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악녀 메이커 127화
“재료 좀 썰어 줄래?”
칼질하면 할 수 있긴 하지만 능숙하진 못해서 한 번 도와달라고 해 봤다.
사실 킬리안에게 종종 야식을 부탁하긴 했어도 직접 요리를 만드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킬리안은 기계처럼 당근 양파 버섯 등을 굵게 다졌다. 그리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채소들을 볶았다. 본인이 직접 손을 써서 요리하는 건데도 마치 주술이라도 쓴 것 같은 경이로운 움직임이었다.
“다 푸셨으면 주십시오.”
킬리안은 여전히 시선을 팬에 고정한 채 아슬란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팔꿈치까지 와이셔츠를 말아 걷어 올린 팔뚝에 이상하게 계속 시선이 갔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어쩜 근육도 저렇게 잘빠졌냐. 팔뚝에 언뜻 비치는 핏줄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나는 말없이 아슬란과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는 메르텐시아 공작, 그러니까 빈센트에게서 느꼈던 위기 의식을 다시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요리, 분명히 킬리안이 다 만들게 될 거야! 왜 내 주변에는 요리 천재들밖에 없단 말인가. 요리사도 아니면서! 둘 다 능력도 출중하면서 요리까지 잘하다니 이건 반칙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아니, 제 말하지도 않고 단지 킬리안과 겹쳐 보았을 뿐인데 주방 입구에서 빈센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이번엔 또 뭔가.”
그의 옆에는 요리한답시고 잠시 쫓아냈던 주방 식구들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저번처럼 주방을 홀랑 태울까 봐 공작에게 가서 이른 모양이었다.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안 태웠어요.”
아슬란과 나는 빠르게 번갈아 가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자 빈센트는 심란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다가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요리왕의 기운을 풍기며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놀리고 있었다.
“요리하는 게 너희가 아니지 않나.”
빈센트가 킬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우리를 팩트로 때렸다. 아니, 저도 하려고 하면 잘할 수 있거든요? 저번에 케이크 좀 태웠다고 무시하시네. 그놈의 불 조절이 대체 뭐라고.
나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팬을 가져와 킬리안의 옆에서 불을 피웠다. 오믈렛의 소스를 만들 생각이었다.
킬리안은 이미 완벽한 모양으로 오믈렛을 만들어 그릇에 담아낸 뒤였다. 그는 내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주방을 다 태울 생각이십니까?”
“…….”
가스레인지 없는 불 조절은 여전히 내게 힘든 과제였다. 아, 이것 때문에 내 실력이 폄하되고 있잖아!
“도와드릴까요?”
킬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니, 내가 하지.”
그때 빈센트가 소매를 걷으며 다가와 내게서 팬을 받아 갔다.
“제가 할 수 있…….”
“가주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의 집사인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
“내가 하겠다. 전에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다고, 이 인간들아.
동시에 킬리안과 빈센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빈센트는 미간을 슬쩍 구겼고 킬리안은 그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세기의 대결 같은 게 펼쳐지려고 하고 있었다.
이 긴장감은 대체 뭐지.
나는 내 명예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깔끔하게 접어 버린 뒤, 얌전히 뒤로 물러나 아슬란의 옆에 가서 섰다.
쓸데없는 데에 왜 이렇게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킬리안은 화려하게 불을 피우고 묘기를 부리듯 재료를 팬 안에서 던졌다 받고 있었고, 빈센트는 재료를 휙휙 던져넣듯 대충 뿌리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능수능란한 요리 솜씨를 뽐내는 두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슬란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요리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그가 읽는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누구나 쉽게 달걀 삶는 법.]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달걀도 못 삶는데 전에는 대체 혼자서 뭘 하려고 한 거야. 아슬란은 겉으로는 치밀하고 빈틈없어 보이면서 유심히 살펴보면 허술하고 대책 없는 면이 있었다.
“요리는 그냥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버리죠. 원래 사람은 하던 걸 해야 해요.”
“우리가 하던 게 뭔데?”
“잘 먹는 거죠.”
“과연.”
아슬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수긍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빈센트가 잠시 할 말이 많은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 * *
우여곡절 끝에 요리가 완성되었다.
나는 플레이팅까지 완벽하게 된 요리들을 보면서 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된 건지 되새겨 보았다. 정작 요리의 절반을 완성해 낸 빈센트 또한 나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요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번에 케이크를 만들 때도 그러더니, 눈앞에서 누가 요리를 발로 하고 있으면 못 참는 성향이신가.
“……들지.”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며 식기를 집은 뒤 애피타이저로 나온 연어 요리를 한입 크기로 썰었다. 나는 동작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가득한 그를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뭐냐.”
