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악녀 메이커 131화
결국,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결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세계에 끼어듦으로써 불행해진 건 베르너와 레제르브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연회가 끝나고,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기 위해 걷고 있던 나는 허공에서 나풀나풀 내려오는 새하얀 나비를 보았다. 이젠 내게 제법 익숙해진 레제르브의 전언이자 천사였다.
천사는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다른 차원의 신에게 도움을 구할 테니 당신의 육신이 죽을 때까지만 제게 권한을 넘겨주세요.》
“다른 차원의 신?”
《저와 당신을 분리할 때 도움을 준 신이라고 하면 아시려나요.》
“아.”
나는 내가 인간이 되기 전, 신이었던 시절의 유일한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를 어리석다 하면서도 계속 충고하고 타이르던 목소리.
《그녀라면 당신의 부름에 응할 겁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여전히 기억을 찾지 못했으니까. 인간으로 산 세월이 억겁이니 그 기억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가끔 스스로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에코리르브, 당신이 인간들을 유달리 아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신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니까요.》
“그래, 알았…….”
그 순간 킬리안이 자연스럽게 내 뒷머리를 그러쥐고 입술을 겹쳤다. 더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피하거나 뿌리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언제나처럼 감미로운 입맞춤에 응하고 있을 때, 그가 천사가 앉아 있던 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가 떼어 냈다.
짧은 입맞춤을 끝마쳤을 때, 천사는 마술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아무것도 없는 어깨를 더듬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헉, 천사가 죽었어!”
“안 죽였어. 잠깐 보냈을 뿐이야.”
어디로요. 저승으로요? 그런데 천사도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건가.
나는 천사의 행방을 생각하다가 레제르브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떠올렸다. 왠지 어디선가 그녀의 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할 일 많다고 나에게 칭얼거렸는데. 킬리안도 그때 나와 같이 고스란히 들어 놓고서 헬프를 요청하는 천사를 어디론가 보내 버리다니.
“이런 식으로 복수할 셈인 건가요?”
나 때문에 신에게 제대로 보복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레제르브를 과로사시킬 셈인 겁니까?
내 물음에 킬리안은 말없이 다시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간지러운 웃음과 함께 새가 부리를 쪼듯 짧게 반복되는 입맞춤에 문득 그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해 버렸다.
‘장난꾸러기 같네.’
당장 홀랑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냥 글러 먹은 것 아닐까. 장난 두 번 쳤다가는 세계가 멸망하겠다.
어디로 갔니, 객관성.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결국 레제르브에게 심심한 위안을 전한 뒤 그의 복수를 묵인해 주기로 했다.
* * *
나, ‘아일라’는 그동안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꽤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알려진 것 중에서 가장 민생에 큰 영향을 끼친 거라면 ‘핵’을 제거하면 마물이 사라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었다. 그 일로 황궁에서 공로상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덕분에 구원을 받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 소문을 들은 귀족들의 반응은 정확하게 둘로 갈라졌다. 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에 급급했던 소수의 귀족, 그러니까 그냥 내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이들은 당연히 아니꼽다는 반응을 보였다.
레녹스가 아무리 내 공에 대해 증언해도 ‘마녀니까 마물을 부렸겠지.’, ‘마녀니까 무슨 술수를 부려 수를 썼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댔다.
물론, 대다수의 반응은 나를 다시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내가 악녀의 프레임에서 탈피했다는 결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윤하늘’의 기억을 가장 또렷하게 가지고 있는 나였다. 지구, 그것도 현대인 기준에 물들여진 내 행동이 이쪽 세계에서 이해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조차 않았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내 행동 하나에 ‘오, 다시 봤어.’라고 하다가도 본인들의 기준에 엇나가면 다시 ‘실망이다. 역시 마녀가 어딜 가겠어.’라고 했다.
그냥 그런 것들의 끊임없는 무한 반복이었다. 나는 그냥 나로 행동했을 뿐인데 악녀와 성녀로 기준을 나누기 바쁜 그들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건, 나를 아래로 보며 친근한 척 굴던 이들이 이제는 나를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네가 뭔데 나보다 주목 받아? 옛날에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던 주제에? ……뭐, 이런 심리인지 뭔지.
내게 접근해서 온갖 수작질을 다 부리길래 받은 거 두 배로 갚아 줬다. 만만하게 보일 바에야 차라리 욕먹는 게 낫겠다 싶어서 온갖 수단은 다 동원했다. 그랬더니 ‘아일라의 아싸 라이프 시즌2’가 열렸다. 덕분에 주변이 한결 쾌적해져서 좋기는 한데.
“인간관계 왜 이렇게 어려운 거냐.”
나는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그러자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채 내 곁에 알짱거리던 바실리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인간관계?”
“아가는 모르겠지만…… 사교계에서는 중요하단다. 귀족 사회가 좁아서 계속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는데 척을 져서 좋을 건 없지. 그런데 날 못살게 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힘드네.”
“그래?”
바실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입에 굴리던 사탕을 오독오독 씹은 뒤에 말했다.
