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피의 구혼 (1)2021.04.04.
손끝에서 편지가 구겨졌다. 두 번째 편지였다.
“…….”
리에네는 핏기가 사라져 차갑게 굳은 흰 손을 바라보았다. 제 손이 아닌 것만 같았다. 편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보름이나 기다렸으니, 답을 주시길. 첫 번째 편지의 내용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나우크 성의 공주님께. 티와칸 용병대의 수장이 청혼하는 바입니다.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티와칸 용병대는 청혼을 한다는 명목으로 보름째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공주님.”
귀족 대의회의 고문관 마실로우가 리에네를 불렀다. 표정과 음성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설마 받아들이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놈들은 인간의 도리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야인입니다. 야만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감히 청혼이라니! 공주님께 누구보다 훌륭한 정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바로 그들이 야만인이라는 증거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라도 있나요?”
리에네가 구겨진 편지를 손끝으로 펴며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우리는 저들을 몰아낼 힘이 없어요. 아시잖아요.”
한때는 부유하고 화려했을 이 거대한 회당에 남은 사람은 리에네와 마실로우, 그리고 경비대장 웨로즈가 전부였다. 나우크 왕국의 옛 영화에 비하면 비할 데 없이 초라한 인원이었다. 한참 전에 마흔을 넘긴 강직한 기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은 언제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웨로즈가 그럴 사람이라는 것은 리에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로즈와 같은 생각을 하는 기사들 전부를 죽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모두 함께 죽겠군요.”
“고, 공주님……!”
웨로즈가 땀에 젖은 잿빛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지 않으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보름이었다. 고작 보름 만에 나우크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 외부의 보급로는 진작 끊어졌다. 백성들은 지쳤고, 경비대는 전의를 잃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병력 차이가 열 배도 넘었다. 반면에 대륙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티와칸 용병대는 약간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마치 잠깐 유희 삼아 토끼 사냥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들은 앞으로도 몇 달은 더 이 대치 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결과는 나우크 성의 모두가 산 채로 굶어 죽는 일이 될 것이다. 리에네가 숨을 한 번 삼킨 뒤 말했다.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
마실로우와 웨로즈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안 됩니다, 공주님!”
“네, 안 됩니다! 티와칸이 어떤 족속인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소문은 들을 만큼 들었다. 티와칸을 이끄는 자는 전쟁의 신이 인간의 여인을 겁탈해 낳은 아들이라 했다. 죽음의 신이 그를 저주했고 대지의 신이 그의 육신을 영원히 거부했다고. 그래서 그는 어떤 전쟁터에서라도 결코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을 등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여자보다 남자와 더 즐겨 동침한다고요.”
리에네의 직설적인 발언에 고지식한 구석이 있는 웨로즈가 말을 더듬었다.
“버, 벌써 알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티와칸 용병대는…… 나, 남자를 더…….”
반면에 노련한 고문관은 좀 더 명확한 표현을 사용했다. 청혼을 수락하겠다는 리에네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동침하게 되면 여자는 쉽게 죽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공주님.”
그 말에 리에네의 눈가에도 그늘이 피어났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하긴 했다. 대체 어떤 짐승들이기에.
“그렇다고 나를 하룻밤 만에 죽이진 않을 거예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청혼을 하지도 않았겠죠.”
마실로우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지 마십시오, 공주님. 클라인펠터 경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경은 지금 공주님을 위해…….”
“네, 열흘 안에 샤르카 왕국에서 지원군을 빌려 돌아온다고 했죠.”
리에네가 쓸데없이 비관적인 성격을 지닌 건 아니었다. 단지 너무 많은 희망을 갖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은, 나우크 성의 통치자 아르사크 가문의 리에네 공주는 여기 사는 모든 이의 생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열흘은 벌써 지났어요. 그 사람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장담한 대로 지원군을 빌렸다는 보장도 없고요.”
“설마 클라인펠터 경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공주님을 더 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겁니다.”
“할 수 있었다면 벌써 돌아왔겠죠. 약속한 시간 안에.”
리에네는 가시를 삼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아르사크 가문의 기사단장이자 연인인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약속을 곱씹었다. 처음 티와칸 용병대가 나우크 성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지체 없이 기사단을 이끌고 샤르카 왕국으로 떠났다. 샤르카 왕국에서 가장 큰 가문이 그의 외가였다. 지원군을 얻어 낼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딱 열흘. 그 시간만 견디라 했다. 리에네 역시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 앞에 한 줌의 믿음은 너무도 나약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무엇보다 그 사람이 지원군을 데려온들, 샤르카 왕국에서 티와칸을 넘어설 만큼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주진 않을 거예요. 지금 티와칸과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할 나라가 대체 어디 있나요. 대륙에서 가장 큰 르케스 왕국조차 티와칸과 평화협정을 맺었죠. 그것도 몹시 굴욕적으로요.”
약속한 시간을 벌써 5일이나 넘긴 것이 그 증거였다. 마실로우와 웨로즈도 마냥 지원군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눈먼 희망인지 알고 있었다.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티와칸의 청혼은 진짜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보름씩이나 얌전히 포위만 한 채 답을 기다리고 있을 리 없겠죠. 저들의 병력이라면 언제든지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텐데요.”
저와 함께 나우크 성을 책임지는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며 리에네는 결정을 내렸다.
“아르사크 가문의 마지막 피를 이은 자로서, 저에게는 나우크를 수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 한 사람의 혼인이 이 땅의 모든 목숨을 지켜 낼 수 있다면, 그 혼인은 인내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공주님…….”