내 집요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빈센트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며 고민했다. 만약 이게 마지막 식사가 되는 거라면,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가 대뜸 말을 던졌다.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기회?”
빈센트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설마 네게 백작위를 준 것을 말하는 건가?”
“네.”
“그게 대체 언제 적 일…….”
그는 거침없이 답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작게 헛기침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뭐,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의무요?”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그뿐이야.”
나는 그때 아슬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읽어 낼 순 없었지만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것마저도 내가 잘못 본 건지 착각이 일 정도로 금세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혹시 방금 빈센트가 한 말이 어딘가 걸리는 건가?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그러고 보니 아슬란이 원하는 건 뭐지? 나는 전에 따로 생각하지 않았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슬란은 지금 본인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는 가업을 이어야 하는 장남이었다. 본인이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든 하지 않든, 무조건 의무처럼 따라야 했다.
꿈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삶.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유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과연 아슬란이 살면서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말할 기회조차 있었을까? 글쎄, 아마도 나라면 엄두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저한테만 해당되는 말 아니죠?”
그에게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딸 하나였으니 내가 한 말은 대놓고 아슬란을 지칭하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자 빈센트가 날 빤히 응시했다. 그 말을 꺼내는 저의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그래.”
“예뻐해 주세요.”
“…….”
그런 내 말에 아슬란의 시선까지 나에게 날아와 화살처럼 꽂혔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이 나를 아주 격렬하게 응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시선에 응하며 말했다.
“조금은 욕심내도 좋잖아요.”
“…….”
시간이 없어 이런 식으로밖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니, 사실 이런 말을 해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더는 나서지 못했다. 어차피 곧 떠나게 될 내가 깊이 간섭해 봤자 그들을 기만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진작 신경 쓸걸. 주위를 좀 둘러볼걸. 소설을 완결 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느라 정작 내게 의미가 깊어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잖아.
“무슨 일 있는 건가?”
아슬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실 내 모습이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행동이기는 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별것 아니라고 대꾸했다.
“저 또 멀리 떠날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또 어디를…….”
나는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었다.
“사랑해요, 아버지.”
뜬금없는 고백으로 말이다.
동시에 빈센트가 쿨럭거리며 방금 마신 와인을 뿜어냈다. 쏠린다는 뜻일까. 입가에 흐른 붉은 포도주를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가 넋 나간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눈빛을 보니 ‘미친 건가?’ 하고 묻고 있는 듯했다.
이 말을 꺼낸 나도 온몸을 긁으며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애써 꿋꿋하게 태연한 미소를 유지했다.
“제가 생일 때 제대로 자리를 지키지도 못했잖아요.”
“……그건 케이크를 받았으니 된 거 아닌가.”
“전부 다 아버지가 만드셨는데요.”
“마, 마음만으로 충분해.”
아슬란이라면 분명 편지에 사랑한다는 말을 못 썼겠지. 나는 그의 옆구리를 툭, 하고 치며 눈짓을 줬다. 아슬란은 표정으로 진절머리를 치더니 곧바로 반박했다.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하시는군.”
“그러니까 마음을 전해야죠.”
“…….”
“편지는 그럼 전하셨나요?”
“아, 아니…….”
우리의 대화를 들은 빈센트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아슬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슬란은 입술을 꼭 오므린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죽어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네.
아, 빨리 이 인간아. 나는 아까보다 살짝 강도를 높여 아슬란의 옆구리를 퍽, 하고 때렸다. 그리고 얼른 말하라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아슬란은 곧 죽을 것 같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빛을 하더니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
“…….”
“사…… 사…… 사는 동안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래.”
빈센트는 진심으로 듣고 싶지 않았는지 냉큼 대답한 뒤에 식사를 시작했다.
뭐랄까, 참으로 개판이로군. 내 뒤에서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킬리안은 고개를 튼 채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 * *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야?”
“아, 저도 몰라요.”
킬리안의 장난스러운 묻자 민망해진 나는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당시에는 별 자각 없었는데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한 행동과 말을 떠올려 보면 정말 두서없고 횡설수설이었으니까.
그냥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깊이 있는 대화나 충고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사이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 애매하게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있긴 한가.’
하지만 어차피 나는 신이니까. 그들보다 오래 살게 될 테니까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정을 붙여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그냥 그 정도의 사이로 끝내길 잘한 거다.
창문을 열자 팔랑거리는 하얀 나비가 내려왔다. 나는 손을 뻗어 나비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번에 이렇게 하고 레제르브의 부름에 응답한 순간 순식간에 천계로 이동했었지.
그래, 이걸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