“힘들 때 함께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잖아.”
“……네가 그런 말도 알아?”
“나도 이제 다 컸어.”
“어…… 그래…….”
내가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바실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해 했다. 입에 물고 있는 막대 사탕이나 뱉고 나서 그런 말을 하렴, 아가야.
“그거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래.”
“그랬어?”
“응, 힘들 때 도와주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니까. 진정한 친구는 그보다 내가 성공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거야.”
바실리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쟤가 스스로 저런 생각을 해냈을 리 없으니 아마 다른 주술사들에게 들은 말이겠지.
그래도 예전처럼 이상하게 기억하지 않고 제법 그럴듯하게 말하는 게 대견하여 그래, 그래,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 주술 많이 익혔어. 다들 재능 있고 천재라고 그래. 다들 좋아해 줘. 그래서 친구 엄청나게 많이 생겼어.”
음, 그 사람들은 친구라기 보단 널 업어 키운 부모 격 아니냐. 바실리가 메르텐시아 저택에 놀러 오자마자 로툴로의 주술사들이 어찌나 연락을 해 대는지 이젠 슬슬 성가실 정도였는데.
그 인간들 바실리에게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 받고 있는 건가. 손윗사람이라는 개념이 없는 아이니까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어화둥둥 아껴 키워 봤자 평생 존경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어쩐지 짠해졌다.
“아가씨는 그런 친구 없어?”
“음…….”
바실리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나는 잠시 망설이는 척하다가 이내 그의 볼을 쭉 꼬집어 당기며 웃었다.
“많지.”
“그럼 됐잖아.”
“그러게.”
그 말을 듣고 나니 쓸데없는 고민을 했던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동안 아일라로 지내면서 괜찮은 사람들 꽤 많이 알게 됐는데 왜 그럴 가치 없는 인간들까지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날 힘들게 하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역지사지를 보여 주는 게 맞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음산하게 웃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날 성가시게 만든 죄로 피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바실리가 감탄한 얼굴로 짝짝 손뼉을 치더니 물었다.
“그런데 역지사지가 뭐야?”
* * *
샬럿과 폴랑, 그리고 나는 꽤 괜찮은 사업 파트너였다.
샬럿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섬세한 감각이 있었고, 나는 지구에서 쌓아 온 지식과 기술이 있었으며, 폴랑은 천재인 데다가 그간 경력을 쌓아 온 만큼 아주 노련했고 발도 넓었다.
그런 세 사람의 열정으로 디자인한 드레스인데, 사실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얼마 가지 않아 수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의상실이 되었다.
소피아는 황궁 시녀를 때려치우고 우리 의상실의 회계를 맡아 주었다. 사실 돈 떼먹진 않을까 불안하긴 했는데, 그간 샬럿과 꽤 친해졌는지 아주 철저하게 관리해 주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모든 의복의 콘셉트는 ‘자유’. 의상실의 이름은 자유의 고대 어인 ‘엘레프’였다.
엘레프가 안정되고 나자 폴랑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메르텐시아 영애 이름을 걸면 매출이 부진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영애 소문 많이 안 좋잖아요. 모두 마녀, 악녀 하면서 쉬쉬하는데.”
그건 또 무슨 막말이야.
나는 함께 지내다 보니 내가 편해졌는지, 스스럼없이 말하는 폴랑의 이마에 딱 소리 나게 꿀밤을 먹였다. 그러자 드레스 주름을 잡고 있던 그는 악 소리를 내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내가 있어서 성공한 거란다.”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가벼운 응징이었지만 설마 내가 직접 폭력을 행사할 줄은 몰랐는지, 폴랑은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악녀라고 악명 높긴 한데 그만큼 많이 회자되는 게 자유로움이잖아.”
“그, 그렇죠.”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함, 압도적인 수준의 영웅담, 그리고 여성의 몸으로, 장녀도 아니면서 공작 작위를 물려받게 되었지. 우리 디자인 주제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잖아.”
뭐든 스토리가 중요하다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오만한 표정을 짓자 폴랑은 ‘맞는 말이긴 한데, 본인 입으로 말하니 재수 없네요.’라고 말하는 듯한 떫은 표정을 지었다.
“언제는 추켜세우기 바쁘더니? 볼 장 다 봤다 이거냐? 얼른 찬양하지 못해?”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대륙 너머에서 새로 들여온 원단을 서로 비교하고 있던 샬럿이 우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일라 덕분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고마워, 늘 감명 받고 있어.”
“…….”
“…….”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갑자기 수줍어지잖아. 뭘 잘못 먹었나.
“두 분 다 얼굴 빨개지셨는데요.”
“시끄러워.”
“조용히 해.”
알을 깨고 나와 지독한 성장통을 겪었기 때문일까. 빠르게 성숙해진 샬럿은 예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뭐 물론, 개과천선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본인 열정에만 매달리는 모습이 솔직히 보기 좋았다.
나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시 얌전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셋은 새로운 디자인에 대해 모의를 했다.
