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악녀 메이커 128화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부터 그들은 내게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상상의 인물일 뿐이었으니까. 그냥,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걸 봐서 괜히 동요하고 기분이 싱숭생숭할 뿐이야.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불행의 근원이었던 아일라가 사라지는 거니까.’
나는 그렇게 애써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뒤에 말했다.
“제 몸은 잘 수습해 주세요.”
나는 스스로 말하면서 동시에 위화감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왠지 이렇게 말하니까 죽으러 가는 것처럼 들리잖아…….’
그게 아니고 천계에 올라가는 형태가 저번과 같다면, 아일라의 일부인 육신은 그대로 버려두고 신의 영혼인 에코리르브만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저번처럼 육신은 킬리안이 로툴로로 데려가거나, 어딘가에 잘 숨겨 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면 정말 죽은 걸로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일단 올라가서 최대한 빨리 신의 기억과 힘을 자각하는 게 지금 목표였다.
킬리안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신의 권능을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신계로 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킬리안에게 내 권한을 넘겨준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사실 그건 아직 못하겠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기는 했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나 때문인데 그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죄책감은 도무지 사라지질 않아서.
게다가 킬리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 선택권을 넓혀 줬을 뿐이야. 네 몸은 네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을 들으니 설레는 건 잠시였고 책임감은 배가 되었다.
‘신이 되는 건 정말…… 그렇게 뚝딱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
일단 먼저 다녀오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킬리안은 뭐라고 설득해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것인지 순순히 나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의외이긴 했다. 세계를 무너트려서라도 쫓아와 내 곁에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물론 쉽게 포기해 줘서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지만.
나는 킬리안이 남들과 달리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으면서.
“최대한 빨리, 올게요.”
빨리 기억을 되찾길.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내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게 했다.
“괜찮겠어?”
“네…….”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괜찮은 게 이상한 거잖아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금은 이렇게 슬퍼도 곧 무뎌질 걸 아니까.
하지만 사실은.
빈센트도, 아슬란도, 바실리도, 로툴로의 주술사들도 샬럿도, 그들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위에서는 찰나, 밑에서는 한 달.
그렇다면 위에서 한 달을 보내면 밑에서는 과연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일까. 그들은 이미 죽은 뒤가 아닐까? 킬리안은 대체 날 위해 얼마나 오래 하염없이 기다려야 해?
차라리 지금 신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아냐, 한 번 신이 되면 다신 되돌릴 수 없잖아. 킬리안은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명부에 이름이 없어서 하염없이 생을 이어 가고 있을 뿐, 신이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게 되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가기 싫다…….”
잠깐, 방금 그걸 입 밖으로 뱉었나?
나는 무의식중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스스로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인간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신이라니. 뭐 이렇게 나약한가 싶어서.
“가기 싫어?”
“…….”
“그게 네 진심인가?”
킬리안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마치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받아 갈게, 네 진심.”
“…….”
아무 말 없이 빤히 올려다보는데 이상하게도 킬리안이 살짝 당황을 내비쳤다. 그는 입가에 머금고 있던 희미한 미소를 단박에 지워내며 내 눈가를 쓸었다.
“울지 마. 미안해.”
내가 언제 울었다고. 울 것 같긴 했지만, 아직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아니, 왜 킬리안이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요. 괜찮아요. ……그리고 아무리 막막해도 언제나 길은 보였잖아요. 대책 없는 말이지만 잘될 거예요.”
신의 말이니까 이뤄지지 않을까.
나는 그의 손을 밀어서 억지로 떼어놓은 뒤 나비, 아니 천사를 손안에 꼭 쥐었다.
그리고 ‘진짜 다녀올게요.’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말을 소리 내어 말하면 목소리에 울음이 섞일 게 뻔했으니까.
“안녕.”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물이 방울져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뜨자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천계가 펼쳐졌다.
“……응?”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얼른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궤적을 그리며 턱으로 떨어진 눈물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건 아일라의 몸이잖아.
천계에 왜 아일라의 몸이? 어떻게?
“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얼빠진 소리를 두 번이나 냈다. 누가 나를 등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날 팔 안에 가두는 단단한 안정감부터 귓가를 스치는 숨소리와 향기마저 굉장히 익숙했다.
킬리안이었으니까.
“……왜 여기 있어요?”
“속여서 미안.”
그는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눈물 같은 건 이미 그친 지 오래였다.
“아, 아니, 이해가 안 가는데…….”
나는 내가 너무 킬리안을 바란 나머지 꿈을 꾸나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는 분명 신계가 맞았다. 인간의 몸인 나, 아일라와 킬리안 모두 다 같이 신계로 올라온 것이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로군요.”
정신없는 와중에 레제르브까지 등장했다.
갑자기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난 그녀는 세상의 종말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절망 어린 눈빛을 하더니 이마를 짚었다. 나의 냉정이자 신의 대리자도 두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주 상황이 개판이었다.
