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129화 (129/131)

# 129

악녀 메이커 129화

다시 지상에 내려오자 이번에는 한참 봄이 만개해 있었다.

이렇게 꽃이 필 정도면 두세 달 정도 지난 건가. 온갖 종류의 봄꽃이 뒤섞여 후각을 강렬하게 두드렸다.

나는 꽃내음을 쫓아 고개를 돌리다가 흩날리는 복사꽃을 눈에 담았다. 바람과 뒤섞여 허공을 유유히 떠돌던 분홍빛 하나가 킬리안의 머리 위에 살포시 떨어졌다.

킬리안은 그것을 느꼈는지 눈동자를 굴려 위를 흘낏 쳐다보다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머금었다. 머리에 꽃을 달고 웃고 있는데도 미친 것 같기는커녕, 그것조차 어울리는 미친 외모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예뻐요.”

그 모습을 보자 문득, 그와 함께 보내지 못한 겨울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내리는 것도 못 봤네.”

“보면 되잖아. 내년도, 내후년도.”

킬리안이 손을 까딱이자 그의 손가락끝에서 황금빛이 춤추듯이 퍼지고 그것은 이내 바람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허공에서 꽃망울이 마치 눈 내리는 것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쏟아지는 꽃눈 속에 서 있던 그가 눈가를 곱게 접으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너도 예뻐.”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킬리안의 능숙한 손놀림에 단정히 정돈되었다.

문득 이물감을 느낀 나는 귀 뒤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만개한 꽃봉오리가 만져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겨울은 덧없이 보내 버렸지만 새롭게 봄이 왔다. 곧 다시 겨울이 오겠지.

인간계와 천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이렇게 온몸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매 순간, 나는 지나간 계절 계절마다 살아 있음을 느꼈고 아직 그 시간을, 이 세월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킬리안과 함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을 이어 나가다가, 이제는 의미 없어진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아일라가 샬럿의 납치를 사주하기 위해 암흑가로 향하는 장면이었을 텐데.

하지만 그곳의 주인인 린다는 현재 아공간에서 끝도 없는 고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 현재는 출현이 불가했다.

뭐, 어차피 루프는 끝났으니까.

음, 끝났다기 보다 결국 루프를 일으킨 원흉이 나라는 걸 알아 버렸지. 다시 생각해도 그건 너무 바보 같았다. 스스로 만든 루프에 스스로 괴로워하며 엉뚱한 곳에다 삽질했으니…….

그때 킬리안이 말했다.

“지금쯤 암흑가, 밤의 거리가 완전히 로툴로의 손아귀에 넘어갔겠군.”

“……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언제요?”

로툴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고?

킬리안의 밑에서 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해 보이던 그 사람들이 암흑가를 장악했다고?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킬리안은 오히려 이제 알았느냐는 듯 답했다.

“네가 천계에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내부에서부터 철저히 무너트렸지.”

지배자가 갑자기 실종되어 혼란스러워할 때 순식간에 이뤄진 모양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주술사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제국, 레테. 끝내 그 뒷세계를 차지한 게 주술사라니. 소설에서 베르너가 그토록 암흑가를 무너트리고자 애썼던 것을 떠올리면 이것도 나름대로 복수가 아닐까 싶었다.

지금 현재 외부인 중에 그 사실을 아는 건 킬리안을 통해서 전해 들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흠.’ 하고 콧소리를 내다가 물었다.

“이왕이면 대신전을 치는 편이 좋지 않아요? 레제르브가 내버려 두는 바람에 지금 뿌리부터 썩어 있잖아요.”

이게 과연 신이 할 말인지 모르겠지만, 신이라고 신전을 무조건 옹호하는 건 아니었다. 썩어 있으면 뿌리부터 전부 다 도려내서 새로 심어야지.

언젠가 벌어질 혁명의 시발점이 킬리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할까 싶었다.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자 킬리안이 말했다.

“이왕이면 가장 어두운 곳부터 천천히 스며들 듯 숨통을 죄는 편이 더 그림이 좋잖아.”

나는 참 그다운 미학관에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인즉…….

“최종적으로는 신전 개혁?”

“글쎄. 제국 멸망이려나.”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뭐, 봐서.”

킬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내키면 하고 귀찮으면 굳이 나설 생각은 없다, 정도의 건성인 태도였다.

“주술사들이 받고 있는 부당한 처우는 뜯어고쳐야겠지. 신이 되면 사적인 감정에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킬리안은 ‘내 영혼은 네가 마음대로 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가 죽고 나면 내가 그의 영혼을 신으로 만들 거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죄를 저지르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내 의심 어린 물음에 킬리안은 입술을 비틀며 웃다가 내 턱을 살살 긁으면서 말했다.

“나의 신은 내가 무슨 죄를 저질러도 전부 사해 줄 테니까.”

정말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였으나 나는 그 말에 조금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킬리안은 존재 자체로 이미 내게 면죄부가 되었으니까.

