥 얼굴만 봐도 좋아서 반사적으로 웃자 킬리안은 시선을 맞추며 나를 따라 예쁘게 웃었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