온갖 폼은 다 잡고 떠날 준비를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왠지 킬리안이 오늘 내내 조용했을 때부터 뭔가 좀 수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떠난다고 할 때 아주 순순히 보내주더라…….’
생각해 보니 킬리안이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그를 두고 떠나려고 하면 분명 신계로 향하는 문을 박살 내고 아득바득 기어 올라와서라도 내 곁에 있으려고 했을 거다. 너무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속았다는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때 레제르브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진작 알아봤지만, 정말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로군요. 대체 어떻게 에코리르브 밑에서 저런 피조물이 나올 수가 있는 건가요.”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잘못 키운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지잖아. 그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데.
“아, 네가 레제르브인가?”
킬리안이 날 놓아주고 레제르브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 거침없는 움직임에 오히려 레제르브 쪽에서 주춤하며 물러섰다. 킬리안은 물러서든 말든 오로지 직진이었고, 결국 그녀는 한 바퀴를 빙 돌아 내 등 뒤에 숨고 말았다.
킬리안이 무섭다더니, 이 정도로 진심이었어? 아니, 이렇게 겁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황당한 심정으로 킬리안을 마주하자 그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느른하게 웃어 보였다.
“저런. 뭐가 그리 두려운 건지 몰라도 그대보다 한참 어린 인간이 뭘 어쩌겠어, 그렇지?”
“…….”
“쉬이, 이리 와.”
킬리안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가 에코의 일부를 해칠 리가 없잖아.”
세계의 관리인을 위협하는 인간이라니. 레제르브의 앞에 서 있는 나까지 덩달아 협박 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레제르브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이 와중에도 착실하게 내 물음에 대답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저 정신 나간 인간이 영혼을 묶는 주술에 신의 권능을 들이부었습니다.”
“뭐?”
영혼을 묶어? 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황급히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킬리안이 내게 새겼던 각인이 여전히 손목에 황금빛으로 선연하게 반짝였다.
비밀이라길래 대충 넘겼는데 이 주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왜 진작 저 주술사의 권능을 빼앗지 않으신 겁니까.”
레제르브는 나를 책망하는 듯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빼앗으려 한다고 빼앗길 작자도 아니지요.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상당히 고전했을 겁니다.”
어…… 음, 미안. 사실 내 권능을 빼앗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나는 말을 본론으로 돌렸다.
“영혼이 묶였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영혼의 결합,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주술이죠.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인간에게 한정된 주술입니다.”
레제르브의 설명은 맞은 편에 서 있던 킬리안이 이어받았다. 그는 레제르브에게 위협을 줄 때와는 상반된 꽃 같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네게 주술을 통하게 하려고 신의 권능으로 네 영혼과 그 육신을 이었어.”
“……어떻게요?”
“꼼꼼하게 바느질하듯?”
아니, 전혀 감이 안 오는데.
“억지로 뜯어내려고 하면 영혼도 찢어질걸.”
“찌, 찢어져요?”
“물론 결코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에코, 네가 항상 내 곁에 있으면 그럴 일도 없겠지.”
창조주의 영혼을 두고 저런 말을 하는 킬리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신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킬리안이 환하게 웃는 순간 그의 얼굴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 역시 저렇게 행동할 줄 알았어. 이제야 좀 킬리안다워졌네…….
킬리안의 말을 들은 레제르브가 마치 고자질하듯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저건 괴물입니다.”
“…….”
이해는 가지 않지만, 아무튼 킬리안 덕분에 인간의 몸으로 신계로 올라올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저 인간까지 함께 덩달아 온 이유는 당신의 영혼과 서로 결합되었기 때문이고요. 하, 이걸로 당신이 인간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군요. 이래서 눈치 빠른 인간은 싫다니까…….”
뭐? 그런 방법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는 진작 말 안 했어. 내가 인간계에 머물기만 해도 균열이 갈 것처럼 말하더니?
나는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레제르브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슬며시 내 시선을 피했다. 신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아니면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건지,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혼자 일하기 힘들었습니다.”
레제르브가 이실직고했다.
너무 당당해서 화낼 기운도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 직무를 떠넘기고 떠난 건 나였으니 뭐라 할 자격도 없었다.
그래도 괘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한 고민은 대체 뭐였는데.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면…….
‘모두와 함께할 수 있는 거야?’
레제르브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의 육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인간계에 묶여 있을 수밖에.”
그리고 또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저러다가 땅 꺼지겠다.
“뭐, 아무리 길어도 최대 백 년이니 그 정도는 힘들어도 버티겠습니다.”
“한날한시에 같이 죽게 되겠지.”
킬리안은 레제르브의 말을 받아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주술이라는 말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죽는다고?”
하지만 킬리안은 명부에 이름이 지워져서 영원히 죽지 못한다면서. 레제르브에게 묻자 그녀가 대꾸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묶였는데 명부 같은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킬리안은 내게 다가왔다. 레제르브는 무슨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빠르게 멀어졌지만 나는 그가 다가와도 얌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입술이 느릿하게 겹쳐졌다. 그는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가 이마를 맞대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영혼은 온전히 네 거야. 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