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악녀 메이커 130화
아, 참. 여긴 군만두가 없지…….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나는 얼른 바꿔 말했다.
“뭐 좋아하세요?”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아슬란은 비몽사몽 해서 손가락 끝으로 내 볼을 툭, 하고 건드렸다. 아무래도 꿈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갑자기 집 나간 동생이 연락도 없이 몇 개월 만에 침실에 쳐들어오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겠지. 그의 나사 빠진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점점 흥분이 가라앉았다.
아니, 이런…… 홀로 무인도에 떨어지면 당장 굶어 죽을 것처럼 얼빠진 사람이…… 링테 작가님이라니…….
“먹고 싶은 거 뭐든 말만 해 주세요. 다 챙겨 드릴 테니.”
“식사 정도는 알아서 챙겨 먹어.”
“이젠 못 챙겨 드실걸요. 제가 감금할 거거든요.”
“감금……? 나를……?”
아슬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동공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질 못하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선이 참 볼만했다.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놓고 난 아슬란이라고 밝혀 놓고 내가 모르길 바랐나? 아슬란을 보면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떠오르고는 했는데, 오늘만큼 그 말을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제가 오라버니 글씨체를 보고도 모를 줄 알았어요? 심지어 이번 신작은 그냥 아슬란의 독백 그 자체던데…….”
“그건…….”
“그동안 절 농락하다니. 괘씸한 작가님 가둬 놓고 글만 쓰게 할 거야.”
“…….”
“뭐, 농담이지만요.”
“……진심인 것 같았는데.”
나는 눈치 빠른 고양이처럼 슬슬 도망갈 궁리만 하는 아슬란은 보며 속으로 쳇, 하고 혀를 찼다.
아슬란의 귀 끝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기어갈 듯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도 안 와서…… 네가 가장 좋아할 만한 걸 주면 오지 않을까 하고…….”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뭐야. 하늘에 공물 바치는 것도 아니고. 여행 가느라 멀리 떨어진 사람 책상에 선물을 두고 간들 누가 알겠는가.
“지금 돌아온 건가?”
“네.”
그는 이내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일자로 꾹 다물며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까치집 머리를 하고 그런 얼굴 해 봤자 하나도 한 무서운데,라고 말하면 화내려나.
“편지 한 통도 없고.”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어딜 간단 말도 없고.”
“음 그것도…….”
“증발했다 왔나?”
천계에 갔다 왔으니 나름 비슷한 거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진심으로 정색하는 아슬란을 보고 장난치고 싶은 욕구를 고이 접어 넣었다.
“이제 돌아왔어요, 완전히요.”
나는 손을 뻗어 아슬란의 삐쭉 솟은 옆머리를 정돈해 주며 웃었다. 그러자 내 손이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누가 붙잡고 떼어 놓은 탓이었다.
나와 아슬란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킬리안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단정하게 웃고 있었다.
아슬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희…….”
나는 그가 킬리안과 내 사이를 의심하는 말을 뱉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있잖아요, 아슬란. 계속 링테 작가로 남고 싶어요?”
“……뭐?”
“제가 공작의 직무에 대해 아는 바가 적지만 글 쓰는 일과 병행하기 힘들다는 건 알아요. 아슬란은 계속 작가 하고 싶어요?”
아슬란은 내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침착하게 대꾸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문제라면요?”
“그렇게 날 가두고 싶은 건가?”
“아니, 절 왜 그런 파렴치한으로 보십니까. 매도하지 말고 보세요, 이 순수한 눈빛을.”
“맛이 갔는데…….”
맛이 갔다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흑심이 겉으로 드러났단 말인가.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킬리안에게서 전수 받은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체 무슨 소리세요, 작가님.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주변의 강요는 제외하고요, 책임감도 내버리시고, 그냥 아슬란의 마음만 생각하면요, 어쩌고 싶으세요?”
사실 아슬란이 링테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모든 퍼즐 조각이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동시에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슬란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건 또 무엇인지. 어쩌면 우리의 타협점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나는 빈센트에게서 들은 말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나에게 있어서 아일라 메르텐시아는, 내가 앞으로 인간으로 살 유일한 기회.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일단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 보고 싶어.
“당신은 뭘 하고 싶어요?”
내 질문에 아슬란은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내면 깊숙이 숨겨왔던 빛 바란 꿈을 꺼냈다.
* * *
“샬럿, 제발.”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널 사랑해. 내 심장은…….”
“심장 얘기는 됐습니다.”
샬럿은 그놈의 심장 타령을 깔끔하게 끊어 버린 뒤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샬럿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는 베르너를 눈에 담으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 둘의 사이가 언제 저렇게 역전이 된 거지? 내가 소피아한테 따로 부탁하긴 했지만 그 막무가내 어린 애가 저렇게까지 성장시키다니. 이 정도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소피아, 적성이 의외로 이런 쪽인 것 아니야? 시녀보단 유모 쪽이 더 어울릴지도…….
‘생각해 보니 소피아의 밑에서 큰 아이라니. 그건 그것대로 무서운데…….’