* * *
악녀, 아일라.
그냥 이대로 쭉 악녀로 살기로 했다.
악녀는 있는 힘껏 내가 원하는 길을 달리기에 최적의 타이틀이었으니까.
뭐라고 떠들든 정말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랬더니 최근에 특이점에서 온 추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황태자의 여자를 빼앗았단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영문을 모르겠으나 소문에 의하면 메르텐시아 영애는 여자마저 함락시키는 마성의 팜므파탈이란다. 그리고 귀족들은 역시 마녀라며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샬럿이 베르너를 거절하고 내 쪽에 붙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황태자가 뭔가 잘못해서 샬럿이 떠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으니, 원인을 내게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저 마녀가 우리의 성녀를 유혹해서 타락시켰다, 하는 식으로. 황당했으나 샬럿도 나도 그 소문에 특별히 연연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소한 일이 누군가의 인내심을 완전히 끊어낼 줄은 몰랐다.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며 침대 위에서 뒹굴던 때였다. 여느 때처럼 완벽한 연미복으로 내 방에 들어온 킬리안이 문을 닫고, 그대로 잠금쇠를 걸었다.
찰칵― 하고 부드럽게 문이 잠겼다.
나는 아슬란의 신작을 손에 든 채 내가 다가오는 킬리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적막으로 가득 찬 방 안에 그의 구두 소리만 일정하게 울렸다.
“킬리안?”
내 부름에도 킬리안은 대답 없이 새하얀 장갑을 벗어 땅에 떨어트릴 뿐이었다. 그가 한숨처럼 느릿하게 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리자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눈가를 가렸다.
“에코, 나는 네 마지막 남은 인간의 삶을 존중해.”
킬리안은 달콤한 미소를 보이며 느릿하게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게 간지러워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사이 어깨너머로 단단한 팔이 뻗어 오더니 어느새 그가 내 위에 올라탔다.
그는 나를 침대 위, 그의 아래에 완전히 가두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인간으로 지내는 동안, 내가 모든 것을 망쳐 버리기 전에 좀 달래 주지그래?”
나는 펼쳐진 책을 방어막 삼아 든 채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설마 그 소문 때문에요?”
날이 갈수록 킬리안의 질투와 소유욕이 심해지는 것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걸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실제로 그는 나와 샬럿이 처음 엮였을 당시에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베르너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찌질함에 감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도 안 믿을 텐데요.”
“소문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킬리안은 딱 잘라 말했다.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베르너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묘한 반응을 보였었지. 내가 킬리안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나?
“음, 어…… 제가 그대만을 영원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마침 들고 있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읽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그림 같이 빙긋 웃으며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너와 서로 영혼으로 묶인 사이지만, 형식적으로도 묶이고 싶다는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나는 킬리안과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봤어도 ‘연인’이라고 정의 내린 적조차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너도 날 좋아하고 나도 널 좋아하니 연애할래요?’ 같은 풋풋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냥 A에서 Z로 순식간에 건너뛴 철저하게 욕망에 충실한 관계였다. 생각해 보니 좀 심각하긴 하네.
내가 신이라 자각했기 때문일까, 미처 형식적인 관계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이미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내 손목에 새겨진 문양이 그 증거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떠올리니까 모두에게 그가 내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어졌다. 억겁 같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인데 나는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
“저와 결혼해 줄래요?”
꽃다발도 없고 반지도 없는 프러포즈였다. 진심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말했으나 이 자세로 어떻게 말해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킬리안은 왠지 긴장한 내 표정을 보고 피식 웃더니 전보다 누그러진 기색으로 내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건 네가 곤란해지잖아.”
결혼하게 되면 내 지배권은 모두 킬리안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내가 공작 작위를 받을 예정이니, 나중에 킬리안이 위조 신분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메르텐시아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킬리안의 원래 정체를 밝히는 건 더더욱 큰일이고 말이다.
그는 간단하게 해결책을 줬다.
“정부로 들여.”
“……그걸로 괜찮아요?”
“이번 생은.”
우리의 연이 끝이 아닌, 이제야 겨우 시작임을 알고 있기에 흔쾌히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킬리안이 내 정부가 된다니.
정부라는 말의 울림이 낯설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다. 킬리안이 완벽한 집사가 되어 내 곁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그라면 어느 자리에 있든 간에 아주 능숙하게 그가 맡은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역할은 뭐지.
정부의 역할…….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화려한 이목구비와 남자다운 목선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흉근을 지나 아래에 닿았다가 재빨리 다시 올라갔다.
킬리안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느른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는 답답해 보일 정도로 목을 바짝 조르고 있던 타이의 매듭 위에 손가락을 걸고 밑으로 거침없이 당겼다.
스르르 풀어져 어느새 내 몸 위에 떨어진 은색 타이는 마치 나를 뱀처럼 옭아매는 듯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제 정부가 되어 주실래요?”
내 짧은 고백과 함께 개인 집사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끝마친 킬리안은, 우리의 시간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기꺼이.”
<‘악녀 메이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