웨로즈가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라진 옛 영화를 대신해 회한과 탄식이 나이 든 기사의 눈가를 주름지게 했다. 하지만 마실로우는 끈질겼다.
“그럼 클라인펠터 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클라인펠터 가문은 나우크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가문입니다.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 낼 수는 없습니다.”
마실로우는 클라인펠터 가문과 오래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장차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리에네와 결혼해 나우크의 공동 통치권자가 되리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상의한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어요.”
“공주님. 그 말을 클라인펠터 가문 앞에서도 할 수 있겠습니까?”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그 사람을 기다리느라 지금껏 나우크의 경비대가 피 흘리고 있을 때 그 가문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리에네의 안색이 서늘해졌다.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한 번도 진실된 적이 없었다. 클라인펠터 가문은 무너져 가는 이 작은 왕국에서 무시 못 할 재물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권력으로 선친이 죽자마자 리에네에게 혼약을 종용했다. 지금껏 리에네는 정식 약혼을 차일피일 미루며 클라인펠터 가문이 나우크의 공동 통치권마저 움켜쥐려는 것을 애써 피하는 중이었다. 연인은 나름 진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너무 욕심이 많았다. 가뜩이나 척박한 이곳을 뼈만 남기고 전부 발라먹을지도 몰랐다.
“답신을 보내겠어요. ……티와칸의 수장에게.”
웨로즈와 마실로우가 각자 눈을 치켜뜨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리에네가 전혀 다른 이유로 야만인의 청혼을 반대하는 두 사람을 향해 단호히 입을 열었다.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답신이 전달되고 한 시간 뒤. 청혼한 쪽과 청혼받은 쪽이 만날 장소가 정해졌다. 리에네는 웨로즈를 비롯한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에 올랐다.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가 늘어나는 동안 나우크 성도 멀어졌다.
“…….”
리에네가 고개를 살짝 돌려 방금 떠나온 성을 바라보았다. 과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 * * 협의된 장소는 나우크 성과 티와칸의 군영에서 정확히 중간 지점이었다. 티와칸 측에서 미리 군막을 쳐 놓았다. 리에네는 웨로즈만 대동한 채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명분은 청혼이었지만 분위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양측의 병력이 군막을 가운데 두고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서로를 마주했다.
“……아직 안 왔군요.”
탁자 하나, 마주 보는 의자 두 개가 전부인 군막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웨로즈는 분노에 가득 차 상대측의 빈 의자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예의라고는 평생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종자들입니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생겼잖아요. 좋게 생각하죠.”
농담 같지만 진심도 섞여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리에네는 군막으로 걸어오는 내내 자신이 혹시 겁을 먹고 떠는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협박에 굴해서 청혼을 수락하고는 있지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
리에네는 자신의 자리라 생각되는 의자에 앉으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제 잠시 후면 전쟁의 신이 대지에 버린 사생아라는 티와칸의 수장이 들어설 것이다. 떨면 안 돼. 리에네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얕잡혀 보이면 안 돼. 이건 청혼이 아니라 협상이야. 저들이 뭘 원하든 쉽게 내어주면 안 돼.
“공주님.”
갑자기 웨로즈가 리에네를 불렀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소리가 들립니다.”
“……네?”
“이건 분명히 칼소리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저 야만인들이 저들끼리 싸울 이유라도 있…… 아!”
웨로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손으로 무릎을 내리친 웨로즈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클라인펠터 경이 틀림없습니다! 지원군을 이끌고 와 티와칸을 공격한 겁니다!”
“뭐라고요?”
리에네가 울컥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 사람이…… 아니, 그러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허락하시면 제가 밖을 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예 지금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들은 지금 전투에 휘말려 우리 측에 약속을 깨트린 책임을 물 정신도 없을 겁니다.”
웨로즈가 앞장서서 길을 재촉했다.
“서두르십시오, 공주님.”
리에네가 막 발을 떼던 그 순간. 짓궂은 장난처럼 군막의 입구가 들렸다. 휙, 펄럭! 어둑하던 군막 안에 걷잡을 수 없는 광량이 쏟아져 들어왔다. 리에네가 웨로즈의 손을 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절로 눈꺼풀을 깜박대자 새하얘진 시야에 검은 실루엣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컸다. 실루엣만으로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고, 크고, 단단하고…… 몹시도 사나우리라는 것도.
“늦었습니다.”
마른 풀이 바람에 부딪쳐 흔들릴 때처럼, 건조하고 나른한 음성이 귀를 울렸다.
“나우크의 공주님을 뵙습니다.”
티와칸의 수장이 도착했다. 그가 했던 야만적인 청혼에서 도망치려던 바로 그 순간.
* * * 눈이 부셔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리에네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크게 뜨고 제 앞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응시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압도적인 체구가 위압감을 흘렸다. 남자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저려 왔다. 남자의 머리칼은 아주 짙은 검은색이었고, 반대로 깨끗한 물처럼 아주 옅은 푸른색 눈동자는 사람보다 맹수에 더 가까워 보였다. 아주 강렬한 생김새였다. 리에네는 이런 외모를 지닌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는데, 도리어 시선은 굳은 것처럼 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사람보다 짐승을 더 닮은 것 같은 야만인은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와 투명한 호수 같은 눈의 조화가 현란할 정도였다. 말도 안 돼……. 리에네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남자의 미모가 주는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 차려. 야만인이 야만인답지 않게 생겼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어.