나는 상상의 가지를 뻗어 나가다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뚝 잘라 냈다.
그리고 다시 두 남녀에게 집중했다. 킬리안의 주술로 인기척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자니, 한동안 잊고 살았던 팝콘이 격하게 필요해졌다.
그때 샬럿이 잠시 찾아온 침묵을 깨고 운을 뗐다.
“전하의 마음이 메르텐시아 영애에게 가 있는 거 잘 알아요.”
엥, 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스스로 외면하는 연유는 모르겠지만, 전하를 가장 곁에서 지켜본 제가 과연 모를까요.”
치정 싸움에 갑작스럽게 내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까딱이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만사 귀찮아하던 그의 마음이 제국 멸망으로 기울여진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을 얻었다. 나는 저런 정신머리 만들다 만 놈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려다가 우리가 지금 인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말하면 바로 들릴 거리네.’
하필이면 베르너에게 인성과 반비례한 능력을 쥐어 주는 바람에 그가 떠날 때까지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킬리안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사실 뭐 아무리 저쪽에서 날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가 비교되어야지.
킬리안과 베르너? 종족이 다르잖아. 신과 아메바 정도의 차이 아닌가.
사실 그동안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나는 윤하늘로 살던 시절에 아일라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아일라는 황태자가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기를 바랐고, 나는 그 꿈속에서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고 생각해 버린다.
레제르브는 신의 말, ‘언령’의 힘은 강력하고 절대적이라 말했었지.
‘그게 아마 내가 이곳으로 이동하게 된 가장 큰 계기인 듯싶은데…….’
베르너가 여자 주인공 외에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다는, 남자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를 깨부수면서까지 나한테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싶었다.
“이번 축하연도 전부 전하의 지시하에 꾸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영애를 곁에서 오래 묶어 두고자 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억측이야. 나는 단지 그녀의 공을 높이 사서…….”
그런 것치고는 오늘 연회 내내 계속 나한테 말 붙이고 싶어 끙끙대는 게 보였는데.
하지만 빈센트와 아슬란이 눈에 불을 켜고 방해하는 바람에, 베르너는 내게 제대로 된 말 한번 꺼내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그게 귀찮아서 킬리안에게 인기척을 숨기는 주술을 부탁한 뒤에 그와 단둘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고 말이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연회장에서 우연히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샬럿이 떠나려고 하니까 베르너가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소문은 들으셨겠죠. 영애께서 메르텐시아 공작 위를 물려받기로 했다는 것. 공작 후계자로 들인 이상 법에 위반되는 큰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전하께서는 아무런 영향권도 행사하실 수 없다는 거 잘 아실 테고…….”
그게 바로 베르너가 나에게 내 정부가 되라는 헛소리를 못 한 이유였다.
본인이 과거에 한 말, ‘샬럿을 황후로 들이고 날 정부로 들이겠다.’는 망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상 베르너에겐 나름대로 억울할 일일 것이다. 평생 샬럿만 사랑할 생각이었는데 우연히 아일라의 저주가 신과 엮여서 별 관심도 없던 여자까지 사랑하게 되어 버린 것 아닌가.
‘뭐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냥 똥 밟은 셈 치고 새 사랑 찾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뭐라 말씀하시든 상관없어요. 이번 기회에 저는 전하께 아무런 마음도 없다는 걸 더욱 실감했거든요.”
샬럿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슬쩍 주저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황태자의 신분이 워낙 깡패라서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베르너라고 해도 일단 황태자는 황태자였다. 어디 사람 상대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겠는가. 그는 샬럿의 망설임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 삐뚜름하게 입매를 틀었다.
“나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런 힘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네가? 가난 때문에 허덕이는 가족은 어쩔 셈이지? 이대로 외면할 건가?”
“…….”
샬럿은 입술을 꾹 깨물고 베르너를 노려보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알 바인가요.”
“이기적이군.”
“가난하다고 해서 제 사랑을 강요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제가 희생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가족들은 제가 행복하길 바랄 거예요.”
“내 곁에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
그럼 ‘나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말 따위나 하는 사람 곁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나. 새로운 사랑은 개뿔 저런 똥은 평생 혼자 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
어째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하니까 점점 가면 갈수록 추해지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베르너를 바라보았다.
“하아…… 샬럿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도무지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베르너는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대화하자고 말하더니 그대로 떠나갔다.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다니는 것이 아무래도 나를 찾는 눈치였다.
나는 홀로 남겨진 샬럿을 보다가 킬리안의 팔을 톡톡하고 건드렸다. 눈치가 빠른 그는 내게서 주술을 풀어 주었다.
나는 투명해졌던 내 손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 등을 돌리고 있는 샬럿을 불렀다.
“샬럿.”
샬럿은 흠칫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일라…….”
그녀는 살짝 멍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가 안절부절못한 기색을 보였다. 내색하진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직 나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피아의 편지로 보았던 샬럿의 꿈을 떠올렸다.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샬럿은, 윤하늘의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영원히 이루지 못해 낼 거라고 넘겼던 내 어린 날의 열망은…….
“저와 같이 사업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