* * *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첫째로, 내가 없는 사이 폴랑의 근황 편지가 몇 개 도착해 있었다.

그가 지퍼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황실 디자이너를 때려치웠다는 내용인데, 굳이 편지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제국 전체에 파다하게 소문이 번져 있었다. 그가 등을 돌린 게 황실이니만큼 별로 명예로운 종류의 소문은 아니었다.

‘이 멍청이가. 사업이 안정되면 그때 그만둬야지. 내가 외면하면 어쩌려고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무모한 거람.’

자신을 스스로 절벽 끝에 밀어붙이는 방식은 좋지 않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덤볐다가는 분명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말 테니까.

나는 성격 급한 폴랑에게 작게 혀를 찬 뒤에 얼른 내 저택으로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된 거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렸던 드레스 사업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 황궁에서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마물을 토벌한 내 공적을 높이 사 돌아오는 봄, 내게 상을 수여하는 것과 동시에 별궁에서 작은 무도회를 열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돌아오는 봄이라면, 지금이네.

나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영광입네 어쩌네 하는 형식적인 답장을 적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렸다. 황궁에 가면 궁금했던 샬럿의 근황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소피아에게 샬럿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 바로 린다가 등장하고 루프가 시작되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소피아가 샬럿의 근황을 편지로 보내주긴 했지만, 이 소설 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성의 없이 적고 있던 답장 끝에 그날을 기대한다고 적었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소식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소식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링테 신작이 곧 나올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인 찬스로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내 방 책상 위에 놓인 링테 작가 신간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아슬란이 몰래 남겨놓은 메모를 읽어보니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작의 초고라고 한다.

하, 저번에는 친필 편지를 받았는데 이젠 출판사 관계자도 아니면서 작가님이 직접 쓴 원고까지 받아 보다니, 역시 오라버니 찬스는 우주 최고…….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원고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으헤헷, 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라? 작가님 글씨체가 바뀌었나?’

그동안은 활자체라서 몰랐는데 필기체는 아슬란 글씨체랑 상당히 닮아 있었다. 친한 친구끼리는 손 글씨도 닮는 건가? 그런 말 처음 들어 보는데.

처음에는 그 정도로 가볍게 넘겼는데…… 뒤로 넘어갈수록 내 고개는 점점 더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글씨체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잖아! 아니,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동안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의심이 퐁퐁 피어났다. 그리고 의심은 이내 둑 터진 강물처럼 마구 쏟아져 내렸다.

잠깐만, 이거 내용이……. 왜 점점 아슬란이 쓴 것처럼 읽히지? 문체에 묻어나는 말투나 습관 같은 게 누가 봐도 아슬란인데? 친구끼리 서로 닮아 가서 그렇다는 수준을 넘어섰는데?

아슬란이 장난을 쳤나?

그가 이런 것 가지고 장난을 쳤으리라곤 상상이 가지 않지만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뭔데.

‘어…… 라…….’

나는 고장 난 것처럼 삐거덕 고개를 기울이다가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작가님이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 소설을 쓰는 건 처음 보는데요…….”

“그런데?”

사랑을 모르는 고귀한 신분의 청년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다소 뻔한 내용이긴 한데, 아무튼 중요한 건.

“아슬란의 수필 같은데요.”

물론 나처럼 아슬란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정도의 실낱같은 차이였는데, 그 미묘함을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이게 아슬란이 쓴 게 아니라면 링테 작가가 사람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올 정도로 그냥 아슬란 그 자체였다.

내 말에 킬리안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거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나는 원고를 쥔 손끝을 덜덜 떨다가 킬리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슬란이 링테였어요?”

“지금껏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한데.”

하하, 우리 링테 작가님 우주 최강 존잘이라고 방방 뛰던 나는 정작 몰랐는데 킬리안은 알고 있었다니.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왜 말 안 해 줬어요?!”

“본인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아 하길래.”

그리고 킬리안은 ‘네가 눈앞에서 삽질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해서.’ 하고 덧붙여 말했다. 앞에 말보다 뒤에 이어지는 말이 더 진심인 것처럼 들리는 건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 아슬란이 보여주었던 모든 이상 행동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로맨스는 좋아해도 링테 소설만 극도로 혐오했었지. 그러면서 동시에 링테 작가와 절친한 친구라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잖아. 그리고 링테 작가의 환경이나 닥친 상황들이 아슬란과 굉장히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대체 왜 지금까지 몰랐나 싶었을 정도로 링테 작가의 모든 표현에 아슬란이 묻어나 있었다. 진실을 알고 나니까 비로소 보였다.

“아슬란!”

나는 수면 중인 아슬란에게 갑자기 들이닥칠 수밖에 없었다. 민폐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이 엄청난 진실을 그동안 숨겼던 아슬란이 먼저 잘못했다.

“군만두 좋아해요?”

아슬란은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을 한 채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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